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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8. 싱가포르에서 온 메일 (1) (58/500)


058. 싱가포르에서 온 메일 (1)
2021.06.14.


아침 여섯 시.

알람이 울리기가 무섭게 민우가 침상에서 일어섰다. 그는 하품하면서 화장실로 들어갔다.

잠시 후, 간단히 씻은 그가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집 밖으로 나섰다. 온몸을 빙빙 돌리며 몸을 풀고 빠르게 걸었다.

‘좀 덥긴 해도 해가 일찍 뜨니 운동하기 편하네. 겨울에는 헬스 끊는 게 좋겠지?’

더운 것은 잘 참아도 추운 것엔 약했다. 오히려 적당히 더운 지금이 딱 좋았다.

빠르게 걷던 민우가 산책로에 진입했다. 이른 아침인데도 제법 사람이 많았다.

민우가 뜀박질을 시작했다.

처음엔 어설펐는데, 요 며칠 열심히 뛰다 보니 자세가 그럴싸하게 나왔다.

“안녕하세요.”

“어머, 아래층 총각이네. 아침에 운동도 해요?”

“예. 얼마 전에 병원 신세를 좀 졌더니.”

집주인이었다. 조물주 위에 건물주가 있다고 했던가. 민우는 시종일관 예의 바르게 그녀를 대했다.

“어이구, 큰일 날 뻔했네. 어쩐지 며칠 안 보이더라. 젊었을 때 건강 잘 챙겨요.”

“감사합니다. 아주머니도 건강 조심하세요.”

민우는 다시 뜀박질을 시작했다.

얼마 전 있었던 사건을 계기로, 민우의 일상이 조금 변했다.

우선 그는 새벽 한 시가 되면 무조건 잠자리에 들었다. 그리고 아침 여섯 시에 일어나 한 시간 정도 조깅을 했다.

살을 뺄 필요는 없기 때문에 기초체력과 건강 유지를 목표로 가볍게 뛰었다. 그러다 보니 부담도 없고 시간도 아꼈다.

그러다 보니 몸이 몰라보게 달라지기 시작했다.

공부 효율도 높아졌고, 식욕도 예전보다 훨씬 좋아졌다.

‘운동이 이렇게 좋을 줄은 꿈에도 몰랐어. 섭섭이한테도 좀 추천을 해줘야겠다. 요즘 녀석 배 나오는 거 같던데.’

인문대 대학원생과 뱃살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의자에 앉아 있는 일이 많기 때문이다.

산책로를 한 바퀴 돌고 집으로 돌아온 민우는 샤워를 하고 학교에 갈 준비를 했다. 수빈에게 아침 인사를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일주일. 길고도 짧은 시간이었다.

그래서일까. 학교로 가는 길이 조금 어색했다. 설레기도 했다. 처음 명인대에 등교할 때의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오빠!”

버스에서 내리자 이수빈이 달려왔다.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민우는 소매로 이마를 툭툭 눌러 땀을 닦아 주었다.

“더운데 왜 기다리고 있어.”

“그냥.”

민우가 본가에서 쉬는 사이 그녀는 가족들과 해외여행을 다녀왔다. 그간 만나지 못했으니 적잖이 보고 싶었던 모양이다.

두 사람이 나란히 인문관으로 걷기 시작했다.

“본가엔 잘 다녀왔어요?”

“선생님도 뵙고 집에서 맛있는 거 많이 먹고 왔지. 참, 공모전 프레젠테이션 파일은 확인했지? 섭이가 만든 거.”

“박민우 씨.”

민우는 아차 싶었다. 그녀는 뭔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마다 ‘박민우 씨’라고 말하곤 했다.

“내가 여행 다녀왔으면, 어 그래 잘 다녀왔니? 음식은 괜찮았어? 뭐가 제일 재밌었니? 정도는 좀 물어보면 어디 덧나요? 보자마자 또 공부 얘기부터 하네.”

“미안…….”

“애정이 식었나 봐.”

수빈은 입을 삐죽거렸다. 민우는 그녀를 달래주며, 앞으로 가야 할 길이 많이 남았음을 실감했다. 조금 다른 의미로.

다행히 수빈은 금방 풀렸다.

“프레젠테이션은 어제 귀국하자마자 확인했어. 섭섭이 오빠 힘 좀 썼던데?”

