062. 현대문학연구학회 하계 학술대회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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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 현대문학연구학회 하계 학술대회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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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 현대문학연구학회 하계 학술대회 (1)
2021.06.24.
현대문학연구학회 하계 학술대회가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이번 학술대회를 책임지게 된 민영환 교수는 평소보다 바쁜 시간을 보냈다.
민 교수가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넌지시 말했다.
“예진아. 아무래도 준비 장소를 다른 곳으로 옮겨야겠구나. 손님이 많이 올 거 같군.”
“그럼 307호에서 준비하겠습니다.”
“그래.”
강예진과 민우, 진섭, 그리고 문하나는 필요한 물건을 307호로 옮겼다. 307호는 휴게실 정도로 사용되고 있었기 때문에 큰 문제는 없었다.
그때 뒤따르던 진섭이 들릴 듯 말 듯 민우에게 투덜거렸다.
“그런데 민 선생님 너무 방목하시는 거 아니냐? 완전히 예진 선배한테만 맡긴 꼴이잖아. 이거 불안한데.”
“누나가 알아서 잘하시겠지. 논문 프로포절도 그렇고 이것저것 빈틈없이 잘 준비하셨잖아.”
“그렇긴 해도.”
민영환 교수는 특별한 지시를 내리지 않았다. 그저 열심히 하라는 말을 할 뿐이다.
그래도 학회 준비는 차질 없이 진행되었다. 총무간사 역을 맡은 강예진 덕분이었다.
강예진은 석사 시절부터 민영환 교수의 밑에서 학회를 포함한 각종 행사를 준비했다.
그뿐이 아니다. 그녀는 논문 프로포절을 포함해 대학원 오리엔테이션 등 각종 행사를 도맡아 하고 있다. 그만큼 수완이 좋다는 말이다.
민우는 막힘없이 지시를 내리는 강예진을 보며 감탄했다.
‘나도 언젠간 누나처럼 잘할 수 있겠지?’
행사 준비를 맡긴다는 것은 그만큼 교수들의 신임을 얻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민우는 강예진의 능력이 한편으로 부러웠다.
대학원은 공부가 전부는 아니다. 라인을 챙기는 것은 물론, 각종 행사도 있다. 지나치면 문제가 되겠지만 어느 정도는 해야 했다.
곧 준비팀에 속한 네 사람이 307호에 자리를 잡았다. 강예진은 그곳에 있던 다른 학생들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일을 시작했다.
강예진이 물었다.
“박민우. 뷔페 업체에 연락해봤어?”
“내일 문제없이 준비해 준다고 답변받았습니다.”
“인원 더 추가될 수 있다고 얘기 잘했지? 뒤늦게 준비 못 해왔다고 발뺌하는 업체들도 많아.”
“계약서에 확실히 해 놨습니다. 근데 누나. 접수 데스크엔 누가 앉아요?”
“아. 그렇지 참. 데스크.”
강예진은 잠시 고민했다. 데스크는 중요한 자리다. 회원 명부를 검색하고 등록비를 받아야 했고, 학회 안내를 잘해야 했다.
그렇다고 학회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을 앉히기는 어렵다. 어쩔 수 없이 한 자리는 강예진이 차지해야 했다.
문제는 나머지 한자리.
강예진은 끝까지 고민했다. 머릿속에 떠오른 적임자는 이수빈이었지만, 그녀는 다른 선택을 했다.
“박민우. 네가 앉아라.”
“제가요? 전 어떻게 안내해야 하는지 잘 모르는데…….”
강예진이 미간을 찌푸렸다.
“이 멍충아. 잘 모르니까 옆에 앉아서 배우라는 거잖아.”
“옙. 알겠습니다.”
사실 민우에겐 다른 목적이 있었다. 학회장을 돌아다니며 발표도 듣고 다른 학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던 것이다.
특히 피에르 랑느 박사와는 어떻게든 인사 정도는 하고 싶었다.
