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56. 히든 카드 (1) (56/500)


056. 히든 카드 (1)
2021.06.10.


“몸은 좀…… 괜찮으세요?”

정연주가 물었다. 너무나도 뜻밖의 방문이라 민우는 잠시 멍하니 있다 말을 더듬었다.

“어, 그게.”

“왜 그러세요? 어디 불편하세요?”

“아니. 괜찮아.”

그러면서도 민우는 궁금했다. 대체 입원한 걸 그녀는 어떻게 알았던 걸까. 평소에 연락하는 사이도 아닌데.

그래서 민우가 물었다.

“나 병원에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

“수빈 언니한테 들었어요. 오빠 쓰러져서 입원했다고. 깜짝 놀랐어요. 얼마 전에 봤을 땐 건강해 보이셨는데.”

수빈이와는 가끔 연락을 하고 지내는 모양이었다. 동성이기도 하고 같은 학부에서 공부했으니 연락하는 것에 큰 부담은 없을 것이다.

고개를 끄덕인 민우가 상황을 설명했다.

“그냥 좀 무리해서 그랬어. 별 이상은 없대.”

“다행이에요.”

정연주는 가져온 과일 바구니를 테이블에 조심조심 놓았다. 쌓인 과일과 주스만 해도 이제 한 박스가 다 돼 간다.

지음사 인문사회팀 식구들의 공이 컸다. 오늘 오전 정은아 대리와 장철호 등이 각종 먹거리를 싸 들고 찾아왔었다.

민우가 물었다.

“평일이라 바쁘지 않아? 그냥 문자 하나 줘도 괜찮았을 텐데. 크게 아픈 것도 아니라서 말이다. 자랑할 만한 일도 아니고.”

“그게요. 마침 이쪽에 지나갈 일이 있어서…… 들렀어요.”

“너무 거짓말이 뻔히 보이는데?”

민우가 농담조로 던지자 연주가 흠칫 놀랐다. 곧 부끄럽게 고개를 숙였다. 뭐든 표정에 훤히 보여 알기 쉬운 사람이었다.

연주가 애써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참, 단행본 내신다고 들었어요. 축하드려요.”

“그건 또 누구한테 들었어?”

“강철훈 선생님이요.”

“벌써 이야기가 거거까지 갔구나.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 단독으로 내는 건 아니고 공저야. 대학원 선배하고.”

“제목이 뭐예요?”

“신화와 인간. 부제는 소설의 신화적 상상력.”

그녀의 눈빛이 깊어졌다. 부러움 반, 기대 반. 만감이 교차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연주는 얼마 전에 본 민우의 강연 중 한 장면을 떠올렸다. 이어,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방법에 대해 설파하는 그의 모습이 눈앞에 펼쳐졌다.

“오빠는 오빠의 길을 착실히 걷고 계시네요.”

여운이 남는 한마디였다.

민우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침묵했다. 그 뒤에 생략된 말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는 그러지 못하고 있는데.

아마 그녀가 진짜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이것이리라.

“죄송해요. 제가 괜한 말을…….”

“일이 많이 힘든가 봐?”

“아녜요. 할만해요. 아직 배워야 할 게 많은데 예전보단 많이 나아졌어요.”

이번에도 거짓말이라는 게 너무 뻔히 보였다. 스스로가 깨달았던 걸까. 연주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서 고개를 살짝 숙였다.

“아, 제가 너무 귀찮게 해드렸네요. 오빠. 몸조리 잘하세요. 전 이만 가 볼게요.”

“와 줘서 고마워.”

연주가 돌아서 나가려는 순간, 뒤에서 민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정연주. 힘내라!”

“고마워요.”

병문안을 왔는데, 오히려 자신이 위로를 받은 느낌이었다.

탁―

문이 닫혔다.

하지만 연주는 쉽게 발을 떼지 못했다.

‘오빠한테 빚만 지네. 갚아야 하는데…….’

적당한 방법이 없을까 생각했다. 잠시 후 그녀는 민우의 병실 앞에서 발을 뗐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건장한 체구의 수행비서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듬직하면서도 정중한 느낌이 드는 사내였다.

“이사님. 회사로 돌아가시겠습니까?”

“잠깐 삼촌 좀 뵙고 가요.”

“예. 모시겠습니다.”

엘리베이터에 오른 수행비서가 10층을 눌렀다. 그가 앞장을 섰고, 두 사람이 멈춰선 곳은 다름 아닌 병원장실이었다.

병원장실 직원은 연주를 알고 있는지 일어서 인사를 했다. 소란을 피우고 싶지 않아 연주는 그저 묵례할 뿐이다.

수행비서가 대신 물었다.

“병원장님 안에 계십니까?”

“예. 들어가 보세요.”

“이사님. 들어가시죠.”

안으로 들어가니 안경을 쓴 장년의 사내가 고개를 들었다. 연주가 꾸벅 인사를 했다.

