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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 나비효과 (2) (61/500)


061. 나비효과 (2)
2021.06.21.


고급스러운 화분이 모서리에 놓여 있고, 풍경화를 담은 액자가 벽을 장식하고 있다.

한마디로 넓고 근사한 집무실.

그곳의 주인인 정연주는 중역용 책상에 앉아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책상 위에는 결재를 기다리는 서류가 한가득 쌓여 있었다. 연주는 무심한 눈으로 서류를 뒤적이다 그만두었다.

‘그만하고 싶은데…….’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과 같았다.

회사 일은 천성에 맞지 않았다. 잘 알지도 못하는 서류를 처리해야 하는 것은 물론, 사람들의 기분을 맞춰줘야 하는 게 너무 어려웠다.

이사라는 직급이 있긴 했지만, 그녀보다 높은 사람들은 그룹에 허다하였다.

특히 오빠와 언니들과 사이가 멀어지고 말았다. 경영 일선에 참여하지 않아 안심하고 있었는데, 갑작스레 연주가 그룹에 들어오게 된 것.

그녀는 어려서부터 천재라고 불려왔다. 자연스레 형제는 물론 친척 간에 불협화음이 생기고, 견제가 시작될 수밖에 없었다.

그게 너무 싫었다.

왜 피붙이끼리 경쟁을 하고 서로 시기해야 한단 말인가?

‘대학으로 돌아가고 싶어.’

차를 타고 30분이면 가는 거리였지만, 너무나도 멀게 느껴졌다. 연주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때 노크가 들렸다.

“들어와요.”

고급스러운 감색 정장을 입은 사내가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대한그룹 비서실장 유진태였다.

연주가 의자에 똑바로 앉았다.

표정이 좀 풀어졌는데, 그나마 그룹에서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유진태였다. 어렸을 때부터 곁에서 보좌하던 사람이니까.

“왜 왔어?”

“회장님께서 보내셨습니다. 요즘 기운이 없어 보이신다며 잘 챙겨드리라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선물을 좀 준비해 왔습니다.”

“바쁠 텐데…….”

“아가씨 일은 제가 직접 챙겨야지요.”

유진태의 손에는 아이스크림과 초콜릿이 들려 있었다. 비싼 메이커의 제품이었다. 모두가 연주가 좋아하는 것들이었다.

연주는 유진태의 배려에 고마웠다. 하지만, 시기가 좋지 않았다.

유진태는 아이스크림 통을 꺼내 연주가 먹을 수 있도록 준비했다.

“아가씨?”

연주는 끝내 숟가락을 받지 않았다. 먹으면 바로 체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미안해. 별로 생각이 없어.”

“알겠습니다. 냉장고에 넣어두라고 할 테니 생각나실 때 드십시오.”

유진태는 밖으로 나가 직원에게 사온 것들을 냉장고에 넣으라고 지시했다. 곧 그가 다시 이사실로 들어왔다.

“저녁은 늘 드시던 거기에 예약을 해두겠습니다. 오랜만에 같이 식사나 하시죠.”

“별로 생각 없어.”

“아가씨. 부디 제가 정년을 대한그룹에서 맞이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부탁입니다.”

유진태가 오랜만에 농담했다.

효과는 좋았다.

잔뜩 흐려있던 연주의 얼굴에 미소가 걸렸으니까.

연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유진태는 곧장 핸드폰으로 한정식집에 전화를 넣어 예약했다. 최고급 요리를 준비할 것을 당부했다.

“요즘 많이 힘드시죠?”

“그냥…… 그래.”

“저는 아가씨께서 잘 이겨내실 거라고 믿습니다.”

겉과 속이 달랐다.

유진태도 잘 알고 있었다. 지금 연주가 앉아있는 자리는 그녀와 잘 어울리지 않다는 것을.

하지만 세상일이라는 게 늘 뜻대로 되는 것만은 아니다.

