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55. 이카루스의 날개 (3) (55/500)


055. 이카루스의 날개 (3)
2021.06.07.


진섭이 돌아간 뒤 민우는 저녁을 먹고 곧장 잠에 빠져들었다.

창고에 쌓아 둔 잠이 한꺼번에 쏟아진 기분이었다. 누웠다 하면 바로 잠이 솔솔 찾아왔다. 갓난아기가 따로 없었다.

민우가 입원한 3인실은 나머지 침상이 비어 있어 독방처럼 조용했다.

그가 다시 눈을 뜬 것은 밤 9시 무렵이었다. 수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누나가 의자에 앉아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수빈인 갔어?”

“오냐.”

민우는 핸드폰을 확인했다. 잘 쉬고 내일 다시 오겠다는 그녀의 문자가 남아 있었다. 민우는 바로 답장을 했다.

곧 사진이 하나 도착했다.

수빈의 사진이었는데, 윙크를 하며 입술을 살짝 내민 사진이었다. 손으로 직접 하트까지 그려 넣었다.

이런 애교를 부릴 줄도 아네.

민우는 웃으며 그 사진을 핸드폰 대기화면으로 설정했다.

‘퇴원하면 더 잘해줘야겠다. 다른 사람들한테도 좀 더 신경 써야겠어.’

입원이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덕분에 민우는 자신의 인간관계를 다시 돌아볼 수 있었다.

평소 친하게 지내던 사람들은 물론, 멀어졌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에게까지 안부 전화가 왔다. 민우는 자신이 헛살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인문대 대학원생.

힘든 길을 걷고 있다는, 약간의 피해의식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친구들은 예전과 다를 것 없이 똑같이 대해 주었다.

‘이상하게 생각하는 건 나뿐이었어. 주눅들 거 하나도 없는데. 나도 평범한 사람일 뿐이었는데.’

작은 깨달음을 얻고 나니 기분이 좋아졌다. 몸도 마음도 가벼워진 것 같은 느낌이다.

“뭘 그리 실실 쪼개고 있어? 수빈이 생각하냐?”

“아니. 누나도 그만 가 봐. 내일 출근해야 하잖아.”

“내일 월차 썼으니 걱정 마셔.”

침상에서 몸을 일으키던 민우가 깜짝 놀랐다.

“들어간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월차질이야? 괜히 나 때문에 찍히지 말고 내일 출근해. 나 멀쩡하잖아. 보다시피.”

“박민우.”

“왜?”

싱긋 웃은 박민아가 오른손으로 과도를 쥐었다. 형광등이 칼날을 때려 번쩍거렸다. 소름이 돋았다.

“일단 좀 다무시고, 사과 드실래요 아님 배 드실래요?”

누나가 칼을 쥐고 물으니 무서웠다. 대답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는 배로 하겠습니다. 누님.”

“옳지.”

민아는 과도로 배를 깎기 시작했다. 과일을 먹어본 지가 언제더라. 흰 속살을 드러내는 배를 보니 군침이 돌았다.

민우는 다시 침상에 몸을 뉘었다. 배를 깎는 누나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왠지, 어린 시절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입이 좀 험하긴 하지만 다정한 누나.

폭력적이긴 하지만 자상한 누나.

꿈이 있었지만, 포기해야 했던 누나.

‘누나가 없었다면 어땠을까…….’

그 모습이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그만큼 박민아는, 민우의 삶에서 매우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지나가듯 누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너 공부하느라 하루에 세 시간만 잤다며. 안 하던 짓을 하니까 쓰러질 수밖에 없지. 게임 하느라 하루에 세 시간만 자던 애가 갑자기 공부하니까 몸이 놀랄 만도 하네. 불쌍한 몸뚱아리. 주인 잘못 만나서 고생이 말이 아니야.”

민우는 피식 웃었다. 옛날얘기다. 그땐 누나한테 얼마나 잔소리를 들었던지.

민아는 멈추지 않고 계속 과도를 움직였다. 그녀의 입도 마찬가지였다.

“좀 천천히 해도 되잖아? 난 가방끈이 짧아서 잘은 모르겠지만 공부 그거 하루 이틀 하는 거 아니라며. 괜히 잘못돼서 엄마 가슴에 대못 박지 말고. 이번에야 별 이상 없다니 그냥 넘어갔지만 혹시라도 일 잘못돼봐. 응?”

“알았어.”

민우는 배 한 조각을 받아 한 번에 입에 넣었다. 과육이 정말 달콤했다. 아마도 누나의 마음이 섞였기 때문이리라.

민아는 껍질과 과도를 한쪽으로 치우고 배 한 조각을 입에 물었다.

“오후에 누구 병문안 왔어? 음료수 누가 사다 놓은 거 같던데.”

