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2. 유명세를 치르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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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 유명세를 치르다 (2)
2021.05.31.
“그렇겠지. 끝내주겠지.”
강예진이 양손으로 허리를 짚었다. 미소는 사라지고 표정이 엄숙해졌다.
“넌 우리 학교 출신도 아닌데 이것저것 열심히 하고 다니네. 인정도 받고.”
지켜보던 수빈과 진섭은 긴장했다. 왠지 그녀의 입에서 험한 말이 쏟아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민우의 생각은 달랐다.
일전에 있었던 술자리에서 그녀에 대해 잘 알게 됐다. 느낌상, 지금 강예진은 자신에게 시비를 걸려고 하는 게 아니었다.
그래서 민우는 편히 답했다.
“출신이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무엇을 어떻게 공부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닐까요.”
“솔직히 출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어. 난. 네가 민식 오라버니 도와줄 때도 그 생각이 바뀌거나 하진 않았거든. 어쩌다 운 좋게 걸린 거다. 그냥 그렇게 생각하고 말았지.”
“이해합니다. 제가 누나였어도 아마 그랬을 거예요.”
“이해한다고? 네가?”
강예진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하지만 어쩌면.
그런 생각이 들자 그녀의 시선이 핸드폰으로 내려갔다. 마지막 슬라이드가 여전히 액정에 남아 있었다. 그리고 환하게 웃고 있는 민우의 모습도.
그녀가 다시 고개를 들어 사진의 주인공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왠지 넌…….”
강예진이 잠시 말을 끊었다.
페이스룩에 올라온 강연 슬라이드는 물론, 민우의 강의 동영상을 끝까지 본 그녀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학교와 학과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대학 간판을 위해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학문이라는 공통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거라고.
하지만 그녀는 굳이 그것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말하지 않아도 눈앞의 후배는 이미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어쨌든 뭐, 잘됐어.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게 아니고. 있지. 내 후배가 학보사 기자로 있거든. 너랑 인터뷰하고 싶다고 하는데 어때?”
“전 언제든 괜찮습니다.”
“그럼 시간 날 때 학보사에 가 봐. 후배한테 네 전번 알려준다.”
“옙.”
“아, 참.”
문밖으로 나가려던 강예진이 잠시 돌아섰다. 그녀가 잠시 머뭇거리더니,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강의 동영상 끝까지 봤는데, 멋있더라. 많이 배웠어.”
많이 배웠다는 말.
결코 쉽게 할 수 있는 말은 아니었다. 그 대상이 아랫사람이라면 더욱. 보잘것없는 학부 출신 후배한테는 더더욱.
그래서일까.
민우는 진심을 담아 그녀에게 말했다.
“고마워요. 누나.”
“고마우면 담에 밥 사든가.”
강예진이 밖으로 나가자 긴장이 탁 풀렸다. 기다렸다는 듯 수빈과 진섭이 호들갑을 떨었다.
“오빠, 축하해요! 이제 완전 유명인 다 됐네!”
“아 부럽네 진짜. 신은 대체 무슨 생각이지? 왜 한진섭을 세상에 내려보냈는데 박민우도 같이 내려보낸 거냐고!”
민우는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책상에 돌아와 앉았다.
“부러울 거 뭐 있어? 어차피 반짝하고 말 건데. SNS라는 게 늘 그렇잖아. 빨리 뜨거워지고 빨리 식지. 그러니 들뜨지 말고 내 공부하는 게 낫다.”
“표정관리 봐라 저거. 좋으면 좋다고 솔직히 얘기하시죠? 박민우 씨.”
“그러게요. 속으론 막 히히거리고 웃고 있으면서.”
“들킴?”
“응. 들킴.”
두 사람이 한목소리로 대답했다.
민우는 결국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두 사람은 자신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냥. 아직도 모르겠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정신이 하나도 없다.”
그래도 설렜다.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정말 기대됐다. 여기저기서 연락이 오면 어쩌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강연 요청 쏟아질 거 같은데 어떻게 할 거예요?”
이수빈이 물었다.
중요한 질문이었지만, 민우의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서지훈 교수의 가르침이 떠올랐던 것이다.
“안 할 거야.”
“돈 쓸어 담을 수 있는 좋은 기회인데 왜 마다해? 그럴 만한 능력이 있으면 해야지.”
그런 생각을 한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민우는 신중하게 생각했고, 다른 결론을 얻었다.
“지금은 유명해지는 것보다 내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해야지. 아직은 더 실력을 쌓아야 해. 밑천이 금방 드러나면 재미없잖아.”
“크, 우리 박 선생 멘트 봐라. 벌써부터 이미지메이킹 들어가시네.”
“당분간은 단행본 집필에 집중할 거다. 공모전 본선 준비도 해야 하잖아? 중간에 슬쩍 빠지면 너희들한테 미안하지.”
“그래요. 기회는 또 오겠죠. 준비만 되어 있다면!”