학문에 임하는 태도에 대해 듣고 싶었다. 과연 세계적인 석학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하루 종일 데스크에 앉아있어야 하는 건 아니겠지? 기회는 분명히 있을 거야. 정 안되면 화장실 가는 척이라도 해서…….’
민우는 피식 웃었다.
물론 데스크에 앉는 것만으로도 도움이 되는 게 분명 있긴 하다.
옆에서 제대로 배운다면 내년부터는 더 큰 역할을 맡을 수 있다. 학회가 성공적으로 마무리된다면 공을 나누기도 쉽고.
강예진이 물었다.
“하나야. 학생회장한텐 연락 왔니?”
“잠시만요.”
문하나는 석사 2학기 학생이었다. 키가 작고 주근깨가 볼 위에 가득 있는 여학생이다. 자대생이라 학부생 동원 임무를 맡았다.
이수빈의 한 학번 선배였고 민우보다는 세 살 아래였다. 엄밀하게는 그녀가 선배였지만 민우에게 선배 노릇을 하진 않았다.
문하나는 컴퓨터로 참여 명단을 확인하고는 몸을 돌려 답했다.
“최대 서른두 명 참여 가능할 거 같아요. 스물일곱은 확정이고, 다섯 명이 미확정이에요.”
“서른두 명. 그러면 대학원생이 열다섯 명이 들어가니까…… 얼추 쉰 명은 채우겠네. 좋아! 다들 모여 봐.”
강예진이 각자 일을 하고 있던 후배들을 한 자리에 소집했다. 그리고 진지한 표정으로 목소리를 깔았다.
“내일 학회는 정말 중요한 행사야. 학회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학교에서 열리는 만큼 학교의 명예가 걸린 일이지. 그러니까 다들 정신 똑바로 차리고 있어. 알겠니?”
“네!”
“특히나 해외에서도 연사들이 오시니까 신경 많이 써야 한다. 하나랑 진섭이는 연사들 곁에서 잘 보좌해 드려.”
중요한 행사를 앞두고 있어서 강예진은 무척 예민했다. 가끔 화를 내기도 했지만, 후배들은 이해했다. 그 자리의 무게를 알기 때문에.
이번엔 민우를 주목했다.
“박민우. 넌 지금 진섭이랑 같이 가서 인쇄물 리셉션 홀에 넣고 와. 곧 학과 사무실 문 닫겠다.”
“알겠습니다.”
“리어카 써야 할 건데, 학생복지위원회 가면 빌려주니까 가서 써. 학생증 들고 가는 거 잊지 말고. 둘이 할 수 있겠어?”
“한번 해보겠습니다.”
민우는 진섭과 함께 바로 인문관을 나섰다. 노을이 지고 있었지만, 7월 말이다. 여전히 더웠다.
인쇄물은 꽤 많았다. 큰 리어카 절반을 채울 정도로. 행사 안내는 물론 학회지까지 인쇄되어 있기 때문에 무겁기도 했다.
두 사람은 학과 사무실을 왔다 갔다 하며 짐을 모두 리어카에 실었다.
물론 그게 끝이 아니었다. 이제 리셉션 홀까지 가서 다시 인쇄물을 안으로 날라야 했다.
“으아, 좀 쉬자!”
진섭이 인상을 쓰며 주저앉았다. 벌써 땀이 비 오듯 흐르고 있었다.
“이게 무슨 개고생이야? 한여름에.”
“어쩔 수 없지 뭐. 대학원에 남자가 거의 없으니 우리라도 해야지.”
“학부 애들 뒀다 뭐에 쓰냐?”
“우리 일은 우리 선에서 끝내야지. 학부 애들이 무슨 죄야? 게다가 방학인데.”
“엄연히 따지면 우리 일도 아니잖아. 민 선생님 일이지. 학회 행사면 학회에서 용역을 써서 준비해야 하는 게 맞지 않나?”
학회도 기금으로 운영된다. 그 돈으로 용역을 쓴다면 준비가 한결 쉬워진다.