연주는 대한그룹이 쥔 하나의 카드에 불과했다. 적당한 자리에 앉아 가업을 잇고 나이가 차면 정략결혼을 할 것이다.

연주의 문득 민우의 한마디를 떠올렸다.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방법을 연구하는 것이 바로 인문학이라는 말이.

“유 실장은 지금 본인의 인생에 만족해?”

“물론이죠. 대한그룹에서 일할 수 있는 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최고의 행운이지요. 무엇보다도…….”

유진태 실장은 연주의 이름을 말하려다 말았다. 월권이었다.

“그룹에서 좋은 분을 모실 수 있어서 기쁩니다.”

“난 그렇지 않아.”

연주가 의자를 돌렸다. 뒤에 놓인 동양란의 잎을 부드럽게 쓸며 말을 이었다.

“난 언제쯤 일을 그만둘 수 있을까? 그만하겠다고 말씀드리면 할아버지나 아버지가 화를 많이 내시겠지?”

한낱 비서실장이 대답할 만한 질문은 아니었다. 청산유수로 유명한 유진태 실장도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미안해. 내가 괜한 질문을…….”

그때 인터폰이 울렸다.

또 누가 결재서류를 들고 찾아온 걸까. 연주는 한숨을 내쉬며 수화기를 들었다.

― 이사님.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손님이요?”

연주는 책상 위에 놓인 달력을 확인했다. 오늘 스케줄상 찾아올 손님은 없었다.

― 명인대학교의 박민우 씨라고 하는데요.

“아!”

깜짝 놀란 연주가 일어서서 문으로 달려갔다. 연락을 일부러 피하고 있었는데, 설마 그가 회사까지 찾아올 줄은 몰랐다.

하지만 문을 열지 못했다.

비서실장 유진태가 앞을 막아선 것이다. 통화 소리가 커서 그도 누가 찾아왔는지 들었다.

“아가씨. 자리에 앉으십시오. 밖에 보는 눈이 많습니다. 괜한 오해를 살 수 있습니다.”

“알았어.”

정연주가 자리에 앉자 유진태가 문을 열었다. 그리고 민우에게 인사했다.

“오랜만에 뵙는군요. 박 선생님. 잘 지내셨습니까?”

“예. 안녕하세요.”

민우는 간단히 대꾸하고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냉랭한 태도에 미소를 지은 유진태는 밖으로 나가 문을 닫았다.

이사실에 두 사람만 남았다.

“왜 그렇게 연락이 안 돼?”

민우가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소파가 푹신했다. 인터폰을 든 연주의 손이 살짝 떨렸다.

“저기, 시원한 거 두 잔만 갖다 줘요.”

― 예, 이사님.

연주가 민우의 맞은편에 앉았다. 민우는 가방에서 흰 봉투를 꺼내 연주의 앞에 밀어 넣었다.

“덕분에 병원에 편히 있었어. 하지만 병원비까지 신세 지기는 좀 그렇더라. 돌려주려고 왔어. 미리 얘기도 없이 왜 쓸데없는 짓을 했냐.”

연주는 고개를 숙였다.

처음엔 민우가 좋아할 줄 알았다. 돈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세상에 없었으니까.

하지만 민우는 그렇지 않았다. 부담된다며, 오히려 돈을 돌려주겠다고 했다.

평생 걱정 없이 온실 속의 화초처럼 자라 온 그녀였다. 지금, 이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전혀 감을 잡지 못했다.

“전 그냥, 그냥 오빠한테 빚진 걸 갚으려고…….”

“빚 정도는 그냥 병문안 와 준 것만으로도 충분히 갚아졌어. 정말이야.”

민우가 웃었다. 분위기가 너무 경직되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 가벼운 분위기에서 그녀에게 진심을 전하고 싶었다.

그러지 않으면 분명 연주는 상처를 받을 것이다. 예민한 아이니까.