“응? 연주 아니냐? 네가 여기엔 무슨 일로.”

“아는 분이 입원해서요. 병문안 왔어요. 온 김에 삼촌 좀 뵈려고요.”

“그래? 잘 왔구나.”

오랜만에 보는 조카의 모습이 반가워 정호순 병원장은 아빠 미소를 지었다. 연주는 어려서부터 그가 무척 예뻐하던 조카였다.

두 사람이 마주 앉았다. 잠시 후 비서가 시원한 차를 내왔다.

“그래. 요즘은 뭐 하고 지내니. 아직도 대학원 다니고 있나?”

“아뇨. 일하고 있어요.”

“일? 어디에?”

“선우기획에서 이사로 있어요.”

“이사? 허허. 초고속 승진이구나. 너희 아버지가 신경 좀 쓰신 모양이야.”

“작은 회사라서요. 별로 의미 없는 자리예요. 한직이기도 하고…….”

정호순 병원장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안 그래도 시간이 날 때 연주를 불러 설득을 하려고 했는데, 일이 잘 풀려서 다행이었다.

정연주가 기업가 타입이 아니라는 것은 그도 잘 알았다.

하지만 그것은 훈련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닳고 닳으면 언젠가 훌륭한 기업가가 될 거라고,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도 잘됐다. 결국, 마음을 굳혔구나. 공부는 말이다. 나중에 짬이 날 때 해도 괜찮은 거란다. 지금은 네 커리어를 충분히 쌓고 가업을 이어갈 때지. 오빠와 언니들한테 져서는 안 되지 않겠냐?”

“…….”

제가 원해서 그랬던 건 아니에요, 라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올 뻔했다.

질릴 정도로 들은 원론적인 이야기들.

왜 형제간에 경쟁해야 하는 걸까? 그저 재지 않고 서로 사이좋게 지낼 수도 있는 건데.

연주는 뭐라 대꾸하려다 단념했다. 삼촌은 어려서부터 늘 이야기를 잘 들어줬지만, 결국 자신을 이해해 주는 사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연주는 한숨을 내쉬며 용건을 말했다.

“제가 학교에서 여러모로 도움을 받았던 분이 입원하셨어요. 조금 편의를 봐 드리고 싶은데……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

“그래? 무슨 도움을 받았기에 네가 이렇게까지 얘기를 하는 건지 모르겠구나. 응?”

“그런 일이 좀 있었어요.”

구체적으로 말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학문에 대해 이야기한들 이해하지 못할 위인이니까.

다행히 이야기는 잘 풀렸다.

용건을 끝낸 연주는 바로 선우기획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변화는 즉시 일어났다.

* * *

“현기증은 이제 괜찮으신 거지요?”

“네.”

신경외과 교수 진수영이 의료진을 이끌고 직접 회진을 나왔다. 열 명이 넘는 대규모 인원이었다. 정기 회진 시간도 아니었는데.

진수영 교수가 옆으로 손을 내밀었다.

인턴이 재빨리 민우의 차트를 건넸다. 진수영 교수가 사각 뿔테 안경을 한번 들어 올리며 차트를 자세히 검토했다.

“추가 검사 결과도 문제가 없습니다. 의학적으로는 정상인 상태입니다만, 혹시라도 불편하신 부분이 있으시면 즉시 말씀해 주십시오.”

“아, 예.”

“현기증은 말입니다. 심리적인 요인으로도 발생할 수 있는 증상입니다. 무엇보다도 마음을 편하게 드시는 게 좋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곧 의료진이 썰물 빠지듯 병실을 나섰다. 변화는 그뿐이 아니었다. 의사가 수시로 방문해 민우의 상태를 살폈다. 귀찮을 정도로.

“뭔가 이상한데.”

“뭐가?”

“의사들이 너무 자주 오는 거 같지 않아? 하루에 몇 번 안 왔잖아.”

박민아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의사들이 자주 와 주면 좋은 거지 뭐. 돈이 더 드는 것도 아니잖아.”

“아, 맞다. 누나 병원비는 얼마나 나왔어?”

“아직 몰라. 내일 퇴원 수속할 때 나오겠지. 신경 쓰지 마. 며칠 입원 안 해서 별로 안 나올 거야.”

민우는 한숨이 나왔다. 여기는 3인실이다. 병실 값만 해도 만만치 않을 터다. 실비보험이 있긴 했지만 비보험 항목이 많았다.

“대체 입원을 왜 시켰어? 별 이상 없었다는 얘기 들었다며. 그럼 그냥 2차 병원에서 며칠 쉬어도 됐잖아.”

“니가 참 누나 말을 들었겠다? 응급실 나가자마자 연구실로 달려갈 놈이 말은 잘해요.”

역시 누나는 자신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민우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퇴원 날이 됐다. 퇴원 수속을 하러 내려간 민아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며 다시 병실로 돌아왔다.

