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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7. 히든 카드 (2) (57/500)


057. 히든 카드 (2)
2021.06.11.


“오, 준비 제법 잘했네?”

민우가 태블릿을 보며 감탄했다.

그가 보고 있는 것은 진섭이 만든 인문학 장려방안 공모전 프레젠테이션이었다.

운전대를 잡고 있던 진섭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형한테 맡기라고 했잖냐. 왕년에 피피티 좀 했다고. 신방과 복수전공자의 위엄이 느껴지냐?”

“당연히 허세인 줄 알았지. 네 이름처럼 섭섭한 물건이 나올 줄 알았는데.”

기대 이상이었다.

논문의 내용을 적절히 간추렸고, 그것을 시각적으로 잘 꾸몄다. 이대로 프레젠테이션을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슬라이드를 끝까지 다 본 민우가 태블릿을 뒷좌석으로 던졌다.

그런데 그의 표정에 아쉬움이 묻어 있었다.

“표정이 왜 그래?”

“글쎄. 이걸로는 좀 부족한 느낌이라서.”

“부족하다고?”

“네 작업물이 그렇다는 게 아니라. 이건 우리가 쓴 논문을 그대로 옮겨놓은 정도잖아. 뭔가 새로운 아이템을 추가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

“새로운 아이템이라…….”

진섭은 전방을 주시하며 중얼거렸다.

확실히 민우의 말은 타당했다. 예선의 데이터를 그대로 활용한다면 결선의 의미가 없다.

빨간 신호가 떨어졌다. 진섭이 브레이크를 밟았고 차가 천천히 멈췄다.

“첫 공모전이라 전년도 수상팀들 벤치마킹할 수도 없고. 뭐 좋은 거 없으려나.”

“생각해 둔 게 하나 있긴 해.”

“뭔데?”

진섭이 힐끔 옆을 바라보았다. 민우는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때 신호가 파란색으로 바뀌었고, 진섭은 다시 운전에 집중했다.

민우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얼마 전 폐기된 지음사 오픈 라이브러리 계획. 그걸 변형해서 쓸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블로그 계약은 완전히 백지화됐다. 입원했을 때 병문안을 온 전남규 차장이 오픈 라이브러리의 폐쇄를 전했던 것이다.

결국, 송승현 실장은 지음사 경영진의 벽을 넘지 못했다.

민우는 안타까웠다. 블로그 계약을 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그녀가 추진하던 프로젝트에 매력을 느꼈기 때문이다.

‘실장님 구상대로 추진됐다면 정말 전무후무한 종합지식포털이 탄생할 수도 있었는데.’

그때 민우는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정부가 나서서 이 프로젝트를 진행해 줬으면 좋겠다고. 그 생각이 자연스럽게 인문학 장려방안 공모전으로 이어진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건 좀 다른 방식이긴 하지만…… 실장님과 상의하는 게 좋겠지? 어쨌든 베이스는 비슷하니까.’

민우는 설득에 자신이 있었다.

만약 일이 잘 풀린다면 송승현 실장도 가져가는 이익이 있기 때문이다.

이번 공모전은 단순히 공모전으로 끝나지 않는다. 실현 가능성이 있는 사업은 정부에서 적극적으로 지원한다고 밝혔다.

만약 팀 307호가 대상을 차지한다면, 안타깝게 폐기된 송승현 실장의 프로젝트가 되살아날 기회를 얻게 될지도 몰랐다.

‘송 실장님도 나름 철학이 있는 분이지. 그러지 않았다면 나한테 <소크라테스의 변명>을 주지도 않았을 거야. 그 점을 자극한다면…….’

의외로 답은 쉽게 나왔다. 표정이 밝아진 민우가 입을 열었다.

“한진섭. 너 예린이랑 몇 시에 만나기로 했냐?”

“두 시.”

민우가 시계를 확인했다.

대전까지 두 시간 반 정도가 걸리니 시간이 애매했다. 민우는 기대감을 누르고 일단 서울에 다시 올라와서 생각해 보기로 했다.

“왜? 어디 들르게?”

“아니. 나중에 이야기해 줄게.”

민우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곧 시원하게 달리던 차가 고속도로에 진입했다.

* * *

민우의 목적지는 대전에 위치한 상아대학교였다. 진섭은 능숙한 솜씨로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두 사람이 차에서 내렸다.

“바로 예린이 만나러 가?”

“어. 좀 일찍 가서 기다려야지. 데이트의 기본 아니냐?”

“애쓴다.”

“있는 자의 여유란…… 쯧. 넌 끝나고 바로 집으로 가지?”

“그래야지.”

민우는 약속 장소의 위치를 간단히 설명해 준 다음, 태워줘서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인문대 건물로 들어갔다.

상아대 국문과는 역사학과와 함께 7층에 위치해 있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니 몇몇 익숙한 얼굴들이 인사를 해 왔다. 오랜만에 보는 후배들이었다.

하나같이 강연 동영상 이야기를 했다. 덕분에 민우는 잠시 발이 묶여 그들과 시간을 보냈다.

