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0. 나비효과 (1)
(60/500)
060. 나비효과 (1)
(60/500)
060. 나비효과 (1)
2021.06.18.
“박민우 씨의 공모전이 제게 도움이 된다는 게 무슨 이야기인지 이해가 안 되는군요. 비약이 심한 거 아닌가요?”
“죄송합니다. 지음사의 정식 직원도 아닌데 예민한 부분을 건드렸네요.”
“아니, 그런 의도로 한 이야기는 아니고…… 공모전은 공모전일 뿐이니까 그렇게 얘기한 거죠. 공모전과 비즈니스는 완전히 다르잖아요?”
그녀는 여전히 날카로웠다. 하지만 예상했던 질문이었다. 이 부분을 납득시키지 못한다면 설득은 불가능하리라.
“대상을 받을 경우에는 아이디어를 실제 사업에 적용시킬 수 있게 됩니다. 저희 팀은 제안자니까 사업에 관여할 수 있고요.”
“그 말인즉슨…….”
민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부 지원을 받아 실장님의 프로젝트는 다시 살아납니다. 아직 실장님의 기획은 끝난 게 아니라고 생각해요. 저는 그 불씨를 살려보고 싶어요.”
반쯤 포기하고 있던 송승현 실장에게는 뜻밖의 제안이었다.
송승현 실장은 시계를 확인했다. 미팅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오늘 미팅에 좀 늦기로 했다.
직감이 말해주고 있었다.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말을 민우가 준비해 왔다고.
“실장님이 기획하신 오픈 라이브러리 사업은 제게 큰 영감을 주었습니다.”
각 분야의 지식을 하나의 공간에 집약시킨다. 다양한 지식들이 하나의 망을 형성하고, 그것을 조건 없이 서비스한다.
그것이 바로 송승현 실장이 기획한 새로운 오픈 라이브러리의 요체였다.
그러나 수익성 문제로 경영진의 반대에 부딪혔고, 베타 서비스 중이던 오픈 라이브러리의 폐쇄를 앞당기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유료서비스.
단 한발만 물러서도 송승현 실장의 기획은 경영진을 만족시켰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가끔은 그녀가 기업을 위해 일하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목적으로 일하는 것인지 헷갈릴 때가 있었다.
“영감. 칭찬으로 듣지요. 하지만 내가 그리던 그림은 비즈니스에 불과해요. 민우 씨의 공부는 물론, 인문학 장려방안과는 조금 거리가 있는 것 같은데.”
“그걸 제 입맛에 맞게 조금 다듬을 생각입니다.”
“다듬다니요. 어떻게?”
이제부터가 본론이었다. 민우는 가벼운 긴장을 품으며 설명을 시작했다.
“인문학이라고 한다면 듣는 사람들의 대다수가 막연하고 어렵다고 느낄 겁니다. 그게 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일 거고요. 한때 제가 그랬던 것처럼.”
민우의 마지막 고백에 송승현 실장이 보일 듯 말 듯 한 미소를 지었다. 자신의 경험을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그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그녀가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좀 더 진지하게 이야기를 듣겠다는 의도였다.
“실장님의 기획은 훌륭하지만 오픈 라이브러리는 일반인의 눈에는 그저 새로운 백과사전으로 보일 겁니다.”
“그럴 수도 있지요. 애초에 그러려고 기획을 한 거였고.”
“그래서 저는 생각했습니다. 조금 불친절하다. 인문학을 처음 접하는 사람들을 위한 길잡이가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길잡이?
송승현 실장의 눈에 흥미가 돌았다. 그 눈빛을 확인한 민우가 물었다.
“혹시 게임 같은 거 하십니까?”
“많이는 안 해요. 핸드폰으로 할 수 있는 간단한 퍼즐 게임만 가끔 하지요.”
“게임에 들어가는 공통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바로 튜토리얼이죠. 인문학에 대한 튜토리얼. 오픈 라이브러리에 그것을 추가할 생각입니다.”
여러 방식을 생각하고 있었다. 터치 형식의 게임으로 개발할 수도 있고, 삽화를 그려 스토리텔링 방식으로 보여줄 수도 있다.
방법은 말 그대로 무궁무진했다.
그 아이디어가 나오게 된 배후에는 민우의 개인적인 공부 경험이 크게 작용했다.
“인문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주변 지식이 너무 많이 필요합니다. 지식을 얻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시간이 필요하고요. 일반인들은 막연하고 어렵게 느낄 수밖에 없지요. 그걸 해소하려는 겁니다. 물론 한 번에 모든 내용을 추가할 수는 없으니 시즌이나 테마별로 콘텐츠를 추가하는 방법을 구상 중입니다.”
공부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손 가는 대로 책을 읽으며 이해할 수 있지만, 대개는 그렇게 하기가 어렵다. 시간적인 문제 때문이다.
그래서 민우는 인문학에 대한 것뿐만 아니라 어떻게 하면 개념을 쉽게 이해할 수 있는지를 보여줄 생각이었다. 하나의 ‘놀이’처럼.