“돈 없이는 못 살지만, 세상에서 돈이 전부는 아니야. 호의가 지나치면 부담이 될 수 있어. 지금처럼.”

“미안해요. 오빠.”

“아니야. 미안할 것까지는 없지. 그런데 뭐 하나만 물어도 되려나.”

민우는 잠시 말을 멈췄다.

때마침 문이 열리고 여직원이 들어와 시원한 차 두 잔을 각각 앞에 내려놓았다.

“고맙습니다. 잘 마실게요.”

여직원이 상냥히 웃으며 허리를 굽혔다. 민우는 그녀가 나가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경영지원팀에 새로 들어온 박민아 대리. 알고 있지?”

“예.”

“우리 누나인 것도.”

“…….”

연주는 입술을 꾹 다문 채 대답하지 못했다. 무언의 긍정. 민우는 자신의 예상이 맞았다고 판단했다.

‘어쩐지 이직이 너무 쉽게 풀렸다 했어.’

민우는 찻잔을 들어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찻물이 식도를 적시며 가슴이 시원해졌다. 하지만 오히려 마음은 답답해졌다.

그래도 민우는 얼굴에서 미소를 거두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줬으면 좋겠는데. 우리 누나를 채용한 거, 네가 지시한 거야?”

“그게…….”

“내 누나라는 이유로 채용을 한 거야?”

연주는 울상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민우는 겉으로는 태연했지만, 속은 무척 혼란스러웠다. 대체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감이 서지 않았다.

다른 이유 때문은 아니다.

‘만약 누나가 알게 된다면 상처받을 텐데. 누나 자존심에 오죽하겠어?’

언젠가 알게 될 일이다. 작은 조직이다. 인사팀에서는 이 상황을 대강 눈치채고 있을 것이고, 소문이 퍼지는 것은 순식간이다.

“연주야. 신경 써 준 건 정말 고마운데, 앞으로는 같이 얘기하면서 했으면 좋겠어. 네가 뭔가 할 때마다 나도 그렇고 우리 누나도 그렇고 부담감만 커질 거야.”

“저는…….”

“우리는 사는 세계가 좀 다르니까. 내 말, 무슨 얘긴지 알지?”

연주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변명하고 싶었다.

그런 의도로 한 일이 아니라고.

하지만 두 눈이 화끈거리며 뭔가 쏟아지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연주는 입을 열지 못했다.

“미안해. 시간을 너무 많이 뺏었구나. 이만 가 볼게. 잘 지내고.”

민우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밖으로 나가려던 그가 뭔가를 떠올리고는 가방을 열었다. 책 하나를 꺼냈는데, 프랑스어로 된 피에르 랑느 박사의 책이었다.

그가 그것을 연주에게 건넸다.

“예전에 우리 프로젝트 할 때 있잖아. 그때 네가 얘기했던 학자가 쓴 신간이야. 읽어봤는데 괜찮더라. 이번 주에 학회가 있어서 한국에 온다고 하던데. 혹시 벌써 읽었으려나?”

연주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책을 두 손으로 받아들었다. 민우는 다시 잘 지내라는 말을 남기고 이사실을 나섰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연주의 눈에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그러려던 게 아니었는데.”

단지 민우와 가깝게 지내고 싶어서 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게 그에게 부담이 됐다니, 이해할 수 없으면서도 너무 슬펐다.

어쩌면 연주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사람 사이의 관계에 서투른 그녀였다. 시작점부터가 달라 눈높이가 맞지 않았다. 병원비도, 민아의 이직 건도 필연의 일부다.

“그런 의도로 한 일이 아니었는데.”

입술을 꽉 깨물어도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딸칵―

곧 문이 살짝 열렸다.

책상에 앉아 펑펑 울고 있는 연주의 모습을 본 유진태는 다시 문을 닫았다. 그는 민우와 잠시 이야기를 할까 했지만, 그만두었다.

그것도 월권이었다.

* * *

“얘기는 잘 풀렸어?”

