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3. 이카루스의 날개 (1)
(53/500)
053. 이카루스의 날개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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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3. 이카루스의 날개 (1)
2021.06.03.
짹짹― 짹―
이따금 지저귀는 새들의 울음소리가 평화로웠다. 커튼을 비집고 들어온 부드러운 햇살이 민우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바로 그때.
“헉!”
민우가 눈을 번뜩 떴다.
평소보다 햇빛이 훨씬 밝았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민우는 눈곱을 떼며 제일 먼저 시계를 확인했다.
‘아침 10시? 으아, 망했다!’
오늘 오전 11시에 민식과 만나 원고에 대해 이야기하기로 약속을 했기 때문이다.
재빨리 화장실로 달렸다. 민우는 대강 세수만 하고 모자를 눌러쓰고 밖으로 달렸다. 칫솔과 치약은 가방에 따로 챙겼다.
다행히 버스가 때맞춰 도착했다. 민우는 서둘러 올라타 카드를 찍었다.
삑―
‘오전 10시 20분. 아슬아슬하네.’
교통체증이 없고, 인문관까지 전력 질주한다는 가정하에 약속 시간은 지킬 수 있을 거 같았다.
자리에 앉은 민우는 머리를 쥐어뜯었다.
‘진짜 큰일이다. 일찍 일어나서 원고 한 번 더 보려고 했는데…….’
알람도 못 들을 정도로 정신없이 잠든 모양이었다.
수빈이와 한 약속이 있어 어제 일찍 집에 들어가긴 했는데, 목표량을 채우지 못해 민우는 새벽까지 원고를 붙잡고 있었다.
하지만 들인 시간에 비해 결과물은 조금도 마음에 차지 않았다.
컨디션이 나빠 집중이 되지 않았다. 국문학 전공이라는 말이 부끄러울 정도로 문장도 조잡했다.
글을 못 쓴다, 공부를 못 한다는 소리는 참을 수 있다. 하지만 게으르다는 말은 듣고 싶지 않았다.
― 이번 정류장은 대학본부, 대학본부입니다. 다음 역은 법대입구, 법대입구입니다.
민우는 벨을 눌렀다.
곧 버스가 멈추자 훌쩍 뛰어내린 그는 인문관을 향해 전력으로 질주했다. 목적지는 3층에 있는 박사연구실이었다.
문 앞에 도착한 민우는 시계를 확인했다.
오전 11시 정각. 세이프다.
“안녕하십니까!”
문을 열고 들어가니 아무도 없었다.
민우는 일단 최민식의 자리 옆에 간이 의자를 끌어다 놓고 한숨을 돌렸다.
10분 정도 후에 최민식이 나타났다. 그는 민우를 보더니 눈살을 찌푸렸다.
“너 꼬라지가 왜 그래?”
“아…… 그게. 늦잠을 자서요. 죄송합니다.”
“늦잠?”
민식이 엄한 표정으로 민우의 얼굴을 훑었다. 그의 표정이 조금 묘해졌다. 굳이 표현하자면 걱정스러운 표정이다.
“얼굴이 까맣잖아. 너 여기저기 쏘다니느라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지?”
“못 씻어서 그런가 봅니다.”
민식은 혀를 찼다.
그러더니 사물함을 열어 바구니를 하나 꺼냈다. 샴푸와 비누 같은 것들이 들어 있었다.
“이거 빌려줄 테니까 샤워장에서 씻고 와라. 이따 30분 정도 뒤에 시작하자. 나 민 선생님 좀 뵙고 올 테니까.”
“옙.”
민우는 세면도구를 들고 학생회관에 있는 공동세면장으로 뛰었다. 20분 뒤에 나온 민우는 훨씬 말끔해져 있었다. 양치도 했다.
몸도 마음도 상쾌해진 민우는 다시 박사연구실로 돌아왔다. 최민식이 논문에 집중하고 있었다.
“감사해요. 형 덕분에 잘 씻었습니다.”
“너도 세면도구 하나 놓고 다니는 게 좋을 거다. 은근히 유용하거든.”
“그래야겠어요.”
“그건 그렇고 쓴 거 줘봐.”
민우는 어제 작업한 원고를 민식에게 건넸다.
긴장되는 순간.
행간을 따라가는 민식의 눈이 날카로워지는가 싶더니 이마에 주름이 잡혔다. 동시에 민우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뭐야 이거. 응? 왜 이렇게 엉망으로 써 왔어?”
“아, 그게 말입니다.”
요즘 컨디션이 좋지 않아서 그랬다고 차마 말을 하지 못했다. 어렵게 얻은 공저 자리다. 자신의 능력을 입증해야 했다.
“좀 나아지는가 싶더니 완전히 퇴보했잖아. 이 문장은 뭐냐? 주술 호응도 이상하고. 완전 개판이네. 내용은 볼 것도 없고. 퇴고 한 번도 안 했냐?”
그는 무척 화가 나 보였다. 곧 입에서 호통이 터지고야 말았다.
“너 요즘 좀 잘나간다고 긴장 풀린 거냐? 야 인마, 우리가 내는 책은 앞으로 평생 남는 거야. 엉? 꼬리표처럼 계속 따라다니는 거라고! 알아?”