“선배들하고 동기 왔다 갔어.”

“올. 학교생활 헛하진 않았나 보네?”

배를 씹던 민우가 뭔가를 떠올리고는 표정을 굳혔다.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었다. 바로 최민식이었다.

‘민식이 형, 실망 많이 하셨겠지? 병원에 안 오신 거 보면.’

사실 이재환과 같이 병문안을 와 줄 줄 알았다. 최근에 무척 가까이 지냈으니까. 하지만 그에게서는 별다른 연락이 없었다.

민우는 천장을 바라보며 침대에 다시 벌러덩 누웠다.

‘바쁘신가 보지. 일단 몸부터 추스르고 퇴원하고 제대로 인사 드리자.’

민우는 다시 눈을 감았다.

* * *

다음 날 오후, 뜻밖의 인물이 과일 바구니를 들고 나타났다.

최민식이었다.

“형…….”

최민식은 묵묵히 들어와 과일 바구니를 민아에게 건네며 정중히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민우 선배 최민식입니다.”

“와 주셔서 고마워요. 말씀 나누세요.”

민아가 자리를 비켜주었다. 병실에 두 사람만 남게 됐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민우는 최민식의 얼굴은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미안했다. 자기 때문에 원고가 멈추게 됐으니.

최민식은 그 표정을 정확히 읽었다.

“걱정하지 마라. 방금 전남규 차장님 만나고 오는 길이다. 얘기 잘됐어. 납기일 한 달 늘렸다.”

“죄송합니다. 괜히 저 때문에…….”

“아니. 내가 좀 더 일찍 알아차려야 했는데. 내가 널 궁지에 몬 게 아닌가 싶구나. 미안하다.”

최민식은 씁쓸히 웃었다. 채찍질이 너무 심했다. 자신도 단행본을 낸다는 기쁨에 눈이 멀어 상황을 냉정하게 보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너 없어도 인마. 내가 알아서 다 쓸 수 있어. 나 무시하냐?”

“그런 거 아녜요.”

“그럼 빨리 회복할 생각이나 해. 공부 생각은 1초도 하지 마라. 알았어?”

최민식이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뭔가 할 말이 있는 모양이었다.

“뭐, 어제 재환이 형이랑 예진이도 왔었다고 하니 대강 듣긴 했겠지만…… 제 살 깎아 먹는 건 공부가 아니다. 노동이지.”

“예. 이제야 좀 알 것 같습니다.”

“예전에 말이다. 한 10년 전이었나.”

잠시 말을 끊은 민식이 포켓에서 담배를 꺼냈다. 그러다 움찔하고 다시 집어넣었다. 금연 공간인 걸 뒤늦게 안 것이다.

민식의 표정이 고독해 보였다.

민우는 눈치가 빨랐다. 링거를 이동식 폴대에 옮기고 침대에서 일어섰다.

“잠시 나가실까요? 바람도 쐴 겸.”

“그럴까.”

두 사람은 정문 쪽 공원으로 나갔다. 그늘이 진 벤치에 자리를 잡았다.

민식이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그는 한참이나 말없이 담배를 피우기만 했다. 그의 입에서 뿜어진 연기가 허무하게 스러져갔다.

“옛날에, 굉장히 뛰어난 선배가 하나 있었다.”

최민식의 말이 시작됐다. 민우는 귀를 열고 집중했다.

“천재라는 수식어가 정말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지. 서지훈 선배도 알 거야. 박찬욱이라고. 아무튼, 그 형이 있던 연구실엔 늘 불이 꺼지지 않았어. 말 그대로 공부에 미친 사람이었지.”

민우는 왠지 그 이야기의 끝을 알 것 같았다. 민식의 표정이 말하고 있었다.

짙은 담배 연기가 민식의 탄식과 함께 흘러나왔다.

“그 형이 박사 논문을 준비할 때였을 거야. 갑작스레 쓰러졌는데, 그 길로 유명을 달리했지. 사인은 과로였어. 안타까운 일이지.”

“그런 일이 있었군요…….”

“뭐, 흔한 일은 아니지만.”

이야기는 그것으로 끝이었지만, 민우는 그가 무슨 의도로 그런 말을 했는지 제대로 이해했다.

민식이 담배를 짓이겨 껐다. 남은 꽁초를 쓰레기통에 버리고 일어섰다.

“퇴원은 언제냐?”

“다음 주 월요일에 할 거 같습니다. 누나는 일주일 더 쉬라고 하는데, 병원비가 너무 비싸서 안 되겠어요.”

“그래. 그럼 다음 주에 볼 수 있겠군. 그럼 난 연구실에 가봐야겠다.”