물론 이 모든 것이 민우의 힘으로 탄생한 것은 아니었다.
수빈과 진섭의 도움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수빈의 영민한 두뇌와 진섭의 재치가 만나 완성된 아이디어였다.
“튜토리얼…….”
송승현 실장이 작게 중얼거리며 민우의 보고서를 확인했다. 이미지를 활용한 기본 콘셉트가 콘티 형식으로 그려 있었다.
오픈 라이브러리 전체를 놓고 본다면 실현이 불가능한 계획이다. 세상의 모든 지식을 다루니까.
하지만 그것을 인문학으로 한정한다면 어떨까?
그래도 회의적인 결론이 나왔다. 송승현 실장이 다시 보고서를 닫았다.
“그게 시스템적으로 가능할까요? 벌써부터 한계점들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하는데. 개발 자체가 가능할지 미지수네요.”
“실현 가능성이 없다는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투자의 문제일 뿐이죠. 무엇보다도 우리 팀이 해야 하는 일은 어떻게 하면 대중이 인문학을 좀 더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가에 대한 아이디어를 내는 겁니다.”
“모험이군요.”
송승현 실장이 한마디로 요약했다. 하지만 뒤에 이어질 한 마디가 더 있었다.
“무척 흥미로운.”
“예, 맞습니다.”
민우는 미소를 지었다. 자신의 설득이 어느 정도 통했다는 걸 느꼈다.
“뚝딱 만들어 낼 수 있는 건 분명 아닙니다. 각 분야의 전문가도 많이 필요하고, 시간과 자본도 많이 필요하겠죠.”
“그러면서도 도전을 하겠다?”
“본선까지 올라갔는데 한번 화끈하게 판을 벌여 봐야죠. 어떤 분들이 심사에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깜짝 놀랄 겁니다.”
송승현 실장이 민우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패기는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걱정되는 부분이 하나 있었다.
“오늘 이야기를 들어보니 공부 외의 일에 너무 신경을 쓰는 건 아닌지 우려스럽군요. 민우 씨. 사업가 기질이 보여요.”
“사업을 할 생각은 조금도 없습니다. 다만 세워둔 원칙은 있어요. 지식을 어떻게 나눌까 고민하는 것도 학문을 하는 사람의 의무라고.”
그의 원칙은 송승현 실장의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만한 힘이 있었다.
“잘 들었습니다. 인용을 허락하죠.”
“고맙습니다. 대상 수상으로 보답하겠습니다.”
“자신감이 지나치네요. 실패할 확률이 압도적으로 높다는 걱정은 들지 않나요?”
이 질문은 예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민우는 이 질문이 오히려 너무나 쉽게 느껴졌다.
그래서 이렇게 되물었다.
“실패하는 것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걸 더 걱정해야 하는 게 아닐까요?”
송승현 실장은 말문이 턱 막혔다. 마치 자신에게 하는 듯한 말처럼 들렸다.
자리에서 일어선 민우가 꾸벅 허리를 굽혔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선배님.”
민우가 나가자 송승현 실장은 책상으로 돌아와 앉았다. 다리를 꼬며 문득 궁금증이 들었다.
조금 전까지 열의를 다해 자신을 설득한 그 미약한 존재가 과연 어디까지 성장할 것인지를.
“아무튼, 정말 닮았다니까.”
송승현 실장은 핸드폰을 집었지만, 고개를 가로저으며 다시 내려놓았다. 서지훈 교수에게 전화를 해 봐야 좋은 말은 못 들을 것 같았다.
* * *
인문사회연구소로 돌아온 민우는 자리에 쓰러지듯 기댔다.
‘와, 진이 다 빠지네. 무슨 깡으로 실장님한테 그런 얘기를 한 거야? 박민우. 너 미쳤냐?’
만년필의 힘은 아니었다. 만년필은 가방에서 잠자고 있었으니까. 오롯한 자신의 힘이다.
‘간이 좀 더 커진 느낌인데. 뭐, 나쁘진 않네. 앞으로도 좀 더 키워 봐야지.’
실없는 생각을 하며 천장을 바라보았다. 곧 활기를 회복한 민우는 바로 307호 톡방에 이 사실을 알렸다.
― 송 실장님 설득 성공!!!
애기♡: 와 잘됐네요! 난 까일 줄 알았는데… 그 실장님 보통이 아니잖아요. 완전 노처녀 히스테리―ㅅ―
민우는 잠시 액정에서 시선을 떼고 생각에 잠겼다.
그녀가 보통이 아닌 건 맞다. 걷는 길도 다르다.
하지만 오히려 자신과 비슷한 부류의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학문이라는 공통분모가 있었고, 그래서 설득이 쉬웠다.
톡이 이어졌다. 진섭이었다.