“알고 있습니다. 죄송합…….”
“그걸 아는 놈이 왜 원고를 이따위로 써와!”
최민식은 쥐고 있던 민우의 원고를 책상에 내팽개쳤다.
할 말이 없었던 민우는 고개만 푹 숙였다.
최민식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가 허리에 손을 짚으며 화를 삭였다. 기대를 너무 많이 한 탓에 실망도 그만큼 컸다.
‘잠깐.’
민우를 노려보던 그는 문득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늘 열심히 해 오던 후배다.
강의 청탁도 모두 거절했다고 들었다. 딱히 노는 것 같지도 않았고, 도서관에 갈 때마다 늘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순간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과거의 한 장면.
‘이 자식…… 설마?’
생기가 없는 얼굴에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이 떠올랐다.
장래가 촉망되던 어느 선배의 죽음.
최민식은 왠지 그때와 상황이 비슷하게 흘러가고 있음을 느꼈다.
“형. 오늘 바로 수정해서 다시 보여드리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이따 다시 한번 봐주세요.”
“아니. 됐다.”
민우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최민식은 입술을 굳게 다물고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민우의 눈에는 죄수를 심판하는 절대자처럼 무섭게 보였다.
몸을 가까이 한 최민식이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너 솔직히 말해 봐. 하루에 몇 시간 자냐?”
“세 시간 정도…… 잡니다.”
“뭐? 세 시간?”
최민식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어떻게 인간이 하루에 세 시간만 자고 살 수가 있다는 말인가?
“너 자취한다 그랬지. 밥은?”
“그냥 대충 먹고 있어요.”
“대충 먹는 게 어느 정돈데.”
“하루에 한두 끼 정도.”
“그거 가지고 어떻게 버텨?”
“더워서 그런지 입맛이 별로 없더라고요.”
최민식의 입에서 장탄식이 나왔다.
자신의 예감이 맞았다.
원고가 엉망일 만했다. 민우는 지금 시속 200킬로미터로 질주하는 자동차와 같았다. 브레이크가 고장 난 채로 달리는.
“지금은 원고가 중요한 게 아닌 거 같다. 며칠 좀 쉬어라. 연구실 그만 나오고.”
“하지만 형. 원고 납기일에 맞추려면…….”
“배 째라고 해. 원고 좀 늦게 준다고 지음사 안 망한다. 내 말 귀담아들어. 앞으로 일주일간 딴짓하지 말고 집에 처박혀서 쉬어. 알았어?”
밖으로 나가려던 민식이 멈칫하더니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다. 그리고 5만 원권 지폐 두 장을 민우의 손에 쥐여주었다.
“맨날 라면만 먹지 말고 좀 잘 사 먹고 다녀. 짜식아. 가끔 사치도 좀 부리고.”
그 말을 끝으로 최민식은 박사연구실을 나갔다. 홀로 남겨진 민우는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고마워야 하는데, 이상하게 마음이 편치 않았다.
* * *
“민우 지금 어디에 있어?”
“민식 선배랑 회의 중일걸요? 오늘 점심 선배랑 같이 먹는다고 했어요.”
“이 자식 페이스룩에서 좀 뜨더니 얼굴 보기가 힘들어졌단 말이지. 비싼 척은 아주 다 하고 다녀요. 쯧쯧.”
이수빈은 겉으로 웃었지만, 속으로는 한달음에 달려가서 한진섭의 팔을 확 꼬집고 싶었다. 감히 누굴 욕하는 거야!
“그럼 어쩔 수 없네. 우리끼리 먹을까.”
“난 점심에 약속 있어요. 지도교수님하고 점심 먹어야 해서.”
“너까지 이러기냐.”
“오빠도 민 선생님하고 점심 약속 잡아요. 오붓하게.”
“차라리 굶고 말지…….”
307호엔 책상이 열 개 있었는데, 대부분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기 때문에 늘 비어 있다. 이곳은 잡담하거나 쉬는 용도로 사용했다.
두 사람은 오랜만에 책상에 앉아 책을 읽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때 문이 열리고 뜻밖의 인물이 들어왔다.
민우였다.
“어? 벌써 끝났어요? 점심 따로 먹는다고 했잖아요.”
“어쩌다 보니 일찍 끝났어.”
민우는 한쪽 구석에 놓인 소파에 앉아 눈을 감았다. 넥타이만 하지 않았지, 마치 야근을 하고 온 직장인 같았다.
뒷맛이 좋지 않았다.
최민식이 쉬라고는 했지만, 어떻게든 작업 스케줄을 맞춰야 했다. 어렵게 손에 넣은 기회를 날리고 싶진 않았다.
‘학교에서 어슬렁거리다 걸리면 박살이 날 테니까 집에서 몰래 작업해야지. 도서관에서 자료 복사하고…….’
앞으로 해야 할 일을 생각하다 보니 다시금 어지럼증이 도졌다. 속도 울렁거렸다. 멀미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때 전화가 왔다.
발신인을 확인하니 주예린의 이름이 찍혔다. 민우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받을까 말까를 고민하다 통화 버튼을 터치했다.
