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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8. 선배 노릇 (3) (48/500)


048. 선배 노릇 (3)
2021.05.21.


“망했어요. 어흑.”

대학원 전공 시험을 치르고 나온 주예린이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인문관으로 마중을 나온 민우는 쓴웃음을 지었다. 예상했던 결과였지만, 실제로 벌어지니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던 것.

“문제는 짚어 준 부분에서 좀 나왔어?”

민우가 조심스레 물었다. 주예린은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비슷하게는 나왔어요. 박영희, 김기진의 내용형식논쟁이랑 전후문학의 실존주의에 대해 묻는 게 있었고. 70년대 대중소설의 정치성에 대한 문제도 있었고. 나머지 하나는…… 에, 김승옥 소설의 여성 인물의 상징성에 대해 묻는 거였어요.”

“이런, 문제가 좀 꼬아서 나왔구나.”

하나같이 까다로운 문제들이었다. 특히 김승옥 소설의 여성 인물의 상징성에 대한 문제는, 지난 1학기 때 김태순 교수의 수업에서 다룬 것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후회감이 들었다.

‘좀 더 신경 써서 체크해 줄 걸 그랬나?’

그런다고 크게 달라질 것 같지는 않았다. 입시 문제를 예측하는 건 자신이나 진섭이나 비슷한 수준일 테니까.

“답안은 얼마나 썼는데?”

“한 장씩 꽉 채워 쓰긴 했는데 제가 무슨 소리를 했는지도 모르겠어요. 막 엉키고 뒤죽박죽된 느낌이라서. 막, 막!”

“그만.”

이대로는 울음을 터트릴 것 같아 예린의 어깨를 어루만졌다. 다독이듯이.

“결과는 나와 봐야 아는 거니까 이제 그만 생각해. 더 고민해봐야 달라지는 거 조금도 없다.”

“오빠도 그렇지만 진섭 오빠도 진짜 열심히 가르쳐 주셨는데 미안해 죽겠어요. 큰일입니다…….”

“괜찮아. 1년 정도 여유 가지고 준비해도 어려운 게 대학원 입학인데. 최선을 다했다면 된 거야. 다음 기회도 있잖아.”

주예린이 큰 눈으로 민우를 올려다보았다. 물기가 좀 서려 있는 게 억울한 모양이다.

그녀는 호승심이 강했다.

동아리 생활을 할 때도, 학과 행사에 참여할 때도 내기하는 걸 좋아했다. 자아가 강해 남에게 지는 걸 싫어했다.

그런 그녀와 4년 이상을 함께 했으니 민우는 어떤 기분인지 알 수 있었다.

“오빠는 어땠어요? 전공시험 보셨을 때 말예요.”

“나도 완전 망쳤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합격 통보를 받았지. 그러니까 벌써부터 비관적으로 생각할 필요 없어. 좀 더 기다려보자.”

“네에…….”

주예린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머릿속에서 시험에 대한 것을 쉽게 지우지 못했다.

“그래도 제 미래를 건 시험이었는데.”

미래라는 단어가 묵직하게 다가왔다.

예전이었다면 별생각 없이 위로의 말을 건넸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민우는 신중하게 할 말을 고른 다음 입을 열었다.

“야, 주예린. 네 미래는 그 정도로 보잘것없지 않아. 응? 훨씬 더 크고 아름답다고. 시험 하나로 결정될 만한 게 아니라고.”

“제 미래가요?”

“그래.”

그 한마디에 예린의 표정이 변했다. 밝아졌다. 잊고 있었던 걸 다시 떠올린 그런 모습이었다.

“인마. 넌 복 받은 거야. 입시에 대해 의논할 사람도 있잖아. 나 작년에 시험 볼 때는 물어볼 사람이 없어서 얼마나 고생한 줄 알아? 명인대 간 선배가 한 명도 없었으니.”

“그건 그래요.”

“그러니까 이제 더 이상 신경 쓰지 말자. 결과가 나온 다음에 생각하자고. 알았지?”

“넵!”

위로의 말이 효과가 있었는지 예린은 금방 회복을 했다. 어느 정도 분위기가 정리되었고, 민우가 화제를 바꿨다.

“이제 집으로 내려가나?”

“아뇨. 이따가 진섭 오빠가 술 사주신다고 했어요. 그래서 오늘은 좀 놀다가 친척 집에서 자고 내일 내려가려고요.”

“진섭이랑 술을?”

“못 들으셨어요?”

“한마디도.”

주예린이 고개를 갸웃했다.

“어라. 이상하다? 진섭 오빠가 분명 오빠한테도 얘기한다고 했는데…….”

“흠. 그랬단 말이지?”

민우는 다시 핸드폰을 확인했다. 진섭에게 딱히 연락이 온 건 없었다.

