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9. 싱가포르에서 온 메일 (2)
(59/500)
059. 싱가포르에서 온 메일 (2)
(59/500)
059. 싱가포르에서 온 메일 (2)
2021.06.17.
요즘은 하루에 메일이 수십 통이나 온다.
절반 이상이 강연 요청이고, 스팸 메일과 예전에 인문학 강의를 들었던 학생들의 메일이 섞여 있었다.
메일뿐만이 아니라 전화도 온다. 어떻게 번호를 구했는지는 몰라도 대부분 쓸데없는 전화였다. 덕분에 모르는 번호는 받지 않게 됐다.
‘거절하는 것도 일이네. 양식이라도 하나 만들어 놓아야 할 기세야.’
민우는 우선 강연 요청 메일에 정중한 거절의 말을 담아 답장을 했다. 최근 건강이 좋지 않아 입원했었다는 말도 덧붙였다.
거절 메일을 보낼 때마다 좀 아깝긴 했다.
욕심이 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민우는 좀 더 내실을 가지는 쪽을 선택했다. 좀 더 학문에 대한 이해가 깊어졌을 때 무대에 나가기로 했다.
그것이 자신은 물론, 강의를 듣는 사람들에게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다만, 학생들이 보낸 메일은 충분한 시간을 들여 길게 답장했다.
특별한 질문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주로 일상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래도 잊지 않고 연락을 해 주는 학생들이 고마웠다.
‘다음에 대전 내려갈 때 한번 모이라고 할까? 앞으로 정기적인 모임으로 키워도 좋을 거 같은데.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이니.’
그들은 민우에게 있어 첫 제자나 다름이 없었다. 다른 사람들보다도 정이 많이 갔다. 그들의 미래가 어떻게 펼쳐질지 기대가 되기도 했다.
한참 동안 열심히 키보드를 두드리던 민우가 손을 뗐다.
‘답장은 대충 끝났고…… 이제 송 실장님 미팅 준비를 좀 해 볼까.’
민우가 인터넷 창을 닫으려던 그때, 딩동 소리와 함께 새로운 메일이 도착했다.
영어로 된 메일이었다.
‘스팸인가?’
제목이 ‘Dear Mr. Park’였다. 민우는 휴지통에 넣으려다가 혹시나 해 메일을 클릭했다. 자신의 성이 적혀 있었으니까.
How are you?
My name is Jamie Wilson, a director of National University of Singapore.
I am sending this e―mail because I was deeply impressed by your lecture uploaded on Mootube.
Although the lecture was initiatively targeting adolescents, it was a great lecture which allows broader audience to ponder upon the deep nature of humanities. If we have a chance…….
민우의 동공이 흔들렸다.
스팸 메일이 아니었다. 정중한 어조로 쓰인 강연 초청 메일이었다.
요약하자면, 국립 싱가포르 대학에서 자신을 연사로 초청한다는 내용이었다. 인문학 관련 강의를 열고 싶다고 적혀 있었다.
‘설마 외국 대학에서 연락이 올 줄은…… 그것도 싱가포르 대학이라니!’
민우는 틈이 날 때마다 무투브에 들어가 강연 영상에 달린 댓글을 확인하곤 했다. 그러다 동영상에 영어 자막이 들어가게 됐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러지 않았다면 해외에서 이렇게 연락이 올 일은 없었을 것이다.
민우는 싱가포르 대학에서 날아온 그 메일에서 한참이나 시선을 떼지 못했다.
‘싱가포르 대학이라면…… 작년 QS에서 발표한 세계대학 순위에서 12위를 차지한 명문이잖아?’
세계 12위, 아시아 1위로 랭크된 유서 깊은 국립대였다. 그 사실이 민우의 가슴을 벅차오르게 했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다른 강연 제안과는 무게 자체가 달랐다. 국내가 아니라 해외 대학이라는 점도 한몫을 했다.
‘해외 무대를 경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다른 곳이었다면 간단히 결정을 내렸을 텐데, 해외 명문대학이라고 하니 쉽게 판단을 할 수 없었다. 이성보다 감정이 앞섰다.
‘그냥 거절하기는 좀 아까운데. 선생님께 한번 상의를 드려볼까?’
그렇게 생각한 민우는 곧장 서지훈 교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안녕하세요. 지금 통화 괜찮으세요?”
― 지금 살짝 안녕하진 못한데…… 무슨 일이냐?
“아, 죄송합니다. 그럼 제가 다음에 다시 걸게요.”
― 괜찮아. 얘기해라.
“제가 지금 강연 요청 메일을 받았는데요. 좀 고민이 돼서요. 싱가포르 대학에서 메일이 왔어요.”