하지만 명인대 국문과에서는 대학원생들이 학회를 준비하는 것이 관례처럼 굳어져 버렸다. 장소 물색, 인쇄 및 제본, 식당 섭외 등의 모든 것을 총무간사와 대학원생들이 해결했다.
민우가 씁쓸히 웃으며 말했다.
“전에 민 선생님이 하신 농담이 떠오르네.”
“뭔데?”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 대학원생을 시키면 된다는 그 얘기?”
뼈아픈 농담이었다.
입맛을 다신 진섭이 다시 일어나 리어카를 끌기 시작했다. 민우도 뒤에서 그를 도왔다.
진섭이 지나가듯 말했다.
“우리 나중에 교수 되면 이런 악습 죄다 없애버리자. 응? 애들한테 연구를 시켜야지 노동을 시키면 쓰겠어?”
“당연히 그래야지.”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앞길이 좀 까마득하긴 했다.
교수 임용은 쉽지 않은 일이다. 두 사람 모두 학부가 명인대가 아니라는 게 큰 약점이다.
국문과 교수 임용에서 대학원 간판은 별로 쓸모가 없다. 학부 간판이 제일 중요하다.
비명인대 국문과 출신 박사들이 문을 두드릴 수 있는 곳은 수도권에서 멀리 떨어진 대학뿐이다.
‘상아대로 돌아갈 수 있다면 좋겠는데. 자리가 날까 모르겠네.’
최근 프라임 사업 등의 영향으로 인문학 관련 교수 임용이 많이 줄어들었다. 특히 문학, 사학, 철학이 제일 심하다.
교수를 늘리지 않는 것으로 끝나면 그나마 다행이다. 학과를 없애거나 통폐합시키는 대학이 점차 늘고 있는 추세다.
‘내가 박사를 따고 나면 더 심해져 있을 텐데.’
인문학 관련 학과는 단기간에 성과를 내기 어렵다. 대학이 기업화되는 상황에서 이공계에 비해 경쟁력을 갖추기가 어렵다.
자연스레 정원이 감축되고 국가의 지원이 끊긴다. 이러한 악순환이 반복된다면 결국, 교수도 학생들도 설 자리를 잃게 된다.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게 답답하네. 공부만 하면서 가만히 때를 기다려야 하는 건가.’
그때 민우가 멈칫했다. 진동이 느껴졌다.
“섭! 잠깐만. 전화.”
리어카가 잠시 멈췄다. 학회가 끝날 때까지 핸드폰에 신경을 써야 한다. 언제 어디서 긴급전화가 날아올지 모르니까.
민우가 목장갑을 벗고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진동이 여러 번 왔는데 전화가 아니었다. 주예린이 보낸 톡이었다.
‘사진?’
민우는 잠시 고민하다가 잠금을 열고 메시지를 확인했다.
곧 그의 눈빛이 반짝였다. 이내 그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안도의 한숨과 함께.
한진섭이 투덜거리며 다가왔다.
“수빈이냐? 아 진짜. 양심이 있으면 일하는 도중에 연애질은 좀 하지 말자.”
“아니. 주예린.”
“응? 무슨 일로?”
민우가 대답 대신 사진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대학원 입시 결과표였다. 주예린의 이름 옆에 ‘합격’ 글자가 선명했다.
* * *
리셉션 홀에 복사물을 모두 옮기고 나니 저녁이 되어 있었다. 배는 배대로 고프고, 온몸이 땀으로 젖었다. 샤워가 절실했다.
진섭이 축 늘어진 채 물었다.
“몇 시냐?”
“일곱 시 반쯤 됐다.”
“배고파 죽겠네. 빨리 가자. 저녁은 먹고 집에 가야지…….”
민우와 진섭은 리어카를 반납하고 인문관으로 돌아왔다. 저녁은 강예진과 문하나와 함께 먹기로 이미 약속을 해 놓았다.
메뉴는 중국집.
인문관으로 이어진 계단을 오르던 민우가 뭔가를 떠올리고는 잠시 걸음을 멈췄다.