수빈은 전적인 신뢰를 보냈다. 그녀의 눈빛을 접수한 민우는 미소로 화답했다.
아직은 강단에서 하고 싶은 말이 충분히 쌓이지 않았다. 머릿속에 담아둔 지식이 흘러넘칠 그때, 민우는 강단에 서야겠다고 생각했다.
진섭이 민우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이렇게 되면 공모전 본선 발표자는 정해진 거나 다름이 없네.”
“그러게요.”
“잘 부탁한다. 친구.”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그렇게 생각한 민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까톡! 까톡!
시간이 지나자 핸드폰으로 메시지가 하나둘 오기 시작했다.
확인해 보니 고향 친구들이었다. 대학 선후배들도 있었다. 하나같이 페이스룩에 올라온 강연 게시물에 대해 이야기했다.
일일이 답장하기 어려울 정도로 문자가 많이 쌓이기 시작했다. 민우는 멍한 눈으로 늘어가는 메시지를 바라보기만 했다.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니지?’
아무도 모르게 허벅지를 꼬집어보았다. 따끔한 통증이 느껴졌다.
민우는 핸드폰으로 오랜만에 페이스룩에 접속했다.
붉은색 알람이 몇 개 떠 있다.
강연 슬라이드 게시물을 본 친구들이 자신의 이름을 태그한 것이다. 민우는 원본 게시물을 공유해 자신의 타임라인에 올려두었다.
원본 게시물을 올린 사람의 이름을 확인한 민우는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역시 민덕이였구나. 짜식. 왜 시키지도 않은 짓을 하고 그래.’
실시간으로 좋아요 수와 친구 신청이 하나둘 늘어났다.
하지만 민우는 그것을 확인하는 것보다 더욱 중요한 일을 시작했다. 메일 앱을 실행해 김민덕에게 보낼 메일을 썼다.
그 시각, 무투브에 올라간 민우의 강연 동영상 조회수는 10만을 넘어서고 있었다.
* * *
명인대 공식 페이스룩 계정이 민우의 강의 슬라이드와 영상을 공유했다. 좋아요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했다.
그뿐만 아니라 명인대 입학홍보처, 국문과, 인문대학, 일반대학원 계정도 민우의 강의를 공유했다.
그리고 그 변화는 실제 생활에서 분명히 나타났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강의 잘 봤습니다.”
명인대 인문대 학부생들이 민우를 알아보고 인사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모르고 지나치는 학생들도 많긴 했지만, 극적인 변화였다.
민우는 그때마다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를 받았다. 가끔 말을 걸어오는 학생들이 있으면 하는 일을 멈추고 이야기를 나눴다.
‘이제 함부로 다니지도 못하겠네. 알아봐 주는 건 좋긴 한데…… 은근 부담된다.’
민우는 공인들의 고충이 어떤 것인지를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긍정했다.
좋은 일을 해서 받는 관심이었다. 충분히 즐겨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밥이나 먹으러 갑시다.”
“얍!”
저녁 6시.
민우는 이수빈과 한진섭과 함께 인문관을 나섰다. 이제는 완연한 여름이라 밖이 아직도 훤했다. 더운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학생회관으로 이동하는 도중에 서지훈 교수에게 전화가 왔다. 민우는 잠시 뒤로 물러서 전화를 받았다.
“예, 선생님.”
― 또 무슨 사고를 친 거냐? 인터넷에 난리가 난 거 같던데.
“난리는 아니고요. 전에 그거 때문에요.”
― 그래. 예린이가 보여줘서 끝까지 다 봤다. 잘하던데? 다음 학기부터 우리 학부 강의 맡아도 되겠어. 이러다가 내 자리가 위험하겠군. 하하하하!
서지훈 교수의 농담에 민우는 웃기만 했다. 어차피 하고 싶어도 못한다. 대학 강의는 석사학위가 있어야 하니까.
― 연락 좀 오냐? 강의 청탁.
“두 개 받았어요. 서울하고 강원도 쪽 지자체에서 하나씩 왔는데 일단 거절했습니다.
― 잘했다. 논문은 몰라도 강의는 내공 충분히 쌓고 시작하는 게 좋아. 그래야 오래 버틸 수 있거든. 생각보다 만만한 일이 아니야.
“알고 있습니다.”
이미 학부 시절에 들었던 이야기였다. 그래서 민우가 강의 청탁을 거절하고 지금 일에 집중하겠다고 쉽게 결정한 것이다.
― 어쩌나 싶어서 전화했는데 괜히 걱정했네. 다음 주 중에 한번 내려와라. 월요일이나 수요일에. 얼굴 좀 보자. 시간 괜찮지?
“안 그래도 예린이한테 매일 시달리고 있어서 한번 내려갈 생각이었습니다.”
― 예린이 고건 왜?
“전공시험 망쳤다고 하도 찡찡대서요. 술이라도 먹여야 조용해질 거 같습니다.”