― 으잉? 싱가포르 대학에서?
깜짝 놀란 서지훈 교수는 잠시 침묵했다. 잠시 후 그가 차분히 물었다.
― 그래서. 네 말은 정말 좋은 기회니까 한번 하고 싶다 이거지?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렇습니다. 물론 선생님의 충고도 있었지만, 거긴 세계적인 대학이잖아요. 저한테 다시 이런 기회가 다시 올까 싶기도 하고.”
― 흐음…… 그래. 뭐 결정은 네가 하는 거니 말리지는 않으마. 근데 가서 무슨 주제로 얘기할지는 정해 놓은 거야?
“지금부터 고민해 봐야죠.”
민우가 들뜬 어조로 대답했다. 그래서일까. 서지훈 교수가 웃기 시작했다. 민우는 그가 왜 갑자기 웃는지 알 수가 없었다.
― 박민우 너 지금 컴퓨터 앞이지?
“예.”
― 그 메일 나한테 포워딩해 봐.
민우는 그가 하라는 대로 시켰다. 전달 버튼을 눌러 서지훈 교수의 이메일을 입력했다.
잠시 후 메일이 발송되었고, 전화기 너머에서 다시금 서지훈 교수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 하하하하! 아무튼, 너도 참. 역시 박민우 김칫국은 알아줘야 한다니까. 야, 인마. 메일 다시 확인해 봐. 진짜 싱가포르 대학에서 온 메일이 맞는지.
“네? 그게 무슨…….”
민우는 눈을 깜빡였다. 대체 선생님은 무슨 소리를 하고 싶으신 걸까?
― 보통 강연 요청은 말이다. 소속 기관으로 와. 특히 해외 명문대는 절차와 과정을 중요시하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컨택하는 경우는 별로 없어. 네가 명인대에 있으니 명인대 국문과나 인문대로 공문을 보냈겠지. 아니면 동영상 저작권자인 동구청 문화공보과로 갔거나.
“아!”
그제야 민우가 이상함을 깨달았다. 확실히 최근에 온 강연 요청 중 몇 개는 명인대 국문과나 동구청 문화공보과를 거쳤다.
민우기 발송인의 주소를 확인했다. 곧 그의 눈에 실망감이 맺혔다.
메일 도메인이 @chlrkdgksghk.com으로 되어 있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곳이었다.
평소라면 쉽게 발견할 수 있었을 텐데, 잠시 흥분한 나머지 놓치고 말았던 것.
민우는 허탈감에 한숨을 내쉬었다.
“완전히 속았네요.”
― 메일 도메인이 이상한 걸로 되어 있지?
“네…….”
스팸이었다. 싱가포르 대학에서 온 메일이라면, 메일 주소 뒷자리가 싱가포르 대학 도메인으로 되어 있어야 했다.
심지어 첨부파일은 확장자가 EXE로 되어 있었다. 민우는 아예 손도 안 댔다. 실행시키면 컴퓨터가 망가지겠지.
서지훈 교수의 충고가 이어졌다.
― 그런 식으로 사기 치는 인간들 많아. 속지 말고 대처 잘해라. 잊지 말고. 넌 아직 스물여덟, 석사 1학기라는 걸.
“죄송합니다. 제가 잠시 들떠서 눈이 멀었나 봐요.”
― 뭐 그런 거 가지고 죄송하다고 그래? 잘 모르니 그럴 수도 있지. 아무튼, 멘탈 관리 잘하고 또 보자꾸나. 근데 말이다. 이거 수업 시간에 애들한테 소문내도 되냐?
“당연히 안 되죠!”
― 하하하하! 그게 내 뜻대로 되려나 모르겠네. 아무튼, 이만 끊는다.
시원한 웃음소리와 함께 전화가 끊겼다.
민우는 두 손으로 머리를 벅벅 긁으며 짜증을 냈다. 그리고 메일을 스팸함으로 날렸다.
‘속이려 한 놈이나 속은 놈이나…… 하긴. 강연 하나 그럴싸하게 했다고 해외 명문대에서 초청장이 날아올 리는 없지.’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감도 컸다.
그래도 민우는 긍정했다.
오늘은 하나의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언젠가는 해외 명문대의 초청을 받고야 말겠다는 의지를 불태웠다.
‘실망하지 말자. 기회는 반드시 또 온다!’
민우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그가 향한 곳은 위층에 있는 출판기획실이었다.
* * *
출판기획실의 전남규 차장은 때마침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민우는 미리 준비한 선물을 그에게 건넸다. 향초 선물세트였다.
