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9. 과거의 그림자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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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9. 과거의 그림자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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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9. 과거의 그림자 (1)
2021.05.24.
다음 날, 이수빈은 들뜬 마음으로 아침 일찍 지도교수를 찾아갔다.
그녀의 지도교수는 설예라. 작년에 임용된 젊은 여교수였다. 명인대 국문과 내에서 단 한 명뿐인 여교수이기도 했다.
명인대에서 현대소설을 전공했고, 2012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에서 평론부문에 당선되었다. 비평론을 담당하고 있다.
설예라 교수는 마침 화분에 물을 주고 있었다.
머리를 한 갈래로 묶었는데, 흘러내린 몇 가닥의 머리카락이 뺨에 닿아 청초해 보였다.
“일찍 나왔네?”
“쌤. 저 논문계획서 좀 봐주세요.”
“아침부터 웬 논문계획서야?”
이수빈은 생글생글 웃으며 책상에 앉았다. 무슨 바람이 분 걸까. 설예라 교수는 물뿌리개를 내려놓고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이수빈은 딱히 지도하지 않아도 알아서 성장하는 타입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적극적으로 도움을 청하고 있으니 궁금했다.
“석사 논문계획서라면 얼마 전에 본 기억이 나는데. 수정한 거니?”
“아뇨. 새롭게 다른 걸 써보려고요.”
“새롭게라면, 학회에?”
“네.”
“너무 이르잖아. 너 이제 석사 2학기 되는데. 논문은 박사 들어간 다음에 내는 게 좋아. 아이디어 잘 모아 뒀다가.”
“알아요. 그래도…….”
교수 임용 때 중요한 변수로 작용하는 것이 바로 연구업적이었다.
대학마다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업적으로 쳐주는 것은 최근 3년 이내에 쓴 논문이다. 지금부터 논문을 발표하는 것보다 임용 준비를 할 때 발표하는 것이 훨씬 이익인 것이다.
설예라 교수가 지적하는 것은 바로 그 부분이었다.
“이번만 쓰고 말 거 아니잖아요. 앞으로도 부지런히 쓸 거예요.”
“하여튼 너도 참…….”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친하기도 했다. 엄격하기로 소문난 명인대에서 ‘쌤’이라는 호칭을 아무에게나 쓸 수 있는 건 아니다.
설예라 교수가 서른세 살이니 세대 차이가 거의 없는 것도 어느 정도 영향이 있었다.
“어디 보자.”
설예라 교수가 연구계획서를 검토하기 시작했다. 애써 자신의 라인으로 끌어들인 보람이 있었다. 연구계획서는 그녀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음, 괜찮네. 약간 걱정되는 부분이 있긴 한데, 초고를 보고 수정하는 게 좋겠다. 이대로 해봐. 일단.”
“그리고 또.”
“또?”
“평론도 가르쳐 주세요. 등단하고 싶어요.”
설예라 교수는 미소를 지었다.
공부에 빠지다 보면 이런 순간이 찾아온다. 자신의 역량에 비해 목표와 기대치가 높아지는 시점이.
수빈의 능력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녀의 재능이 일찍 소모되는 게 아닌가 걱정이 들었다. 공부는 말 그대로 평생에 걸쳐서 하는 거니까.
“그건 안 돼. 하나만 해. 평론은 박사 들어가고 나서 하자.”
“그래도 전…….”
“이수빈. 공부는 100미터 달리기가 아니야. 마라톤이지. 페이스를 조절하지 않으면 목표에 도달할 수 없어. 왜 전력 질주를 하려고 해? 결승점은 아직 산 너머에 있는데.”
수빈은 꿍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설예라 교수가 틀린 말을 한 적은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다.
“근데 무슨 일 있었어? 갑자기 열심히 하려고 하는 거 같은데. 아, 네가 평소에 열심히 하지 않았다는 말은 아니고. 뭔가 좀 다른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지고 싶지 않아서요.”
“박민우한테?”
수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리에서 일어선 설예라 교수는 다시 물뿌리개를 들었다. 언젠가 만개할 꽃을 향해 천천히 물을 뿌렸다.
“요즘 그 이야기 하는 애들이 많아졌네. 서지훈 선배 제자라고 들었는데. 후훗. 이상한 친구를 여기로 보냈어.”
하지만 설예라 교수는 웃고 있었다. 수빈은 그 미소가 무슨 의미인지 알 것 같았다.
민우라는 미약한 존재가 명인대를 조금씩 바꾸고 있었다.
아직 그 풍경이 뚜렷하게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변화는 서서히, 그리고 분명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수빈아. 기왕 할 거면 그 친구한테 지지 마. 알았지?”
“넵!”
