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1. 유명세를 치르다 (1)
(51/500)
051. 유명세를 치르다 (1)
(51/500)
051. 유명세를 치르다 (1)
2021.05.28.
김민덕이 컴퓨터 앞에 앉았다.
무투브에 접속해 동영상을 틀었는데, 그것은 바로 얼마 전 올라온 민우의 강의 동영상이었다.
조회수가 1만을 넘었다. 댓글은 20여 개가 달렸는데, 대부분 칭찬 일색이었다.
김민덕은 잠시 동영상을 멈추고 댓글을 쭉 살펴보았다.
꿈별: 정말 유익한 강의네요 이런 비슷한 동영상 추천 좀요
소라소라: 강사님이 젊고 훈훈하게 생기셨네 ㅎㅎㅎ 여친 있으신가?
사막여우12: 생각할 거리가 많아서 좋네여!
호랑이눈물: 크 명인대 클라스~
도버리: 이번 인문학 강의 시리즈 중 가장 좋은 강의네요. 박민우 강사님의 강의가 시리즈물로 기획했으면 좋겠습니다!
강의의 내용이 너무 가볍다는 비판도 있긴 했다. 하지만 청소년을 대상으로 기획한 강의라는 댓글이 달리니 조용해졌다.
김민덕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역시 대단하셔. 그때 만약 민우 쌤을 못 만났다면 어떻게 됐을까?’
동남아시아계 혼혈이었던 그는 민우의 인문학 강의를 현장에서 들었다. 강의가 끝나고 따로 질문을 던졌던 그 학생이었다.
그 이후로 민우와 메일을 주고받고 있었다. 인문학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사는 이야기, 고민, 진학 문제 등을 주로 이야기했다.
민우의 평범함은 이 부분에서 빛을 발했다.
그도 학창시절 놀기 좋아하는 학생이었다. 엘리트가 아니었기 때문에, 민덕의 눈높이에서 그의 고민을 들어줄 수 있었던 것이다.
민덕은 마치 친형처럼 살갑게 답장을 해 주는 민우가 고맙고 좋았다.
무엇보다도 민덕은 민우의 가르침을 토대로 자신의 생각을 분명하게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조금이나마 지혜와 용기를 얻게 된 것.
‘이제는 뭘 해도 자신이 있어.’
차별이 금방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무시만 당하던 현실이 조금씩 나아지고 있었다. 하나둘,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친구들이 늘었다.
그 모든 것의 변화의 중심에는 민우의 강의가 있었다. 자연스레 민덕은 이렇게 생각했다.
‘이 좋은 강의를 다른 친구들도 보면 좋겠는데…….’
김민덕은 진지하게 생각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생각했고, 이내 방법을 떠올렸다.
‘수업 내용을 간추려서 인터넷에 올려볼까?’
민덕은 방과 후 활동으로 이미지 편집을 배우고 있었다. 조악한 실력이지만 사진을 꾸미고 글씨를 넣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었다.
피부색이 달라 친구가 많이 없었던 김민덕은 SNS를 활발히 하는 편이었다.
최근 페이스룩, 트위스트 등 세계적으로 유명한 SNS를 즐겨 하고 있었다.
그리고 김민덕은 그곳에서 각종 명사들의 강의가 슬라이드 형식으로 올라온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관심이 있어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한번 그렇게 만들어 봐야지. 쌤도 분명 좋아하실 거야!’
김민덕의 손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우스가 움직였고, 동영상이 담은 순간들이 사진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그가 만든 사진 꾸러미가 SNS에 올라간 것은 자정 무렵이었다.
* * *
민우는 여전히 12층 해외 서가 코너에서 논문과 씨름을 하고 있었다.
단행본에 들어갈 기초 자료는 대부분 모았으니, 이제 자료를 하나씩 읽고 요약정리를 할 차례였다.
‘요약정리라고 해서 우습게 생각한다면 경기도 오산이지.’
꽤 어려운 작업이다. 수십 페이지에 달하는 논문을 서너 줄로 압축해야 한다. 논문 전체를 이해하고 있지 않다면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그때, 한참 논문을 읽던 민우가 갑작스레 눈에서 이물감을 느꼈다.
“어?”
눈앞이 흐릿해졌다. 그러더니 세상이 한 바퀴 빙글 돌았다.
‘윽. 또야?’
민우는 안경을 벗고 의자에 등을 편히 기댔다. 잠시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하니 어지럼증이 서서히 사라져갔다.
‘요즘 들어 좀 자주 이러네. 이거 영양제라도 사 먹어야 하나?’
그렇게 자문했지만, 민우는 피식 웃고 말았다.
이미 답을 알고 있어서였다. 영양제를 사 먹을 필요는 없다. 조금 더 쉬고, 조금 더 자고, 조금 더 잘 먹으면 금방 나을 것이다.
최근에 더워진 날씨 탓도 있었다. 밥을 남기는 것은 물론, 아침과 저녁도 거르기 일쑤였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체력이 떨어졌다.