대강 어떤 시나리오인지 알 것 같았다. 둘이 마시자고 하는 건 좀 그러니까, 자기의 이름을 팔아먹은 것이리라.

‘그리고 내가 바빠서 못 나왔다고 둘러댔겠지. 하여간 한진섭 이 자식 잔머리는 알아줘야 한다니까.’

민우는 혀를 찼다. 모카 프라푸치노를 얻어먹은 게 이런 식으로 돌아올 줄은 몰랐다.

약속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오늘도 단행본에 들어갈 원고를 쓰는 걸로 시간을 보낼 생각이었다. 가끔 쉬는 시간에 수빈이 얼굴을 보면서.

민우가 고민하는 기색을 보이자 주예린이 눈을 깜빡이며 아쉬워했다.

“오빠 오늘 저녁에 약속 있어요?”

“아니. 뭐, 특별히 약속이 있는 건 아닌데 원고를 좀 써야 해서. 도서관에 가 보려고.”

“그건 내일 해도 되잖아요. 전 내일이면 대전에 내려가 있을 텐데!”

“나도 조만간 본가에 내려갈 거야. 그때 한잔하자.”

“흥. 오빠 약속은 이제 못 믿어요. 전에 상아문학회 창립제에도 온다고 했으면서 안 왔으면서.”

“그냥 간다고는 안 했다. 시간 되면 간다고 했지.”

민우가 여유 있게 대꾸하자 주예린은 입술을 앙다물었다. 곧 볼을 부풀리더니 삐친 표정을 짓는다. 민우는 골치가 아팠다.

그러다 문득 작년 겨울 전공시험을 치르고 나왔을 때가 생각났다.

시험을 망친 것 같아 혼자 포차에서 술을 마셨었는데, 그때 술 상대를 해 줄 사람이 있었다면 좋았을 거라는 기억이 난 것.

아마 주예린도 그런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게 아닐까?

“알았어. 알았다고. 갈게. 대신 난 술 조금만 마신다?”

“상관없어요! 야호!”

잠시 후 약속 시간이 되자 한진섭이 인문관에서 나왔다. 그는 잠시 멈칫했다. 없어야 할 민우가 그녀와 함께 있었으니까.

진섭은 잠시 민우를 끌고 옆쪽으로 갔다.

“이러기야?”

“뭐가.”

“눈치껏 빠져줘야지 왜 술자리에 끼려고 그래?”

“적당히 있다 빠질 거니 걱정 마셔. 시험 망쳤다는데 한 잔 정도는 같이 마셔줘야지. 선배인데.”

“쯧, 아무튼 착한 척은 다 해요.”

민우는 이수빈도 술자리에 불렀다. 저녁을 겸한 술자리라 어쩔 수 없었다.

잠시 후 이수빈이 나타나자 주예린의 큰 눈이 더욱 커졌다.

“우와, 엄청 이쁜 사람이다!”

수빈은 웃었다. 예쁘다고 하는 말에 기분이 나쁠 사람은 세상에 없다.

“안녕하세요. 이수빈이에요.”

“앗. 전 주예린입니다. 민우 오빠 대학 후배예요.”

“말씀 많이 들었어요.”

“많이요?”

주예린은 의심스러운 눈으로 민우를 바라보았다. 민우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별 얘기 안 했어. 그러고 보니 너희 둘 동갑이네. 앞으로 볼 일 많을 거 같으니 친하게 지내라.”

“그래요? 반갑다 친구야.”

“나도!”

주예린은 신이 났다.

아는 사람이 하나둘 늘어가니, 왠지 모르게 명인대 국문과에 합격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 *

민우는 저녁 9시가 되자 칼같이 일어났다. 맥주를 한 잔만 마셨기에 정신은 멀쩡했다. 원고를 쓰는 것엔 문제가 없었다.

“그럼 잘들 놀아라. 진섭이 너 같은 방향이니까 예린이 잘 챙겨 줘. 오늘 친척 집에서 잔다니까.”

“알았다.”

“예린이 넌 집에 들어가면 톡 하나 보내고.”

“넹!”

“저도 이만 일어날게요.”

수빈이 자리에서 일어서려 하자 주예린이 팔을 붙들었다.

“친구양! 좀 더 같이 마시장. 응?”

“미안해. 나도 좀 일이 있어서. 다음에 또 놀자.”

“힝. 어쩔 수 없지. 그럼 다음 기회에…… 맞다. 번호 번호! 번호 줘!”

주예린의 핸드폰에 번호를 찍어주고 나서야 술집을 나설 수 있었다.

수빈은 가볍게 한숨을 돌렸다. 주예린은 정말 말이 많은 친구였다.

“힘들었지?”