수빈은 연구실을 나섰다. 보통이라면 307호에 들르지만, 오늘은 바로 도서관으로 걸었다.
민우처럼 하루에 세 시간만 자면서 공부를 할 수는 없다. 하지만 평소에 의미 없이 보낸 시간을 줄일 수는 있었다.
* * *
“어디에다 뒀더라? 아, 그래. 여기 있군.”
아침부터 민영환 교수가 부산을 떨었다. 오전 10시에 연구실에 출근하자마자 인쇄물 뭉치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도대체가 믿을 수가 없단 말이지!’
민영환 교수의 표정은 무척 불쾌해 보였다. 지나가던 학생들이 그에게 인사를 했지만 그는 받아주지 않았다.
그러다 애꿎은 강예진에게 불똥이 튀고야 말았다. 꾸벅 인사하고 지나가려던 그녀를 민 교수가 불러 세웠다.
“강예진! 너 왜 이제야 나와? 아홉 시 되면 커피 내리고 연구실 환기시키라고 내가 몇 번이나 말했어?”
“선생님. 저 오전에 병원 다녀온다고 어제 말씀드렸는데…….”
그제야 민 교수는 아차 싶었다. 흥분한 나머지 어제의 대화를 잠시 잊은 것이다.
하지만 민 교수는 강단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이었다. 이 정도로 당황할 리가 없다.
“그럼 아래 후배들 시켜서라도 해 놔야지. 응?”
“죄송합니다. 앞으로는 신경 쓸게요.”
“아픈 건 좀 어떠니?”
“그냥 감기라 약 먹으면 괜찮아질 거래요.”
“그래. 가봐라.”
그 길로 석사 연구실에 잠시 들른 강예진은 민우와 후배들에게 충고했다. 오늘은 될 수 있는 대로 민영환 교수 연구실에 가지 말라고.
저기압 주의보였다.
그녀가 나가자 진섭이 머리를 움켜쥐며 소파에 뒹굴었다.
“아, 망했다. 으아아아아아! 왜 하필 오늘이야!”
“왜 시끄럽게 발광이야?”
“오늘 석사 논문계획서 수정한 거 보여드리는 날인데. 야, 이거 박살각이지? 그치?”
진섭의 엄살에 민우가 피식 웃었다. 여전히 그의 시선은 랑느 박사의 책을 향해 있었다.
“진정해. 자퇴서 쓰러 갈 거면 형이 같이 가 줄게.”
“아직은 노노. 예린이 입학하는 건 보고 가야지.”
“연락은 좀 해봤어?”
“당연하지. 이번 주말에 대전행 케이티엑스를 탈 예정이다.”
“예정이 아니라 희망이겠지.”
“…….”
“근데 걔 남친 없었나? 예전에 만나던 사람 있었던 거 같은데.”
지나가듯 던져진 민우의 말에 진섭이 깜짝 놀랐다. 한참 동안 멍하니 민우를 바라보았다.
“없는 거 아니었어?”
“몰라. 나도.”
“그래서 소개해 준 거 아니었어?”
“아닌데?”
“없겠지. 없을 거야. 없어야 해…….”
진섭이 자기 최면을 거는 사이, 민 교수는 엘리베이터 앞에 서서 버튼을 신경질적으로 눌렀다.
띵동―
목적지는 인문관 5층에 있는 연구실이었다. 정확히는 프랑스 문학과 조교수 이경훈의 연구실 앞에서 걸음이 멈췄다.
그가 대강 노크를 하고 문을 열었다.
“이 선생. 바빠?”
“아이고. 아닙니다. 무슨 일로 여길 다 오셨어요?”
이경훈 교수는 꽤 젊은 사람이었는데, 싹싹해 보였다. 오래전부터 교수협의회에서 민영환 교수와 친분을 쌓았다.
“뭐 좀 하나 확인하려고. 이거 좀 봐줄 수 있나?”
“이게 뭡니까?”
하나는 프랑스어로 된 원고였고, 다른 하나는 민우가 번역한 작업물이었다.
“그 있잖아. 피에르 랑느 박사가 쓴 페이퍼인데. 초록하고 번역본이야. 제대로 되어 있는지 체크 좀 부탁하네.”
“잠시만 기다리시죠.”
이경훈 교수는 신중하게 원문과 번역본을 대조했다. 그는 프랑스에서 오랫동안 살다 온 사람이었다. 대조는 금방 끝났다.
“무슨 문제라도 있었던 겁니까?”
“제자한테 번역을 맡겼는데 10분도 안 돼서 완성본을 보내더라고. 내 어이가 없어서…… 번역기 돌린 게 아닌가 싶어서 자네한테 부탁한 거야.”