“대충은.”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민우는 잠시 건물 옥상에서 누나를 만났다. 먼저 연락이 올 정도로 꽤 걱정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왜 그랬대?”

“예상대로야. 특별한 이야기는 없었어.”

“네가 얼마나 잘해줬는데 그래? 혹시 이사님이 너 좋아하고 있는 거 아냐?”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국문학 전공자 앞에서 어설픈 소설 쓰지 마.”

민우는 난간에 등을 기댄 채 누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옥상에 올라오면서까지 계속 고민하고 있었다.

“누나.”

잠시 뜸을 들이던 민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말하지 않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니야. 나 이만 간다. 시간 많이 뺏겼을 텐데 일 열심히 하셔.”

“내가 너 누나인 거 알고 있었대?”

민우가 돌아섰다. 누나는 팔짱을 끼고 진지하게 묻고 있었다.

눈치를 채고 있구나.

이렇게 된 이상 민우는 솔직하게 털어놔야겠다고 생각했다. 28년을 함께한 사람이다. 눈을 속이는 건 불가능했다.

“알고 있더라.”

“내 실력을 보고 뽑은 게 아니라 너의 누나라서 여기에 채용된 거지?”

“거기까진 나도 몰라.”

민우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맥락이라는 게 있다. 확답을 하지 않았지만, 연주는 그런 의도로 누나를 채용한 것이리라.

“어쩐지…… 내가 이런 회사에 대리를 달고 들어올 수 있을 리가 없지. 이상하다 했어.”

민아는 자조 섞인 미소를 지었다. 민우는 차라리 누나가 자신에게 욕을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너무 불편했다.

“박민우.”

“미안.”

“웃긴 놈이네. 왜 네가 사과해? 막말로 네가 이사님한테 찾아가서 날 뽑아달라고 부탁한 것도 아닌데.”

“그래도.”

“아아. 졸지에 낙하산이 됐네. 그렇다고 회사 그만둘 수도 없고. 어떻게 하지?”

연년생이었지만, 민아는 민우보다 사회경험이 훨씬 많았다.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할지 잘 알고 있었다.

민아는 좀 더 현실적으로 생각했다.

바람이 한차례 몰아쳐 왔다. 옷깃과 머리카락이 정신없이 흩날렸다. 바람이 그칠 무렵엔 민아의 표정이 차분해져 있었다.

“이사님 너무 몰아붙이지 말자. 미워하지도 말고. 방식이 좀 잘못됐지만…… 좋은 의도에서 한 일일 거야. 재벌집 아가씨라서 여러모로 서툴렀겠지.”

“그랬겠지.”

누나의 말을 들으니 민우는 조금 후회됐다. 이사실에서 너무 자신의 이야기만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연주도 뭔가 하고 싶었던 말이 있었을 텐데.’

다음에 또 볼 기회가 있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때가 되면, 한 번쯤은 이야기를 제대로 들어줘야겠다고 다짐했다.

서투른 것은 연주만이 아니었다. 민우도 마찬가지였다. 아직 서른도 되지 않은 풋내기일 뿐이다.

“읏차!”

박민아가 기지개를 쫙 켰다.

어느새 그녀는 난간 너머로 펼쳐진 빌딩숲을 바라보고 있었다. 노을을 담은 눈빛이 평소와 똑같아졌다.

“낙하산 소리 안 듣게 열심히 일해야겠다! 어휴, 못난이 동생 때문에 이게 뭔 고생이야? 전생에 나라를 팔아먹었나.”

“그럼 수빈이랑 바꾸든지. 여동생 갖고 싶어 했잖아. 수빈이도 언니 갖고 싶다던데.”

민아는 피식 웃으며 동생의 어깨를 툭 쳤다.

“너 저녁에 약속 있어?”

“아니. 없어.”

“그럼 조금만 기다릴래? 곧 퇴근이니까. 오랜만에 같이 저녁이나 먹자.”

민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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