“그러게 말이다. 덕분에 발표가 좀 수월해질 거 같아.”

“내용 보충한다는 건 어떻게 됐어?”

“준비는 다 해 놨는데, 일단 송 실장님하고 이야기를 해봐야 할 거 같아.”

두 사람은 공모전 본선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인문관 안으로 들어왔다. 수빈은 307호로 들어갔고, 민우는 박사 연구실을 노크했다.

민우는 평소보다 더 힘차게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어. 왔냐.”

연구실 안에는 최민식만 있었다. 그는 민우를 보며 씨익 웃었다.

“깨질 준비는 됐어? 환자라고 봐주거나 하지 않아.”

“오늘은 쉽지 않으실 겁니다.”

“호오? 자신감이 대단한데.”

민우는 자신 있게 원고를 꺼냈다. 몸도 마음도 달라진 상황이라, 민우의 원고 수준은 이전과는 몰라보게 달라졌다.

민식은 집중해서 원고를 읽었다.

문장이 깨끗하고 앞뒤가 물 흐르듯 이어졌다. 신화학에 대한 보편적인 지식과 그것을 문학에 접목시킨 부분이 인상 깊었다.

최민식이 원고를 손가락을 ‘탁’ 쳤다.

“좋아. 이대로 가자.”

“정말요?”

“그래. 잘 썼다. 푹 쉬고 오니까 본 실력이 나오는구만.”

최민식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원고를 파일에 갈무리했다. 이제 서론 첫 챕터 작업이 끝난 것이다.

민우는 뛸 듯이 기쁜 마음을 가까스로 억눌렀다. 지금 좋아했다가는 그에게 잔소리를 들을 게 뻔했다.

파일을 한쪽으로 치우며 민식이 물었다.

“연구사 검토는 어떻게 되고 있어?”

“100건 좀 넘게 찾았어요. 시간이 날 때마다 계속 추가하고 있습니다.”

“좀 보자.”

민우는 재빨리 노트북에 엑셀 파일을 띄웠다. 항목별로 보기 좋게 정리가 되어 있었다. 쓱 훑어본 민식이 고개를 끄덕였다.

“워드로 정리를 안 했네?”

“엑셀로 하는 게 훨씬 보기 편할 거 같아서요. 찾기도 편하고 데이터 옮길 때도 편합니다. 보세요. 이렇게 하면…….”

민우가 직접 키보드와 마우스를 움직이며 시연했다. 카테고리별로 필터가 걸려 있어 편집이 쉽고 빠르게 이루어졌다.

잠자코 지켜보던 최민식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좋은데? 앞으로도 엑셀로 정리를 하자. 이 파일 내 메일로 하나 보내 놓고.”

“옙.”

“너 이후 스케줄은?”

“이제 예진 누나 만나서 학회 준비 좀 해야 합니다.”

“오케이. 이 정도 페이스라면 납기일 10일 정도 당겨도 될 거 같은데. 너 이따 지음사로 출근하면 전남규 차장님께 대신 얘기 좀 전해 줘라.”

“알겠습니다.”

꾸벅 인사를 하고 연구실을 나선 민우는 서둘렀다. 오늘은 좀 바쁜 날이었다.

307호에 들러 필요한 책과 파일을 챙기고 바로 민영환 교수 연구실로 움직였다. 민 교수는 없고 강예진이 연구실을 지키고 있었다.

“평소보다 왜 이렇게 늦었어?”

“아, 죄송합니다. 잠깐 민식이 형 좀 만나고 왔어요.”

“그래?”

학회가 코앞까지 다가와 있어 그녀는 예민한 상태였다. 민우는 조심조심 맞은편에 앉았다.

강예진은 새침한 표정을 하면서도 따뜻한 커피를 민우의 앞에 놓았다. 과자도 몇 개 놓았다.

“이제 나흘 앞으로 다가왔다.”

의미심장한 한마디에 민우는 침을 꿀꺽 삼켰다.

현대문학연구학회.

해외 초청 인사가 다섯 명이나 되는 큰 규모의 학회다. 소르본 대학의 피에르 랑느 박사는 물론, 중국과 일본 등에서도 연사가 찾아온다.

강예진이 볼펜 끝으로 책상을 툭툭 쳤다.