“차장님. 병문안 와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덕분에 빨리 나았어요.”
“아이구! 뭘 이런 걸 다…… 이젠 정말 괜찮으신 겁니까? 쓰러졌다는 얘기 들었을 때 정말 놀랐어요.”
“부끄러운 일이네요. 그나저나 바쁘지 않으시면 잠시 미팅 가능할까요?”
“물론입니다.”
두 사람은 회의실로 자리를 옮겼다.
전남규 차장은 민우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뜻하지 않게 블로그 계약 건이 엎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실 것을 직접 준비했다.
“다 지난 일이긴 합니다만 블로그 건은 정말 죄송합니다. 저희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서.”
“아아뇨. 괜찮습니다. 좋은 기회였긴 하지만 언젠가 다시 써먹을 일이 있겠죠.”
전남규 차장은 입맛을 다셨다. 민우의 블로그가 아깝기도 했고, 송승현 실장의 기획이 틀어진 게 너무 아쉬웠던 것이다.
“실은 요즘도 박민우 씨 블로그에 자주 찾아갑니다. 최근에도 쉬지 않고 포스팅에 열을 올리시던데, 잘되고 계신 겁니까?”
“한일대 영문과 박진영 교수님하고 어떻게 연이 닿아서요. 그분께 좀 도움을 받고 있어요.”
“역시. 어쩐지 좀 디테일이 살아났더군요.”
확실히 민우의 블로그는 예전보다 전문성을 갖추고 있었다.
영미문학 분야의 새로운 페이퍼를 번역하고 있었는데, 시대 구분과 분류법에 대해 박진영 교수에게 도움을 많이 받았다.
지금까지의 포스팅이 무분별하게 이루어졌다면, 이제는 분명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올라오는 듯한 느낌이었다.
민우가 말했다.
“다름이 아니고, 저희 단행본 내는 거 있잖습니까. 그거 납기일 10일 정도 줄여도 될 거 같아서요.”
“오, 그렇습니까? 좋은 소식이네요. 어차피 한 달 정도 여유를 두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충분히 준비하셔서 좋은 원고 부탁드립니다.”
“고맙습니다.”
하지만 민우의 본론은 그게 아니었다. 원고 납기일을 당기는 것 정도는 메신저를 사용해도 크게 문제가 없으니까.
민우가 조심스레 운을 뗐다.
“실례되는 질문인데, 혹시 오픈 라이브러리 서비스 말이죠. 회생할 가능성은 전혀 없는 건가요?”
“으음. 그게…….”
전남규 차장은 말을 아꼈다. 말을 해도 되는 건지 아닌지 고민을 하는 것 같았다.
“뭐, 박민우 씨는 저희와 파트너이기도 하시니까 말씀을 드려도 괜찮겠네요. 서비스는 곧 종료되겠지만, 실장님은 아직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포기하지 않았다는 건 계속 사업을 추진하시려는 거죠?”
“그렇죠. 물론 윗선에서 곱게 봐주진 않을 것 같지만 말입니다.”
민우는 원하는 답을 얻었다. 곧 그는 미팅을 마치고 송승현 실장의 방을 노크했다.
의외의 손님이 찾아오자 무언가를 바쁘게 쓰고 있던 송승현 실장이 펜을 멈췄다.
“오랜만이네요. 박민우 씨. 입원했다고 들었는데. 괜찮나요?”
“예. 걱정해 주신 덕분에요.”
“그런데 무슨 일이죠?”
“상의드릴 게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송승현 실장이 고개를 갸웃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단행본 출간이라면 전 차장님하고 이야기를 하면 될 텐데. 뭐 잘 안 풀리는 거라도 있었나 보군요.”
“그건 아니고요. 좀 다른 이야깁니다.”
“다른 이야기?”
송승현 실장이 잠시 고민했다. 이 어린 친구가 또 무슨 재미있는 걸 들고 왔을까? 곧 두 사람이 마주하며 자리에 앉았다.
송승현 실장이 시계를 확인했다.
“10분 뒤에 미팅이 있어요. 그러니 빨리 부탁해요.”
“알겠습니다.”
미리 준비한 보고서를 송승현 실장에게 건넸다. 그녀는 빠르게 내용물을 훑었다.
민우가 설명을 시작했다.
“이번에 한국연구재단에서 주관하는 인문학 장려방안 공모전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예선을 통과했고, 본선 발표만 남겨두고 있어요.”
“그래서요?”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죠. 실장님의 오픈 라이브러리 아이디어를 빌리고 싶습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민우는 자신만만한 미소와 함께 한마디를 덧붙였다.
“아마 실장님께도 도움이 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