민우의 어깨를 한번 툭 친 민식이 앞으로 걷기 시작했다.

“형! 더운데 조심히 들어가세요.”

서너 발자국 더 걷던 민식이 잠시 멈췄다. 호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그가 말했다.

“빨리 나아라. 네가 없으니까 학교가 좀, 재미가 없네.”

민식은 콧등을 긁적이며 버스에 올랐다. 그가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민우는 다시 병실로 올라왔다.

“어딜 싸돌아다니는 거야?”

“잠깐 민식이 형이랑 요 앞에 나갔다 왔어. 아까 그 형 있잖아. 나랑 같이 책 내는 형이야. 이번에 박사학위 받았어.”

“오, 그래?”

민아가 살짝 흥미를 보였다. 그래서 민우는 그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해 주었다.

“아무튼, 누나랑 좀 비슷한 면이 있어.”

“어떤 면이?”

“겉은 되게 까칠한데 속은 뭔가 다정한 면이 있다고 할까…….”

“대악마라고 할 때는 언제고 무슨 다정이야? 다정은. 쯧. 징그럽게.”

그러면서도 민아는 속으로 웃었다. 민우의 평가가 싫지는 않은 모양이다.

잠시 후 이수빈이 병실에 도착했다. 민아는 짐을 챙길 겸 집으로 돌아갔다. 커플이 있는 건 눈꼴사나워서 못 본다는 말과 함께.

“어제 사진은 뭔 생각으로 찍은 거야?”

민우의 질문에 수빈이 얼굴을 붉혔다. 제대로 민우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그냥 찍어봤어. 왜 이상해?”

“아니.”

민우가 핸드폰을 켜 바탕화면을 보여줬다. 그 사진이 박혀 있었다. 그제야 수빈은 미소를 지었다.

“참, 아까 민식이 형 왔다 갔어.”

“어? 정말? 설마 혼나거나 한 건 아니지?”

“혼나기는. 원고 납기는 한 달 미뤄졌고. 좋은 말씀도 해 주셨어.”

과로로 유명을 달리한 박찬욱 선배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굳이 우울한 얘기를 할 필요는 없었으니까.

그때 병실 문이 열리고 한 무리의 사람들이 안으로 들어왔다.

민우가 벌떡 일어섰다.

손님은 다름 아닌 서지훈 교수였다. 자매품으로 주예린도 있었다.

“선생님…… 어떻게 여기까지 오셨어요?”

“차 타고 왔지 뭘 어떻게 오냐? 흐음, 보니까 완전 멀쩡한데? 곧 퇴원해도 되겠군.”

“월요일에 퇴원할 거예요.”

“정말 다행이다. 별일 없어서.”

민우는 웃었다. 크리스마스날 생각지도 못한 선물을 받은 사람 같았다. 그만큼 서지훈 교수는 그의 삶에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이었다.

이수빈도 서지훈을 알아보았다. 그녀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처음 뵈어요. 12학번 이수빈입니다.”

“아아, 이수빈 후배! 반가워. 예전에 이해조 신소설 연구로 논문 냈던 그 친구지?”

“앗, 맞습니다! 기억해 주실 줄은 몰랐어요. 부끄럽네요.”

“모를 리가 있나. 학부 때 등재지에 논문 게재하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지. 종종 보자. 도움 필요하면 연락하고.”

서지훈 교수가 자신의 명함을 수빈에게 건넸다. 수빈은 해맑게 웃으며 명함을 받아들었다.

그때 자매품이 달려들었다.

“오빠! 큰일입니다!”

“왜 또.”

“면접에 대해 물어볼 게 많은데 오빠가 입원해 버려서 물을 수가 없게 됐어요.”

“물어보려고 온 거 다 알거든?”

주예린이 배시시 웃었다. 그 모습을 본 서지훈과 이수빈이 한바탕 웃음을 터트렸다.

* * *

‘아, 피곤하다. 기가 다 빨린 기분이야.’

민우는 침대에 말 그대로 뻗었다. 농담인 줄 알았는데 주예린은 정말 면접에 대해 질문을 했다. 꿋꿋하게.

‘그래도 도움이 됐다니 다행이지 뭐.’

서지훈은 볼일이 있다며 먼저 자리를 떴고, 수빈은 예린, 진섭과 함께 저녁을 먹으러 병실을 비웠다. 민우가 피곤하다며 잘 거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딸칵―

그때 문이 살짝 열렸다.

간호사일까? 민우가 침상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혈압과 체온을 재러 간호사들이 주기적으로 들어오곤 했다.

“어?”

간호사가 아니었다.

과일바구니를 손에 든 여자가 어색하게 웃었다. 이 더운 날 카디건을 걸칠 사람은 민우가 알기로 딱 한 명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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