“10분이요?”
이경훈 교수가 깜짝 놀랐다. 그 모습을 본 민영환 교수가 인상을 썼다. 그러면 그렇지.
“엉망이지?”
“아뇨. 이거 완벽한데요. 현존하는 번역기로는 이 정도 수준의 결과물을 얻을 수 없습니다.”
“뭐?”
“그런데 이 정도 분량을 하는 데 10분밖에 안 걸렸다고요? 제자라고 하셨죠. 요즘 국문과엔 프랑스인 유학생도 옵니까?”
“아니, 그건 아닌데…… 됐네. 시간 빼앗아서 미안하군.”
민 교수가 자리를 뜨려 하자 이경훈 교수가 그를 잡았다. 안 그래도 민영환 교수에게 연락을 하려고 했는데 마침 잘 왔다.
“이번 달 말에 열리는 학회 있잖습니까. 랑느 박사 오는 학회요. 거기 저도 참석할 수 있겠습니까?”
“안 될 게 뭐 있나. 자네 회원이었지?”
“아뇨. 회원이 아니라서 이렇게 여쭤보는 겁니다. 안 그래도 이번에 랑느 박사가 쓴 논문을 써먹을 일이 있어서요.”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민영환 교수는 잔머리가 좋은 사람이었다. 그는 이경훈 교수를 어떻게 이용할지를 생각해내곤 참석하라고 말했다.
“대신 랑느 박사의 통역을 맡아줄 수 있겠나?”
“아, 그거야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그래? 그럼 오히려 이쪽에서 부탁해야겠군. 학회장님께는 내가 따로 말씀드리지.”
“29, 30일이었죠?”
“맞아.”
연구실 밖으로 나온 민영환 교수는 기분이 더욱 불쾌해졌다.
민우의 실책을 입증하려 했는데 오히려 그 역효과가 났다. 프랑스어 전문가인 이경훈 교수는 그의 능력을 칭찬했다.
이렇게 된다면 생각할 수 있는 건 딱 하나뿐.
‘프랑스어를 잘하는 친구한테 부탁을 한 게 분명해.’
그는 민우가 강철훈 교수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다른 전공 학생들과 어울렸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친구에게 부탁했다고 해서 잘못이 성립되는 것은 아니다. 번역하라고 했지, 본인이 하라고는 하지 않았으니까.
민 교수는 그것도 판단하지 못할 정도로 아둔한 사람은 아니었다.
‘어쨌든 결과물은 제대로 됐다는 얘기인데…….’
다시 연구실로 돌아온 민영환 교수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박사 2학기 강예진이 그의 눈치를 보며 커피를 준비했다.
위이이잉―
원두를 그라인더에 갈아 커피 메이커에 넣었다. 잠시 후 스팀 소리와 함께 진갈색 액체가 주전자에 쌓이기 시작했다.
할 일을 모두 끝낸 강예진이 꾸벅 인사했다.
“선생님. 전 연구실에 가 있을게요. 혹시 무슨 일 있으시면 불러주세요.”
“그래. 고생했다.”
강예진이 나가자 민영환 교수는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해서든 민우의 약점을 잡으려고 했는데 쉽지가 않았다.
그는 민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대생이 아니라는 이유도 있었지만, 서지훈 교수가 추천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놈이 뿌린 씨앗이 자라고 있는 느낌이란 말이지. 불쾌해!’
그래서 그는 다른 학생들보다 더욱 모질게 민우를 대했다.
하지만 민우는 보란 듯이 그것을 이겨냈다.
지난 1학기 동안 착실히 실력을 쌓았다. 중간고사가 끝난 이후부터는 수업을 주도하기 시작했고, 과제로 제출하는 페이퍼의 수준도 나쁘지 않았다.
그리고 국문과 내의 지각변동을 일으킨 바로 2차 프로포절 때의 사건.
국문과 교수들은 우스갯소리로 그 사건을 ‘서자의 난’이라고 칭했다.
‘녀석이 설마 그렇게 일을 벌일 줄은…….’
민우의 존재감은 그때 극점을 찍었다.
게다가 이번에 최민식과 함께 단행본을 출간하게 되었다. 공저라고는 해도 그 공과가 저평가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싹을 잘라낼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민영환 교수가 침음을 내며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문득 먼 옛날의 한 장면이 스치고 지나갔다. 서지훈 교수 때문에 자신이 당해야 했던 그 수모를.
쾅!
민영환 교수가 애꿎은 책상을 내리쳤다.
아무리 그래도 손만 아플 뿐, 해묵은 분노는 풀리지 않았다.
서지훈 교수와의 악연은 지금으로부터 수년 전, 어떤 학회에서부터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