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0. 과거의 그림자 (2)
(50/500)
050. 과거의 그림자 (2)
(50/500)
050. 과거의 그림자 (2)
2021.05.27.
당시 명인대에 갓 임용된 민 교수는 학회에 발표자로 참가했다. 토론자는 한창 주목을 받던 신예 서지훈 교수가 맡았다.
일반적으로, 동문이 발표자와 토론자로 만난다면 토론은 형식적으로만 이뤄진다. 서로 존중하며 싸움을 피하는 것이다.
‘하지만 놈은 그러지 않았지.’
민영환 교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토론자로 나선 서지훈은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했다. 문장에서부터 논문의 내용과 형식까지, 그는 민영환 교수를 잔인하게 물고 뜯었다.
방심하고 있었던 민영환 교수는 일방적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대부분의 질문에 답을 하지 못했고, 수백 명의 청중들 앞에서 망신을 당해야 했다.
그가 왜 그랬는지는 대강 짐작이 가는 바가 있었다. 아마도 송승현 실장 때문이리라.
‘후배한테 아이디어를 빌리는 거야 뭐 하루 이틀 일도 아닌데. 맹랑한 놈. 둘이 붙어먹은 걸 조금이라도 빨리 알았어야 했어.’
그는 송승현에게 아이디어를 빌렸다고 표현했지만, 사실 빌린 게 아니라 훔친 것과 다를 바 없었다.
그 일을 계기로 송승현이 명인대 대학원 진학을 단념하고 해외로 유학을 떠났다. 이듬해 서지훈 교수는 명인대가 아닌 상아대에 자리를 잡았다.
민영환 교수는 후회했다.
후배 아이디어를 훔친 것을 반성하는 게 아니었다.
‘박민우. 고게 문제야.’
처음 민우가 지도교수로 제청한 사람은 박창민 교수였다. 하지만 학과 내규상 정원이 초과되어 같은 전공인 민영환 교수 밑으로 떨어지게 됐다.
올해 초 서지훈 교수가 잘 부탁한다는 전화를 하긴 했었다.
당시 민영환 교수는 우월감에 사로잡혔다.
잘 부탁한다는 것은 자신을 더 위로 쳐주는 거라 생각했다. 오랜 시간이 지나고 서지훈 교수가 자신에게 용서를 구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왠지 그게 아닌 거 같단 말이지…….’
현대소설 전공이라 일단 민우를 제자로 받긴 했는데 마음이 썩 편하지 않았다. 그가 조금씩 성장할수록 꺼림칙했다.
얌전한 고양이인 줄 알았는데 가끔 호랑이처럼 굴 때가 있었다.
이대로라면 민우는 석사학위를 받을 것이다. 그럴 만한 능력을 갖추고 있으니까.
‘하지만 박사과정 입학은 달라. 다르고말고!’
박사과정 입시에서 떨어트릴 이유는 부지기수로 많았다.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민영환 교수는 편안한 미소를 되찾을 수 있었다.
그의 밑에 있는 석사 타대생은 단 두 명.
그중 하나를 뽑으라면 당연히 한진섭을 택하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적어도 그는 주머니를 뚫고 나올 정도의 송곳은 아니었기 때문에.
‘내가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괜한 일에 내가 흥분을 했구만. 하하하하.’
그때 노크가 들렸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바쁘십니까?”
“아니. 별일 없다.”
들어온 사람은 민우였다. 그는 인쇄물을 들고 조심조심 민영환 교수 쪽으로 다가왔다.
“무슨 일이냐?”
민영환 교수의 어조가 이상할 정도로 차분했다.
민우는 뭔가 이상함을 느꼈지만, 인쇄물을 먼저 그에게 건넸다. 랑느 박사의 초록을 번역한 것이었다.
“전에 시키신 번역 말인데요. 다시 검토해 봤는데 필요한 부분이 있어서 보강했습니다. 파일도 같이 메일로 보내 드렸습니다.”
“무슨 보강?”
“해설을 좀 달았습니다.”
민영환 교수는 인상을 쓰며 민우가 건넨 프린트를 읽기 시작했다. 확실히 원문에는 없는 해설이 각주로 달려 있었다.
민우가 조용히 그 배경을 설명했다.
“랑느 박사의 논문을 처음 접하는 사람들은 좀 어렵다고 느낄 수 있는 부분이 있어서요. 신조어를 사용하더군요.”
“신조어라…….”
해설은 깔끔하게 잘 되어 있었다. 용어가 탄생하게 된 배경까지 잘 설명되어 있었다. 이대로 인쇄해도 문제는 없어 보였다.