― 쯧, 너나 나나 참 고생이다. 아무튼. 그때 보자. 연락하고.
전화를 끊은 민우는 앞서 걷고 있는 수빈과 진섭을 따라잡았다.
세 사람은 저녁을 먹고 헤어졌다.
민우가 몸이 좋지 않아 술자리는 다음으로 미뤘다. 저녁을 먹다 그가 코피를 흘린 탓이었다.
진섭이 먼저 집으로 돌아가고, 민우는 도서관 앞 벤치에서 수빈과 잠시 시간을 보냈다.
“정말 괜찮겠어? 병원 안 가봐도.”
수빈의 얼굴에 걱정이 한가득이다. 최근에 안색도 안 좋아 보였는데, 오늘 코피까지 쏟았으니까.
“코피 좀 흘린 거 가지고 뭘. 그냥 쉬면 돼. 요즘 좀 무리했으니까 쉬면 금방 나아질 거야.”
“이틀 정도 푹 쉬어. 딴짓하지 말고. 응?”
민우는 코를 막고 있던 휴지를 뺐다. 이제 피가 멈춰 더 이상 흐르지 않았다.
“이틀은 좀 큰데.”
“…….”
“휴, 알았어. 오늘은 조금만 보고 일찍 들어가서 쉴게.”
“약속.”
수빈이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민우도 새끼손가락을 걸어 약속했다. 수빈은 손가락을 움직여 사인에 복사까지 했다.
문득 어린 시절이 떠올라 민우는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수빈은 진지했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지?”
“압니다. 잘 알지요. 약속 지킬게.”
그제야 수빈이 집으로 돌아갔다. 민우는 버스정류장까지 데려다주고 다시 도서관으로 돌아왔다.
오늘 진행한 작업량을 보니 한숨이 나왔다.
‘진짜 몇 글자 쓰지도 못했구나…… 조금 서둘러야겠어. 내일 민식이 형 만나기로 했으니까. 못해도 세 페이지는 써보자.’
민우는 미리 정리해 둔 논문 파일을 열었다. 영어로 되어 있어서 안경을 쓰지 않아도 자연스레 읽을 수 있었다.
필요한 부분을 요약하고, 두세 문장으로 깔끔하게 정리했다. 도입부는 생략. 서론의 본문부터 작성하기 시작했다.
‘문장은 짧고 간결하게. 전문용어는 신중하게 쓰고. 다음 문단으로 넘어갈 때 자연스럽게 넘어가도록. 자신 있게 쓰되 자만심이 묻어나지 않게!’
서지훈 교수와 최민식의 가르침을 마음에 새기며 원고를 쓰기 시작했다.
서론 부분은 매우 중요하다. 책의 전체적인 기풍이 결정되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지면을 할애하더라도 잘 풀어 쓸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그때, 민우는 갑작스러운 현기증을 느꼈다.
글자가 서너 개로 보이기 시작했다.
민우는 눈을 몇 번 깜빡거렸다. 하지만 나아지는 게 없었다. 그는 가방에서 인공눈물을 꺼내 눈에 넣었다.
‘하필 중요한 시기에 컨디션이 엉망이라니. 큰일이다.’
증세는 사라졌지만 집중력이 흐트러지고 말았다.
민우는 시계를 확인했다. 오후 7시 34분. 잠시 쉬기로 하고 지하휴게실로 내려왔다.
소파에 앉아 눈을 감았다. 시간이 지나니 점차 몸과 마음이 편안해졌다.
‘이거 너무 공부만 했나?’
몸을 돌볼 시간이 없었다. 하루 종일 책상에 앉아있으니 체력이 떨어지는 건 물론, 건강이 나빠지기 시작했던 것.
무엇보다도 자는 시간이 부족했다. 하루에 세 시간. 가끔 많이 자면 다섯 시간이었다.
‘단행본 끝나면 헬스 끊어야겠다. 이렇게 체력이 딸려서야 원.’
그때 진동이 느껴졌다. 어머니였다. 민우는 바로 전화를 받았다.
― 별일 없지?
“있으면 전화했지. 엄마는 어디 안 아프지? 전에 화상 입은 데는 다 나았어?”
― 그래. 이제 병원 안 다닌다.
그런데 어머니의 목소리가 평소와는 조금 달랐다. 조심스러우면서도 걱정되는 그런 느낌이었다.
― 밥은 잘 먹고 다니니? 어제 꿈자리가 영 사나워서 걱정이 되지 뭐야. 그래서 전화했다.
“그런 거 믿지 마. 꿈은 현실의 반대라잖아. 밥은 잘 먹고 있으니까 너무 걱정 말고. 참, 다음 주 수요일에 대전 내려갈게.”
― 오냐. 맛있는 거 해 놓고 있으마.
민우는 전화를 끊었다.
시계를 확인하니 벌써 8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민우는 힘겹게 일어서 12층으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