“섭. 나 전화 좀 하고 들어갈 테니까 먼저 가라.”
“뭐 먹을 건데? 미리 시켜 놓게.”
“짜장 곱빼기.”
진섭이 올라가자 민우는 인문관 앞 계단에 걸터앉아 전화를 걸었다. 수신자는 주예린이었다.
“일하는 중이라 바로 답장을 못 했네. 합격 축하한다.”
― 고맙습니다! 야호!
주예린은 한껏 신나 보였다. 단 몇 마디뿐이었는데도 그녀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기분은 어때?”
― 벌써 서울로 날아가는 중이에요! 하늘을 보세요. 곧 제가 보일 겁니다!
“떨어지지 않게 조심해라.”
한편으로 미안하기도 해서, 민우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너한테 한 학기 더 준비하라고 충고했던 게 생각나네. 차라리 잘해보라고 격려를 해 줄 걸 그랬어. 실력도 모르고. 미안하다.”
― 으응? 아녜요. 오히려 전 고마운데요? 그렇게 진지하게 얘기해 준 건 오빠뿐이었거든요. 다른 사람들은 해봐라, 할 수 있다 얘기해 주는데…… 진심이 느껴지진 않았어요.
“그래도.”
― 떨어지면 상처받을까 봐 그러신 거잖아요. 저 생각해서.
주예린의 목소리가 어울리지 않게 차분해졌다. 그만큼 지금 그녀는 장난이 아니라 진심을 담아 이야기하고 있었다.
왠지 코끝이 찡했다.
하지만 그것은 잠깐이었다.
― 아! 물론 오빠보다는 서지훈 선생님이 더 진지하게 도와주셨지만. 히히히.
민우는 웃었다. 그래. 이래야 주예린답지.
“아무튼, 선생님께 인사 잘 드려. 중간에서 고생 많으셨을 거야.”
― 물론이죠!
“조만간 서울에서 보자.”
민우는 전화를 끊었다.
왠지 기분이 이상했다. 아직 새 학기가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후배가 하나 생긴 기분이었다.
‘아니, 기분이 아니지.’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것은 분명히 일어난 현실이었다. 그렇게 인문관으로 들어가려던 민우는 뭔가를 떠올리고는 다시 멈췄다.
얼마 전에 있었던, 후회됐던 일 하나.
‘그 녀석한테도 연락을 해봐야겠네. 생각난 김에.’
민우는 다시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이번 수신인은 정연주였다.
다행히 그녀는 전화를 받았다.
* * *
7월 29일 금요일 오전 8시 20분.
민우가 제일 먼저 리셉션 홀에 나타났다. 단정하게 입고 나오라는 말에 오랜만에 정장을 입었는데, 넥타이는 하지 않았다.
‘예진 누나는 아직인가? 조금 이르긴 하지만 우선 접수 테이블 준비부터 해 볼까.’
인쇄물을 한쪽에 올리고, 접수용 노트북 두 대를 설치했다. 어젯밤 미리 짐을 옮겨놓은 덕에 금방 끝낼 수 있었다.
다과도 문제없었다. 일회용 컵과 각종 차, 그리고 음료수를 정수대 옆에 놓았다. 200명이 먹고 마시기에 충분했다.
“민우. 벌써 나왔어?”
강예진이었다. 그녀는 린넨 재질의 파란색 여성 정장을 입었다. 평소에는 볼 수 없었던, 시원하면서도 매력적인 여성미를 뽐냈다.
“혹시 몰라서 일찍 나왔어요. 진섭이도 지금 오는 중이고요.”
“부지런해서 맘에 드네. 자, 받아라.”
강예진이 상자 꾸러미에서 목걸이형 이름표를 건넸다. ‘실행위원’이라는 글자가 보였다. 민우는 이름표를 목에 걸었다.
그때 복도 저쪽에서 구두 소리가 들렸다.
진섭인가 싶어 민우는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한진섭이 아니었다.
키가 크고 멀쑥한 청안(靑眼)의 신사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