― 오빠! 큰일입니다!
“왜 또.”
― 저 전공시험 합격했어요!
합격이라는 말에 민우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그런데 이상했다. 큰일이라니.
“일단 축하한다. 근데 합격한 게 왜 큰일인데?”
― 이제 면접 전형 준비해야 하잖아요. 앞이 캄캄해요. 어쩌죠?
“…….”
뭔가 묘하게 논리적이라 민우는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하긴, 큰일입니다! 는 그녀의 말버릇이기도 했으니까.
민우가 차분히 말했다.
“일단 제출한 연구계획서 있잖아? 그거 위주로 질문이 나올 테니까 예상 질문 뽑아서 철저히 준비해. 공격하거나 하지는 않으니까 너무 걱정할 거 없다.”
― 또 하실 말씀은 없으신가요?
“이 녀석이 아주 제대로 빨대 꽂았네. 연구계획서 외에 다른 주제로 연구하고 싶은 거 하나 정해 놔. 소신 있게 보이도록 준비 잘하고.”
― 알겠어요! 오빠. 모르는 거 있으면 또 전화할게요.
“그래.”
민우가 전화를 끊을 무렵 수빈이 어느새 옆자리에 앉아 있었다.
“예린이에요?”
“응. 1차 전형 합격했대.”
“정말요? 잘됐다!”
이수빈의 얼굴에 꽃이 폈다. 민우는 신기했다. 꽃에 꽃이 피다니.
수빈은 바로 문자로 축하 메시지를 보냈다. 별일이 없어도 사적인 대화를 주고받을 정도로 두 사람은 가까워지고 있었다.
물론 같이 있던 한진섭이 가만히 있을 위인은 아니었다. 그가 한달음에 소파로 뛰어왔다.
“역시 그럴 줄 알았어. 우리 린이가 떨어질 리가 없지.”
“언제부터 우리 린이가 된 거냐.”
“꽃바구니라도 보내야겠다. 민우 너 예린이 주소 알아?”
“오바하지 마. 뭔 꽃바구니야? 1차 전형 합격한 거 가지고.”
“그 정도의 성의는 보여야지. 여자의 마음을 사로잡으려면 물질적인 게 필요한 법이야. 안 그래?”
진섭이 수빈에게 동의를 구했다. 하지만 그녀는 싱긋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중요한 건 얼굴 아닐까요.”
“…….”
“농담인데.”
“어휴, 제가 번지수를 잘못 찾았네요. 솔로들한테 물은 내 잘못이지.”
“아무튼, 나 다음 주 수요일에 대전 내려갈 거야. 참, 섭이 너 차 있지? 차 가지고 오면 같이 가는 걸 긍정적으로 검토해 보마.”
“제가 대전까지 편히 모시겠습니다!”
진섭의 얼굴에도 꽃이 폈다.
그는 주예린이 솔로라는 사실을 알고 난 이후에 완전히 변했다. 낙천적이고 긍정적으로.
왠지 자기만 소외당하는 거 같아 이수빈이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나도 같이 가면 안 돼요? 서지훈 선생님 한번 뵙고 싶은데.”
“미안해. 나한테 따로 하실 말씀이 있는 거 같았어. 다음에 같이 가자.”
“알았어요.”
그때 민우의 핸드폰이 울렸다.
톡이 하나 왔는데, 얼마 전 연락을 했던 학보사 편집국장이었다.
오늘 오후에 인터뷰가 잡혀 있어서 확인차 온 연락이었다. 민우는 시간을 아낄 겸 인터뷰를 당겨서 해도 괜찮냐고 물었다.
곧 가능하다는 답이 왔다.
여기에서 시간을 낭비할 필요는 없었다. 민우는 가방을 들고 307호를 나섰다. 진섭은 연구실에 남았고, 수빈이 따라 나왔다.
“어디 가려고?”
“도서관에요. 자료 좀 찾게.”
“그럼 같이 갈까? 학보사 학생회관에 있다니까.”
학생회관은 인문관과 중앙도서관 사이에 위치해 있었다. 그래서 민우와 수빈은 중간까지 같이 걸어갈 수 있었다.
두 사람이 인문관을 나섰다.
맴맴맴― 매앰―
시원한 비가 절로 생각날 정도로 후텁지근한 날씨였다.
그늘을 골라 걷는데도 땀이 비 오듯 흘렀다.
민우는 왠지 몸이 나른해지는 것을 느꼈다. 마치 붕 뜨는 것 같은.
바로 그때.
온 세상이 캄캄해졌다. 태양이 꺼진 것 같았다.
민우의 눈에서 초점이 사라졌다.
“그래도 오늘 안 늦었다니 다행이네. 잠이 보약이래. 오빠가 젊긴 해도 잠은 중요하니까 가끔은 일찍 자. 계속 늦게 자 버릇하면 피부 안 좋아져. 요즘은 남자들도 피부 관리하는 시대니까. 응?”
대답이 없자 수빈이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민우의 모습이 없었다.
깜짝 놀란 이수빈이 몸을 돌렸다. 곧 그녀의 두 눈이 화등잔처럼 커졌다.
“오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