“으음, 대충 봐줄 만은 한 거 같군.”
“다행입니다.”
시간을 내어 원서로 된 랑느 박사의 책을 읽은 덕이 컸다. 랑느 박사는 기존의 문학 용어를 쓰지 않고, 새롭게 만든 것들을 자주 사용했다.
초록 번역을 할 때는 안경 덕분에 쉽게 넘어갔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니 다른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할 것 같아 각주로 해설을 단 것이다.
일곱 살 꼬맹이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쓰라는 민식의 조언 덕이었다.
‘그 말이 아니었다면 해설을 달 생각을 못 했을 거야. 읽는 사람의 입장에 서보지 못했을 테니까.’
주제넘은 짓이라는 비판을 들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민우는 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하고 실행에 옮겼다. 자신의 실력을 보여줄 수 있는 몇 안 되는 기회였으니까.
“그런데 뭘 했길래 해설을 달 생각을 다 했어?”
“실은 얼마 전부터 랑느 박사의 책을 읽는 중이거든요. 그러다 보니 조금 설명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그렇구나. 잘했다. 열심히 하는 모습이 보기가 좋구나.”
민우는 깜짝 놀랐다. 민영환 교수의 입에서 칭찬이 나온 것은 입학 이래로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왜 그러지?”
“아, 아닙니다. 감사합니다.”
민 교수가 화제를 바꾸었다.
“단행본 준비는 잘돼 가나?”
“옙. 배우는 자세로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해라. 괜히 민식이 다리 붙잡는 일 만들지 말고.”
“명심하겠습니다.”
민영환 교수가 인자한 표정으로 번역 페이퍼를 한쪽으로 치웠다.
“그런데 석사 논문은 언제부터 들어갈 생각이냐?”
“이번 겨울부터 시작해 보려고 합니다. 일단 선생님께서 쓰신 논문들은 다 읽었고요. 중요한 부분을 간추리고 있습니다.”
“잘하고 있구나. 기존의 연구사를 검토하는 게 중요하지. 참, 나가는 길에 307호에 진섭이 있으면 불러오고.”
“알겠습니다.”
민우는 꾸벅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뭐 오늘 좋은 일이라도 있으셨나?’
곧 한진섭이 벌벌 떨며 민영환 교수의 연구실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큰 목소리 하나 없이 조용하기만 했다.
* * *
307호로 돌아온 민우는 노트북을 켜고 박진영 교수에 대한 자료를 수집했다. 오늘 오후에 그와 만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
‘만나기 전에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가는 게 좋겠지?’
일단 민우는 RISS에 접속해 그의 연구물을 검색했다.
동명이인이 많아 간추리기 좀 힘들었지만, 대강 10여 건의 연구물이 나왔다.
‘영국 르네상스기 문학을 주로 연구하는 사람이구나.’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 시드니(Sir Philip Sidney), 스펜서(Edmund Spenser)의 연구물들이 주를 이뤘다. 모두가 영국 르네상스기를 대표하는 문인들이었다.
특히 민우는 셰익스피어에 주목했다.
얼마 전까지 독문학 공부를 하며 그의 이름이 몇 번 언급이 된 적이 있었다. 독일 문학의 거장 괴테는 그의 작품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 이 특색 있는 예술만이 진정한 예술인 것이다!
민우는 그간 읽었던 것들을 머릿속에서 정리해 보았다.
‘셰익스피어 말고는 별로 지식이 없는데…… 뭐 상관은 없겠지. 일적으로 만나는 것도 아니니까.’
민우는 자료를 좀 더 살펴보다 노트북을 끄고 307호를 나섰다. 한일대학교는 지하철로 30여 분 정도를 가야 했다.
‘생각보다 크구나.’
정문을 지난 민우는 막막함을 느꼈다. 명인대 못지않게 넓었다. 미리 지도를 보고 왔는데도 찾기가 쉽지 않았다.
그때 진동이 울렸다.
핸드폰을 확인해 보니 대전 동구청의 김유신 주무관이었다.
“네, 주무관님. 안녕하세요?”
― 오랜만에 연락드립니다. 선생님, 잘 계셨죠?
“더운 거 빼고는 잘 지냈습니다. 주무관님은 어떠세요?”
의례적인 인사말이 오가고 김유신 주무관이 본론으로 들어갔다.
― 전에 강의하신 거 동영상 있잖습니까. 그거 관련해서 동의를 좀 구하려고 연락을 드렸습니다.
“예.”