민우가 묻자 수빈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재미있었어. 말을 재치 있게 잘하더라. 부러웠어. 난 개그에 소질이 없는데.”

“원래 소설 쓰던 애였거든. 어떤 말을 하면 재미있는지를 잘 아는 녀석이지.”

“어떤 소설?”

“이것저것 많이 썼어. 장르 구분 없이. 문학 특기자로 상아대에 입학했거든.”

“문학 특기자? 그럼 보통 대학원은 문창과로 가잖아.”

“좀 그럴 일이 있었지.”

수빈은 그 뒤에 무슨 이야기가 있을지 궁금했다. 하지만 참았다. 나중에 본인에게 직접 물어보는 게 더 나을 거라고 생각했다.

“바로 집으로 갈 거지?”

“아니. 도서관요.”

버스 정류장으로 가던 민우는 도서관으로 방향을 바꿨다.

오늘 밤은 날씨가 선선했다. 방학인 데다가 늦은 밤이라 인적이 드물어 걷기 좋았다.

“잘됐으면 좋겠네.”

“뭐가?”

“예린이요.”

민우의 표정이 흐뭇해졌다. 궁합이 잘 맞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두 사람은 생각보다 빨리 가까워졌다.

“예린이가 대학원에 들어오면 분위기가 밝아질 거 같아. 오빠한테도 도움이 될 거고. 그치?”

“아무래도 그렇겠지.”

학부 후배가 대학원에 들어오면 운신의 폭이 커진다. 신입이라 도와줘야 하는 일이 많겠지만, 그만큼 역으로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

적어도 상아대 후배들이 명인대 대학원에 온다면 예전 같은 고생은 하지 않을 것이다. 민우가 그만큼 기반을 잘 쌓는 중이니까.

손을 잡고 싶은 걸 수빈이 꾹 참고 있을 무렵, 민우가 질문했다.

“자대 후배들 중에 이번에 시험 본 애들 있지?”

“있죠.”

“어땠대?”

“다들 어려웠나 봐. 답이 아니라 소설을 쓰고 나왔다고 한 애들도 있었어. 걔는 좀 공부를 안 하는 얘긴 한데, 대체적으로 잘 못 본 거 같아.”

민우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거 뚜껑 열어봐야 알겠는데? 모두 시험을 못 쳤다면 2차 전형으로 올라갈 가능성이 높아지니까.’

미래를 건 시험.

주예린의 그 한 마디가 뇌리에 강하게 남았다. 실은 작년 겨울 민우도 그런 생각을 했었다. 잘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다시금 들었다.

환한 가로등 너머로 불빛에 휩싸인 중앙도서관의 모습이 보였다. 민우가 물었다.

“그런데 왜 집에 안 가고 도서관엘 가? 늦었는데. 볼 거 있어?”

“아니. 그냥. 논문 좀 준비하려고.”

“무슨 논문?”

수빈은 잠시 뜸을 들였다. 고개를 돌려보니 그녀는 웃고 있었다.

“왠지 말야. 오빠만 계속 앞서 나가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어. 나도 뭔가 해보고 싶어졌어. 이대로라면 오빠한테 질 것 같아서.”

“지긴 뭘 져? 엄살은…… 넌 벌써 등재지에 논문 하나 실었잖아. 마음만 먹으면 논문 까짓것 뚝딱 만들어 내는 녀석이.”

“오빠는 이번에 출판도 하잖아. 큰 깨달음도 얻었고. 이대로라면 내가 뒤처지지 않을까?”

어느덧 중앙도서관 앞에 도착했다. 두 사람은 잠시 멈춰 서로를 바라보았다.

민우는 수빈의 모습 뒤로 펼쳐진 낯선 관계들을 포착했다. 동료이자 애인이면서 라이벌이라는 복잡 미묘한 관계를.

두 사람 모두 현대소설 전공이다. 언젠가는 학계에서 부딪쳐야 했다. 발표자와 토론자로 만나 목소리를 높일 수도 있었고, 교수나 연구원 자리를 놓고 경쟁할 수도 있었다.

먼 미래의 일이긴 하지만, 시간은 생각보다 빨리 지나가는 법.

‘그래도.’

민우는 긍정했다.

그녀가 라이벌이라면, 자신에겐 그것이 시련이 아니라 큰 축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좋아. 이수빈 선생. 그 도전 기꺼이 받아주지.”

“안 봐줄 거예요.”

손을 흔든 수빈은 지하 열람실로 내려갔다. 그녀의 모습이 사라지고 나서야 민우는 엘리베이터에 올라 12층을 눌렀다.

두 사람은 서로 반대 방향으로 헤어졌다.

하지만 마음의 끈은 여전히 한 곳을 향해 이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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