“이번엔 참석자가 꽤 많을 거야. 예상 인원은 약 200명 정도 되는데.”

“헉. 200명이요?”

생각보다 숫자가 많았다. 문학 쪽에서는 아무리 큰 학회가 열려도 참석자가 100명이 넘는 일이 드물다고 들었는데.

강예진이 눈매를 좁히며 물었다.

“왜? 뭐 문제라도 있니?”

“아뇨. 생각보다 인원이 많은 거 같아서.”

“아무래도 외국 교수들이 몇 명 오니까, 학부생이랑 대학원생들 모조리 동원할 계획이야. 민 선생님이 규모를 크게 할 필요가 있다고 하셨어.”

“그렇군요.”

민우를 빤히 바라보던 강예진이 또다시 볼펜으로 책상을 툭툭 치기 시작했다. 뭔가 할 말이 있어 보였는데, 쉽게 꺼내지 않았다.

“그건 그렇고 학회 안내지 인쇄 맡긴 건 어떻게 되고 있어?”

“오늘 다 끝난답니다. 내일 학과 사무실로 배송해 준다고 했어요.”

“영수증 챙기는 거 잊지 마. 응? 학회 사무국에 보내서 비용처리 해야 하니까. 배송 온 거 정독해서 이상 있는 부분 없나 확인하고.”

“넵.”

민우는 강예진의 지시를 빠짐없이 메모했다. 기억력이 나빠서가 아니었다. 자료를 모아뒀다가 나중에 또 준비할 일이 있을 때 써먹기 위해서였다.

“박민우.”

갑자기 강예진이 손을 뻗어 이마에 댔다. 열을 재는 것처럼. 갑작스러운 스킨십에 민우는 살짝 놀랐다.

“너무 무리하는 건 아니지?”

“아, 괜찮습니다. 이 정도야 뭐 아무것도 아니죠.”

“또 아프면 누나한테 혼난다.”

강예진이 엄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민우는 대수롭지 않게 받았다. 그녀가 대악마를 따라잡으려면 아직 멀었다.

“이제 그런 일 없을 거예요. 잠도 푹 자고 운동도 꾸준히 하고 있으니까요.”

“그거 반가운 소리네. 참, 그리고 학회 실행위원으로 진섭이랑 하나도 끼게 됐으니 참고하고.”

“네. 알겠습니다.”

그 후로 한 시간가량 준비 회의를 하고 나서야 연구실에서 풀려났다. 이제는 지음사로 가서 송 실장과 협상을 할 차례였다.

* * *

지하철을 타고 가는 도중 전화가 왔다. 누나였다.

― 연락 됐어? 그 재벌집 아가씨랑.

“아니. 문자도 안 받고 전화도 안 받아.”

― 뭐야 도대체? 돈 많다고 자랑이라도 하고 싶었던 거야?

“나도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그럴 애는 아니야.”

연주가 병원비를 계산하고 간 것을 놓고 하는 이야기였다.

퇴원한 이후, 민우는 계속 연주와 연락을 시도했지만 닿지 않았다. 수빈에게 부탁했는데 그녀도 연락에 실패했다.

‘회사에 다닌다고 들었는데, 좀 알아봐야겠어. 직접 찾아가서라도 돌려줘야지.’

그렇게 생각하는 와중에 전화기 너머로 누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 박민우. 너 잠은 잘 자고 있는 거지?

“새벽 한 시에 무조건 자. 아침 여섯 시에 일어나고. 일어나서 한 시간 운동하고 학교에 나간다.”

― 한 시간 더 자고 일곱 시에 일어나면 안 돼?

민아의 어조에 걱정이 섞였다. 그녀의 입장에서는 지금도 무리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단행본 낼 때까지만 그렇게 하려고. 학기 시작하면 일곱 시까지 꿀잠 잘 거니 걱정하지 마셔.”

― 그래 그럼. 밥은 잘 먹고 있는 거지?

“턱이 두 개가 돼 가고 있어.”

― 수빈이에겐 좀 안 좋은 소식이지만, 그래도 잘 먹는 게 낫지. 혹시라도 현기증 다시 생기면 병원 꼭 가 보고. 알았니?

“걱정 마. 예전의 내가 아니야.”