“박민우. 너 혹시 회사에서 병원비 내 준다고 했어?”

“대한민국에 그런 회사가 어딨어? 누나가 더 잘 알 거 아냐.”

확실히 그건 그랬다. 민우가 회사에서 일하다 쓰러진 것도 아니었으니까.

민아가 다시 한번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하네.”

“뭐가.”

“병원비 계산 다 됐다는데?”

“뭔 소리야 그게. 혹시 엄마한테 얘기한 거 아니지?”

“안 했어. 수빈이가 계산한 건가?”

그럴 확률이 좀 있긴 했다. 수빈의 집은 부유했고, 민우의 가정 형편이 그리 넉넉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민우는 바로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범인은 이수빈이 아니었다.

“대체 누구지?”

그때 문득 생각난 한 사람.

민우는 잠시 기다리라고 하고 원무과로 내려갔다. 그리고 퇴원 수속 담당 직원에게 사실을 물었다.

예상대로였다.

병원비를 치른 것은 정연주였다.

‘왠지 좀 그러네…….’

뒷맛이 좋지 않았다. 병원비가 생각보다 많이 나오진 않았지만, 이유 없이 받기에는 부담스러운 금액이었다.

평소 그녀가 빚을 갚아야 한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긴 했다. 하지만 이 정도로 보답을 받을 정도의 일은 아니었다.

민우는 바로 문자를 남겼다.

― 병원비 네가 계산했다는 얘기 들었어. 이건 좀 받기가 미안하다. 계좌번호 남겨 주면 다시 보내줄게.

답장은 오지 않았다. 연주는 메시지를 아예 읽지도 않았다.

민우는 일단 병실로 돌아와 누나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프로젝트에서 만난 동생이 병원비를 대신 치렀다고. 민아는 자존심이 상했는지 인상을 썼다.

그때 한진섭이 병실 안으로 들어왔다.

“어. 웬일이냐?”

“친구가 퇴원하는데 얼굴은 비춰야지. 짐꾼 필요하지 않아? 차 끌고 왔다.”

진섭이 테이블에 잔뜩 쌓인 짐을 가리켰다.

그제야 민우가 웃었다. 그가 원하던 것은 바로 이런 사소한 우정이었다.

* * *

퇴원한 다음 날, 학교로 복귀한 민우가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바로 민영환 교수의 연구실이었다.

민우는 긴장했다.

다음 주에 큰 학회가 잡혀 있었다. 입원한 탓에 사전준비를 하지 못했던 것이다. 불호령이 떨어질지도 모를 일이다.

“죄송합니다. 입원하는 바람에 학회 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했네요.”

“아팠다는데 뭐 별수 있나. 몸은 좀 어떠냐?”

민우는 눈을 깜빡였다.

믿을 수 없었다. 지금 민 교수가 자신의 안부를 묻고 있는 건가?

“괜찮습니다. 단순 과로여서 특별한 이상은 없다고 합니다.”

“그렇군.”

민영환 교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화난 표정은 아니다. 그는 시종일관 차분한 어조로 말을 하고 있었다.

“다음 주에 학회 시작되니까 예진이 도와서 잘 준비해 봐. 너무 무리는 하지 말고.”

“알겠습니다.”

“응. 나가 봐.”

민우는 연구실을 나섰다. 문을 닫으면서까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민영환 교수가 저렇게 호의적인 사람이 아니었는데.

‘로또라도 맞으셨나?’

풀리지 않은 의문을 품으며, 민우는 박사 연구실로 움직였다. 때마침 이재환과 최민식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형님들. 저 돌아왔습니다!”

“돌아가시지 않아서 다행이다. 인마.”

이재환이 농을 던지며 반갑게 맞았다. 최민식도 손을 들어 보였다.

“컨디션은 어때?”

“최곱니다. 푹 쉬었더니 날아갈 것 같아요. 이제 본격적으로…….”

“까불지 말고 이번 주까지는 집에서 쉬어.”

최민식의 지엄한 명령에 민우는 ‘네’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민우는 두 선배와 가볍게 환담을 나누고 밖으로 나왔다.

시계를 확인했다. 오전 10시 25분. 곧 약속 시간이었다.

때마침 검은 승용차 하나가 인문관 앞에 섰다. 보조석 창문이 내려가더니, 선글라스를 낀 진섭이 손가락을 까딱했다.

민우가 보조석에 탔다.

“날도 흐릿한데 웬 선글라스냐?”

“짜식, 드라이빙의 묘미를 모르네. 폼 나잖아. 택시비는 챙겼지?”

“일단 밟기나 하쇼.”

싱긋 웃은 진섭이 스틱을 내리고 엑셀을 밟았다. 두 사람을 태운 자동차가 빠른 속도로 도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16557827785998.jpg

16557827786008.jpg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