― 대전시청 홈페이지와 무투브에서 동시에 공개할 계획인데요. 다른 강의도 같이 묶어서 말입니다. 이에 허락을 좀 받고 싶습니다.
민우는 오래 생각하지 않았다. 인터넷 공개는 그도 바라는 바였다.
“전 동의합니다. 서류 작성이 필요한 게 있을까요?”
― 예. 등기로 계약서를 하나 보내드릴 텐데요. 검토해 보시고 작성해 주시면 되겠습니다. 인센티브 항목이 있으니 그 부분 잘 확인 부탁드립니다.
“그럴게요.”
전화가 끊겼다.
민우는 왠지 마음이 설렜다. 자신의 강의가 인터넷에 공개되면 어떨까. 잘 될까?
대전시청 홈페이지는 그렇다 쳐도 무투브는 다르다. 세계에서 제일 큰 동영상 플랫폼이다.
‘쪽 당하지 않으면 다행이지 뭐. 너무 기대는 말자. 기대가 클수록 실망도 큰 법이니까.’
민우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10분 정도를 헤매고 나서야 문리대 건물을 찾았다. 박진영 교수의 연구실은 4층에 있었고, 민우는 문을 두드렸다.
연구실은 작았다. 책도 많지 않았고, 연구실이라기보다는 사무실이라는 느낌이 강했다.
“별사탕 씨?”
“예. 교수님. 박민우입니다.”
“이야, 더운데 이렇게 와 주셔서 고맙네요.”
박진영 교수는 검은 뿔테 안경을 쓰고 있었는데, 나이는 30대 중반으로 보였다. 작고 날카로운 눈매가 고집스러워 보이는 사람이었다.
두 사람은 가볍게 악수하고 자리에 앉았다.
“연구실이 아담하고 좋네요.”
“하하하. 좀 좁죠? 국립대는 연구실 면적이 법으로 정해져 있어서 말입니다. 명인대는 사립이라 그런 게 없겠네요.”
“아뇨. 좁긴요. 오히려 집중이 잘될 것 같은데요.”
“더운데 시원한 거 하나 드시겠습니까?”
“감사합니다.”
박진영 교수가 냉장고에서 시원한 캔 음료 두 개를 꺼냈고, 그때부터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됐다.
블로그 이야기를 하다가 학업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민우는 자신이 상아대 출신이고, 얼마 전에 명인대에 진학했다는 이야기를 했다.
“이거 얘기를 듣다 보니 점점 궁금해지네요. 민우 씨는 국문학 전공인데 왜 해외 저널을 그렇게 읽으시는 겁니까?”
“결국, 제가 하고 싶은 건 문학이라서요. 벌써부터 경계를 정해놓고 하고 싶진 않았어요.”
“그럼 나중에 전공을 바꾸실 수도 있는 거겠네요?”
“음…… 거기까지는 잘 모르겠는데요. 공부를 하다 보면 길이 저절로 보이겠죠? 저희는 비교문학 협동과정도 있으니 그쪽도 생각해 볼 수 있겠네요.”
박진영 교수가 감탄했다.
일반적인 대학원생이라면 자신의 전공에 올인한다. 하지만 눈앞의 청년은 정반대의 길을 가고 있었다. 명확한 목표를 가지고.
민우는 다시 블로그 이야기로 돌아와서 그에게 질문을 던졌다.
“제가 당분간은 영미문학 관련 저널을 포스팅하려고 하는데요. 분류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민이라서…… 교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쉽진 않은 문제네요. 흐음, 단순하게 시기별로 구분하는 건 어떻습니까?”
“일반적인 문학사처럼요?”
“예에. 중세, 르네상스, 고전주의, 낭만주의, 빅토리아왕조, 20세기 이후 정도로 잡으면 어떨까 싶네요. 아, 말 나온 김에 제가 참고자료를 좀 보내드리겠습니다. 저도 도움을 받았으니 베풀어야죠.”
민우는 감사의 인사를 남겼다. 박진영 교수는 학부 수업이 있다고 양해를 구하며 일어섰다.
“다음엔 좀 더 깊은 얘기를 나눴으면 좋겠습니다. 이번엔 제가 명인대로 가죠.”
“언제든 연락 주세요. 오늘 좋은 말씀 감사했습니다.”
두 사람이 반갑게 악수를 했다.
문리대 건물을 나서자 홀가분한 기분이 들었다. 뿌린 만큼 거둔다는 말에 의미를 다시 한번 새기며 명인대로 돌아왔다.
그로부터 일주일 뒤.
모두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