그간 모르고 있었는데, 얘기를 들어보니 상아대에서 이번 강의가 꽤 화제가 되었던 모양이다.

그중 가장 말이 많았던 것은 13학번 김창수였다.

“형도 석사 끝나면 우리 학교로 강의 오시는 거죠?”

“아무래도 그렇게 되겠지. 혹시라도 그때까지 남아 있을 생각은 하지 마라. 내 수업 듣는다고 에이쁠 안 나오니까.”

“너무하시네. 옛정을 생각해 주셔야지요. 하하핫.”

오랜만에 만난 동생들과 허물없이 떠들었다. 빠르면 내후년쯤, 상아대에서 전공 수업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묘했다.

물론 할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여석이 있을지는 가봐야 아는 일이니.

민우는 시계를 확인했다. 복도에서 너무 오랜 시간을 보낸 느낌이었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창수야. 다음에 또 보자. 서울 오면 한번 연락 주고.”

“예. 형. 또 봬요!”

민우는 익숙한 얼굴들과 헤어지고 바로 서지훈 교수 연구실을 찾았다.

평소라면 그가 좋아하는 캔커피를 하나 들고 갔겠지만, 병문안까지 받은 입장이라 이번엔 큰맘 먹고 비싼 와인을 준비했다.

“선생님. 저 왔습니다!”

“어. 그래. 살아 돌아왔구나. 근데 민우 너 요즘 재미 좋다며? 발뺌할 생각은 마라. 김유신 주무관한테 다 들었다.”

“재미는요. 그냥 그래요.”

강의를 인터넷에 공개하는 대신 동구청에서 인센티브를 받기로 했는데, 민우의 강의가 인기를 끌며 추가 수당이 지급된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번 달에 정산된 금액이 약 70만 원. 나쁘지 않은 수입이었다. 와인도 그 돈으로 샀다.

“학교는 나가고 있나?”

“이번 주까지는 본가에서 좀 쉬려고요. 연구실 선배들이 나오면 가만히 안 두겠다고 하더라고요.”

“누가?”

“민식이 형이요.”

서지훈 교수의 눈썹이 움직였다. 그만큼 의외라는 말이었다.

“민식이가? 흐음, 꽤 친하게 지내나 보네. 그 녀석 엄청 까다로운 놈이라 가까이 지내기 힘든데. 학부 때부터 유명했지.”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요.”

서지훈 교수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잘 적응하고, 제 몫 이상을 해내는 제자가 대견스러웠다.

물론 그것을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자칫 자만심을 가질 수도 있으니까.

“그런데 요즘 민영환 선생은 별말씀 없으시냐?”

“그게…… 이상하게 저한테 잘해 주시더라고요. 드디어 인정을 해 주시려는 건지 아니면 다른 의도가 있으신 건지 잘 모르겠어요.”

“잘해 준다고?”

서지훈 교수는 팔짱을 끼더니 진지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

이유 없이 태도를 바꿀 위인은 아닌데.

민영환 교수가 민우의 지도교수가 된 것은 계산 밖의 일이었다. 아예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타격이 컸다.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것 같았지만, 섣부른 추측은 오해를 살 뿐이다.

“마음 놓지 않는 게 좋을 거다. 능구렁이 같은 양반이라서.”

“조심하고 있습니다.”

“이제 와서 이런 얘기 해봐야 소용없겠지만, 아쉽긴 해. 네가 박창민 선생님 밑으로 들어갔다면 좋았을 텐데. 하필이면 그쪽으로 제청자가 몰릴 줄은 몰랐구나.”

“괜찮아요. 제가 더 열심히 하면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래. 힘든 만큼 배움의 폭도 커질 거야. 학문은 책 속에만 있는 게 아니거든. 그 외에서도 얼마든지 배울 게 많지.”

“옙. 명심하겠습니다.”

그때 민우가 뭔가 생각났다는 듯 눈을 빛냈다.

“참, 선생님은 송승현 실장님하고 어떤 사이셨어요? 지음사에 계시는 그분이요. 단순히 선후배 관계는 아니라고 들었는데…….”

서지훈 교수가 깜짝 놀랐다.

“응? 어떤 놈이 그런 소리를 하고 다니는 거야?”

“이번에 출판계약하면서 여기저기서 들었어요. 사귀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가깝다고 하는 얘기가 있더라고요.”

“하하하하! 쓸데없는 소리를.”

서지훈 교수는 그저 웃어넘겼다.

그의 나이 서른여덟. 훤칠한 외모에 능력까지 출중한데 아직까지 독신인 게 좀 이상하긴 했다.

서지훈 교수가 화제를 바꿨다.

“아무튼, 그건 됐고, 다음 학기 시작하면 상아대로 한번 와라. 동문선배 특강이 있는데 학생회장이 널 추천했어. 학과장님도 오케이 하셨다.”

“동문선배 특강이요? 저 졸업한 지 1년밖에 안 됐는데요. 할 얘기가…….”