민우는 다시 안경을 꼈다.
‘앞으로는 좀 잘 챙겨 먹고 다녀야겠다. 입맛이 없어도 꾸역꾸역 삼켜봐야지.’
그때 한진섭에게 톡이 왔다. 이제 시간이 됐으니 슬슬 307호로 넘어오란다.
‘드디어 때가 온 건가.’
민우는 책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12층 해외 서가 코너에서 몇 주일 살다 보니 이제 담당 사서와 인사하는 사이가 되었다.
“오늘은 일찍 가네요?”
“뭐 좀 확인해야 할 게 있어서요. 이따 저녁에 다시 올 겁니다.”
“식사는 잘 챙겨 먹고 해요. 요즘 좀 핼쑥해진 거 같은데.”
“그래요?”
민우는 멋쩍게 웃으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엘리베이터에 올라 뒤쪽에 있는 거울에 얼굴을 비춰보았다. 확실히 예전보다 야위어 있었다.
잘 먹고 다니라는 어머니의 한마디가 저절로 떠올랐다.
‘본가에 내려가서 보신 좀 하고 와야 하나. 엄마가 해 준 갈비찜이 땡기긴 하는데.’
민우는 고개를 저었다. 괜히 더운데 어머니에게 부담을 드리고 싶지 않았다.
시계를 확인했다. 오후 2시 45분.
이제 15분 뒤면 인문학 장려 공모전의 1차 심사 결과가 발표된다.
‘처음엔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고 덤볐는데 쉽지 않았어. 막판에 뒤집지 못했다면 기대도 안 했겠지.’
그렇게 민우는 중앙도서관을 나섰다.
여전히 햇볕이 뜨거웠다. 아스팔트 도로 너머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게 보일 정도였다. 학생들은 부채질하거나 그늘 밑을 걷고 있다.
그런데 문득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캠퍼스를 걷고 있는데, 몇몇 학생들이 자신을 유심히 바라보았기 때문이었다.
‘뭐지?’
아는 사람인가 싶어 기억을 되짚어 보았지만 민우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얼굴은 아니었다.
‘처음 보는 사람인데. 왠지 기분이 좀 그러네.’
몇 걸음을 더 걷자 또다시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사람과 마주했다. 그녀는 신기한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절반쯤 오자 남학생 하나도 민우를 빤히 쳐다보았다. 민우가 인상을 쓰며 맞서자 남학생이 슬쩍 시선을 피했다.
‘옆에 수빈이라도 있으면 모르겠는데…… 왜들 이렇게 쳐다보지?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
민우는 잠시 그늘에 멈춰 섰다.
핸드폰을 꺼내 셀카모드로 전환했다. 얼굴을 살펴봤는데 볼까지 내려온 다크서클을 제외한다면 별로 이상한 부분은 없었다.
‘뭐야 대체? 냉정하게 봐도 놀림 받을 얼굴은 아닌데.’
민우는 투덜거리며 다시 걷기 시작했다.
인문관에 도착하자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사람들이 더 늘었다. 확실히 이상했다.
‘사람 몰골이 아니라서 그런가? 됐어. 신경 끄자. 내 갈 길이나 가야지.’
민우는 재빨리 움직여 307호로 올라갔다. 안에는 수빈과 진섭만 있었다.
“왜 그렇게 힘이 없어 보여요? 어디 아파요?”
“아니. 그냥.”
“점심도 별로 안 먹더니…… 얼굴이 창백해요. 병원 가봐야 하는 거 아녜요?”
“로션 바꿔서 그래. 신경 쓰지 마.”
이수빈은 여전히 걱정스러운 표정이다. 애써 싸 온 도시락도 절반 이상이나 남겼으니 걱정이 안 들 수 없었다.
민우는 가방을 소파에 던지며 진섭의 옆자리에 앉았다.
“아직 결과 안 떴냐?”
“아까 확인해 보니 안 떴던데. 어디 보자.”
진섭은 마우스를 움직여 한국연구재단 홈페이지를 띄웠다. 혹시나 했는데, 아직 팝업이나 관련 공지가 올라오지는 않았다.
“없네. 아 그냥 좀 일찍 발표하면 어디 덧나나. 민우 너 연락받은 거 없어?”
“없어.”
“이거 느낌이 쌔한데.”
보통 공모전에 당선되면 발표 전에 개별 연락이 온다. 그래서 진섭이 물어본 것이다.
하지만 사전 연락이 오지 않을 가능성도 있었다.
이번에 올라오는 공지는 최종심이 아니라 1차 예선 통과자 발표였으니까.
수빈이 진섭을 노려보며 불만을 토로했다.
“왜 느낌이 쌔해요? 우리 열심히 했는데. 당연히 본선 올라가겠죠.”
“그냥 해본 얘기야. 예민하긴.”
뱅글.
진섭이 의자를 돌려 앉았다.
“미리 정합시다. 오늘 본선 진출 확정되면 맥주 한잔 콜?”