섭섭한애: 좋아 이제 나만 믿어! 내가 캐리한다ㅋㅋㅋㅋㅋ
애기♡: 섭이 오빠는 할 줄 아는 게 슬라이드 꾸미는 것밖에 없어서 좀 섭섭해
섭섭한애: ㅡㅡ 야
― 아무튼 내일까지 데이터 뽑아서 보낸다. 섭섭하지 않게 잘 부탁해
섭섭한애: ㅡㅡ….
대화를 끝낸 민우는 핸드폰을 넣으려고 했는데, 때마침 전화가 왔다. 액정을 확인하니 누나의 이름이 떠 있었다.
“일하는 중 아냐? 웬일로 전화를 다.”
― 그 병원비 아가씨, 연락됐어?
“아, 그거…… 안 그래도 그거 때문에 전화하려고 했어. 이거 전화로 얘기하기는 좀 그렇고, 내가 회사로 갈게. 혹시 잠깐 나올 수 있어?”
― 잠깐은 괜찮아.
선우기획은 지음사에서 세 정거장 거리였다. 마음만 먹으면 걸어서도 갈 수 있는 가까운 곳이었다.
“그럼 지금 간다. 근처 카페에서 자리 잡고 연락할게.”
오늘의 목표를 완벽하게 달성한 민우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지음사를 나섰다.
이동하는 도중에도 민우는 시간을 아깝게 허비하지 않았다.
인쇄물을 읽으며 서론의 두 번째 챕터 집필을 준비했다. 연구사검토 부분이었는데, 각종 이론들을 시기에 따라, 그리고 내용에 따라 분류하는 것이 핵심이었다.
‘어떤 방법으로 하는 게 좋을까? 단순히 시기 순으로 나열하는 건 좀 재미가 없을 것 같긴 해.’
연구물이 발표된 연대순으로 정리하는 것이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방법이었다. 그게 가장 쉽고 편리하니까.
하지만 민우는 생각을 좀 달리했다.
‘전에 민식이 형이 말씀하셨지. 평생을 따라다닐 책이라고.’
그렇다면 편한 것을 쫓는 것보다는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방식이 좋지 않을까?
‘각 이론의 기원을 찾아서 비슷한 것끼리 분류를 하는 방법이 좋겠다. 시간이 몇 배는 더 걸리겠지만…… 그게 의미가 있겠지? 공부에도 도움이 될 거고.’
그렇게 하는 게 정말 옳은 걸까?
해낼 수 있을까?
그런 의문이 들긴 했지만 민우는 결심을 굳혔다. 일단 부딪혀 보기로 했다.
‘아차. 하마터면 지나칠 뻔했네.’
잽싸게 벨을 눌렀다. 잠시 후 버스가 멈춰서고 민우가 내렸다.
오후 세 시 반 무렵에 선우기획에 도착했다. 그 근처에 있는 커피전문점에서 커피를 하나 시키고 누나를 기다렸다.
잠시 후 박민아가 안으로 들어왔다. 민우는 손을 살짝 들었다.
“무슨 큰일이길래 여기까지 찾아오고 그래? 그냥 전화로 얘기하지.”
“병원비 내준 거, 학교 프로젝트에서 만난 동생이라는 건 알지?”
“알지. 전에 얘기했잖아.”
“그 동생 이름을 내가 얘기 안 한 거 같은데, 듣고 놀라지 마. 이름은 정연주야.”
“정연주?”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이름이었다. 무표정으로 이름을 한번 중얼거린 민아는 화들짝 놀랐다.
“서, 설마 우리 이사님 말하는 건 아니지?”
“안타깝게도 맞아.”
“세상에…….”
두 남매는 잠시 침묵했다.
“그래서 함부로 움직이질 못하겠어. 괜히 누나한테 피해가 가는 게 아닐까 싶어서. 뒤끝 있는 애는 아니긴 한데…….”
민우는 말을 줄였다. 확신이 없어서였다.
연주에 대해 아는 거라고는 프랑스 문학을 전공하는 대한그룹 재벌 3세라는 것뿐이다. 그녀의 진짜 모습이 어떤지는 모른다.
“으으. 난감하네.”
민아는 이마를 짚었다. 동생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제대로 이해한 모양이었다. 호의를 거절한다면 뒤가 찝찝할 것이다.
사실 병원비 건이야 그냥 넘어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민우는 마음에 걸리는 게 하나 있었다.
바로 누나의 이직.
그것만큼은 한번 확인을 할 필요가 있었다. 이직에 연주가 개입되어 있다는 소문이 회사에 돈다면 결국 힘들어지는 건 누나니까.
“그냥 돌려줘. 병원비 150만 원. 이사님한테는 껌값이겠지만 우리가 그걸 받아야 할 이윤 없잖아. 돈이 없는 것도 아니고.”
“알았어. 그럼 온 김에 만나고 가야겠다.”
“돈은 있어?”
“인센티브 들어온 거랑 월급 모아놓은 거 합치면 얼추 맞아. 내가 삽질한 거니까 내가 해결할게.”
민우는 가방에 넣어 온 봉투를 확인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민아가 앞장서서 그를 이사실로 안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