전화가 끊겼다. 민우는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으며 계속 생각에 잠겼다.

‘연주가 다니는 회사가 어딘지 알아볼 수 있는 방법이 뭐가 있지? 수빈이한테 한번 물어볼까? 알고 있으려나.’

그러다 문득 민우는 좋은 방법을 떠올렸다.

재벌가의 3세들이 보직을 받을 때 늘 언론에 알려졌던 것을 생각해낸 것이다. 민우는 바로 네이비를 실행시켜 키워드에 ‘대한그룹 정연주’를 입력했다.

무수히 많은 결괏값이 떴다. 신문 기사도 몇 개 보였다.

‘있다.’

타이틀에 익숙한 기업명이 보였다.

― 대한그룹가 막내 정연주 씨. ‘선우기획’ 이사로 발령. 가업 승계에 본격적인 행보를 시작!

선우기획?

민우는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선우기획이라면, 분명 자신의 누나가 다니는 회사였기 때문이다.

‘이런 우연이…… 설마 이름이 같은 다른 기업인가? 아니, 그럴 리는 없잖아.’

문득 예전에 누나와 술을 마실 때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선우기획은 대한그룹 자회사라고. 작지만 내실 있는 기업이라고.

‘그럼 백 프로라는 얘긴데. 이거 왠지 일이 좀 꼬이는 거 같다?’

민우는 왠지 자신이 모르는 어떤 일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직감에 사로잡혔다.

쉽게 생각할 문제가 아니다.

그가 그 문제로 고민하는 사이 지하철이 강남역에 멈췄다. 목적지였다. 민우는 재빨리 내린 다음 지음사 본사 건물로 향했다.

‘일단 좀 신중히 생각해야겠어. 잘못하면 누나한테 화살이 날아갈 수도 있으니까.’

지음사 본사에 들어오니 왠지 낯선 기분이 들었다. 거의 2주일 만의 출근이었다. 내부에 걸린 홍보용 포스터가 바뀐 것 말고는 크게 달라진 게 없었다.

민우는 일단 북카페로 갔다. 병문안을 받았으니 빈손으로 올라가기가 좀 그랬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여덟 잔 주세요. 네 개씩 캐리어에 담아 주시고요.”

민우는 ID카드와 체크카드를 건넸다. 곧 그의 두 손에 커피가 무겁게 들렸다.

ID카드를 찍고 안으로 들어가니 직원들이 하나둘 나와 반갑게 맞아 주었다. 민우는 사 온 커피를 하나씩 나눠 주었다.

“박 쌤. 이제 다 나은 거죠?”

“운동도 착실히 하고 있으니 다시 쓰러질 일은 없을 겁니다. 죄송해요. 괜히 걱정 끼쳐드려서.”

“아직 새파랗게 젊으시면서 벌써부터 쓰러지고 그럼 어째요? 나중에 신혼 생활 어떻게 이겨내려고. 애인도 미인이신데 매일 코피 쏟으시겠네.”

“하하하!”

과연 유부녀였다. 정은아 대리의 진한 농담에 모든 사람들이 한바탕 웃었다. 민우는 부끄러운 마음에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래도.

‘이곳에서 일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아. 즐겁다. 정말.’

아직 연구원 계약 기간이 11개월 정도가 남아 있었지만, 왠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갈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다름 아닌 팀원들 때문이었다.

지음사 인문사회 팀원들은 하나같이 재치 있고 배려심이 넘치는 사람들이었다. 사회 초년생인 민우가 배울 점이 많았다.

‘재계약을 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어차피 타대생이라 BK21에 들어가기는 어려우니까 여기에서 계속 연구비를 받으면서 연구를 하는 게 좋겠어.’

1년 정도 뒤면 석사 논문을 쓸 테고, 박사과정에 입학할 것이다. 그때는 석사급 연구원이 아니라 박사급 연구원으로 계약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조건이 더 좋아진다. 기본급이 올라가는 것은 물론, 각종 인센티브 항목까지 들어갈 수도 있다.

‘나중에 술자리에서 윤정민 팀장님께 살짝 물어볼까?’

그런 생각을 하며 연구실로 돌아온 민우는 컴퓨터를 켜고 메일부터 확인했다.

‘또 잔뜩 쌓였네.’

민우는 이마를 짚고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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