“좋아요. 민우 오빤?”
“섭이 너 어제도 달렸잖아. 술 취해서 밤늦게 전화해서 술주정 부린 거 기억 안 나?”
“어제의 술과 오늘의 술은 같지만 다른 법이라네 친구.”
“뭔 개소리야.”
몸이 좋지는 않았지만 축하 파티는 해야 하니 빠지기가 뭐 했다. 가볍게 마시기로 했다. 본선 진출한다는 가정하에서.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오후 3시 정각이 되었다.
“아기다리고 고기다리던 결과 발표 시간이 왔습니다. 여러분. 짜잔!”
한진섭은 신이 난 목소리로 F5키를 눌렀다.
화면이 새로고침되며 팝업이 떴다.
세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팝업창에 고정됐다. 바로 그때, 긴장으로 굳어진 표정이 극적으로 밝아졌다.
“있다!”
“있어요!”
본선 진출 팀 명단에 ‘307호’가 분명히 있었다.
진섭이 벌떡 일어섰다.
“으하하하! 내가 될 줄 알았다니까? 역시 내 결론이 완벽했어. 그렇지! 그렇고말고!”
“무슨 소리예요? 전체 문맥 수정한 내 공이 제일 크지. 애초에 내가 준비한 기초 자료가 완벽하지 않았으면 통과 못 했을 거예요.”
웬일로 수빈이 욕심을 부렸다. 그렇게 두 사람은 한참이나 옥신각신하며 자신의 공을 내세우기 바빴다.
‘그래. 니들이 다 해 먹어라.’
민우는 씁쓸히 웃으며 뒤로 슬쩍 빠졌다. 그래도 기분은 좋았다. 힘들게 준비한 공모전에서 소기의 성과를 거뒀다.
본선에 진출함으로써 최소 장려상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본선만 잘 치르면 커리어에 한 줄 추가할 수 있게 됐다.
그때 307호의 문이 열렸다.
“왜들 이렇게 시끄러워?”
신경질적인 목소리에 세 사람이 입을 꾹 다물었다. 박사 2학기 강예진이었다.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307호가 조용해졌다.
강예진의 시선이 민우를 향했다.
“박민우. 너 유명인 됐더라?”
“네? 그게 무슨…….”
“너 페이스룩 안 해?”
“가끔 하는데 요즘은 안 들어가요.”
“이거 봐봐.”
강예진이 핸드폰을 내밀었다. 페이스룩 앱이 켜져 있었는데, 누군가 올린 사진 게시물이 보였다.
새까만 배경에 ‘인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이 쓰여 있다.
민우가 시선을 내렸다. 하단 탭을 보니 좋아요 수가 5만, 댓글은 250여 개, 공유 수도 100여 건에 이르고 있었다.
수치만 봐도 굉장히 영향력 있는 게시물이었다.
“이게 뭔데요?”
“직접 넘겨 봐.”
민우가 손가락으로 화면을 쓸어 넘겼다.
표지가 바뀌자 마이크를 손에 쥔 자신의 사진이 보였다. 민우는, 아니 같이 보고 있던 두 친구들 모두 깜짝 놀랐다.
― 인문학은 사람이다. 사람에 대한 것이다.
사진 밑에 글귀가 하나씩 들어가 있다.
‘이거 분명…….’
심장이 격동했다. 묘한 긴장감과 쾌감이 민우의 혈관을 따라 온몸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그는 천천히 슬라이드를 넘겼다.
다음 화면도 자신의 강의 사진이었다. 한 손에 펜을 들고 뭔가를 강조하는 포즈다.
― 생각이 모여 이성을 이루고, 그것을 조리 있게 풀어내는 사람이 지성인이다. 훌륭한 지성인은 어디에나 있다.
생각의 힘.
강의 때 했던 말들이 슬라이드에 들어가 있었다. 잘 편집된 멘트들이 하나둘 지나가고, 어느새 마지막 슬라이드에 닿았다.
― 인문학이란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방법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민우의 손가락이 멈추며 살짝 떨렸다.
사진 속의 자신은 해맑게 웃고 있었다. 왠지 이질적인 모습이지만, 어느새 민우도 그 사진과 똑같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쳐다봤던 건가?’
해시태그에 명인대가 들어가 있었다. 그제야 의문이 풀렸다. 아마 이 게시물을 보고 학우들이 자신을 알아본 것이리라.
강예진이 투덜거렸다.
“지금 인문대 난리 났어. 다 네가 누군지 물어보고 있다. 아, 증말 귀찮아 죽겠단 말야. 후배 하나 잘못 둬서.”
하지만 그녀의 표정이 바뀌었다. 제법 대견하다는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물었다.
“박민우 선생. 기분이 어때? 유명인이 된 기분이.”
“어. 그게…….”
잠시 멍해 있던 민우가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그리고 가슴을 가득 채운 그 짜릿한 느낌을 한마디로 표현했다.
“끝내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