보통 동문선배 특강은 사회경력이 많은 사람들이 초청된다. 각종 업계에서 잔뼈가 굵은 선배들이 후배들에게 좋은 이야기를 해 주는 자리다.

민우도 학부 시절에 특강을 빠짐없이 들어서 알고 있었다. 풍부한 사회경험을 전해주는 선배들의 모습에 동경심을 가지기도 했었으니까.

서지훈 교수가 이유를 설명했다.

“이번에 인터넷에 올라온 강연 영상이 좀 컸어. 주제는 학문을 하는 마음가짐 정도로 하면 될 거 같은데, 네 생각은 어때?”

“아직 졸업 안 한 선배들도 있는데 제가 해도 되는 걸까요?”

“억울하면 빨리 졸업하라고 해버려. 과가 박물관이 되고 있다. 화석들이 늘어나고 있어. 중생대에서 고생대로 넘어가는 중이다. 심각하지.”

서지훈 교수의 농담에 민우는 웃고야 말았다. 강의라기보다는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자리라 큰 부담은 없을 것 같았다.

민우는 특강 제안을 수락했다.

“그런데 그 말씀 하시려고 저 부르신 거예요? 그거라면 그냥 전화로 말씀하셔도 됐을 텐데.”

“아아, 그건 아니고. 따로 할 말이 있어서.”

서지훈 교수가 무게를 잡았다. 굳게 닫힌 입술이 평소와는 달랐다.

“뭐 걱정되는 거라도 있으세요?”

“언젠가 해 줘야 하는 이야기이긴 한데…… 지금 시기가 딱 적당할 거 같아서 말이다. 민 선생 문제야.”

서지훈 교수는 담배를 케이스에서 하나 꺼냈는데, 이내 단념하고는 테이블에 던지듯 내려놓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랑 그 양반이랑 사이가 좀 안 좋아. 자세히 얘기해주기 좀 뭣한 일인데, 예전에 좀 사건이 있었다.”

“그러셨군요.”

궁금했다.

하지만 서지훈 교수가 선뜻 이야기해 주지 않는 것엔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얌전히 다음 말을 기다렸다.

“오래전의 일이라 기억하는 사람들도 별로 없고 대부분 잊혔는데, 아무래도 그 양반이 그 일 때문에 너를 안 좋게 볼까 봐 걱정이 돼서 말이다.”

“선생님이 추천해 주신 제자라서요?”

“뭐, 그렇지.”

민우는 생각에 잠겼다. 지금까지 민영환 교수가 자신에게 어떻게 행동을 했는지를 돌이켜 보았다.

“근데 딱히 저한테만 엄하신 것 같지는 않았어요. 타 학교 출신 친구들이 몇 있는데, 걔네들도 비슷한 대우를 받았거든요.”

“지금은 별문제 없을 거다.”

지금은?

문득 민우는 불쾌한 예감이 가슴에 솟구쳤다. 그리고 그 예감은 적중했다.

“나중에 박사과정 들어갈 때가 문제야. 티오가 훨씬 적으니까, 선별해서 뽑겠지.”

“그렇군요. 그렇다고 지도교수를 바꿀 수도 없는 일이고…….”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제도상으로는 가능하지만, 지도교수를 바꾼다는 것은 그 교수와 척을 진다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래서 지도교수가 타 학교로 옮기지 않는 이상 석사과정 때 정해진 지도교수가 박사 때까지 지도를 맡는 것이 일반적이다.

즉, 민우는 민영환 교수와 박사과정 내내 부딪혀야 하는 입장인 것이다.

“일이 안 좋게 풀리면 박사과정 입학이 어렵게 될 수도 있다.”

“역시…….”

어렴풋이 예상은 하고 있던 일이었다. 하도 타 학교 학생들을 싫어하는 사람이라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있었다.

하지만 민우는 괜찮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점은 서지훈 교수도 의외였다.

‘눈치만 보던 그때랑은 다르니까.’

정확히는 보존서고에서 루카치의 유품을 얻고 난 이후.

그때부터 민우의 관심사와 지식은 훨씬 깊어지고 다양해졌다.

‘굳이 국문학이라는 좁은 울타리에 갇혀 있을 필요는 없지. 더 넓은 곳으로 나가도 돼. 지금은 그럴 만한 능력이 있으니까.’

민우는 오히려 잘된 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에겐 아직 선택지가 하나 더 남아있었으니까.

비교문학(比較文學) 전공.

민영환 교수가 거부권을 행사하면, 전공을 바꿔버리면 된다. 언어의 장벽이 사라진 민우에게는 오히려 그게 득이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예전에 무슨 일이 있으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전 그 사람한테 지지 않을 겁니다. 포기하지도 않을 거고요.”

“힘들면 얘기해. 내가…….”

“이건 제 문제죠. 제 인생이니까 제가 선택하고 결정을 내리겠습니다.”

그제야 서지훈 교수의 표정이 풀렸다.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것이 기우였다. 자신이 아끼던 제자는 못 보던 사이에 훌쩍 성장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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