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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7. 선배 노릇 (2) (47/500)


047. 선배 노릇 (2)
2021.05.20.


― 선배애애!

“야. 소리 지르지 마. 귀 아프다.”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고 했던가. 전화를 건 것은 주예린이었다.

― 지금 어디세요?

“지금? 학교지. 참 너 오늘 전공시험 보지? 준비는 잘…….”

― 네! 그래서 지금 명인대에 와 있어요. 근데 여기가 어딘지 모르겠어요. 버스에서 내리긴 했는데 거기가 거기 같아요. 큰일입니다!

말을 잘라먹는 버릇은 여전했다. 민우는 혀를 찼다.

“벌써 학교에 온 거냐.”

아무래도 길을 잃은 모양이다. 명인대 캠퍼스가 굉장히 큰 탓도 있었지만, 그보다 주예린은 하늘이 내린 길치였다.

민우는 걸음을 멈추고 차분히 말했다.

“일단 진정하고. 주변에 무슨 건물 있는지 얘기해 봐.”

― 하얗고 큰 건물이 있어요.

“하얗고 큰 건물…….”

멋진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명인대에 하얗고 큰 건물 한 서른 개쯤 될걸? 그러니 한글 읽을 줄 알면 건물 이름을 얘기해 줘.”

― 아! 공학2관이라고 써져 있어요!

“공학2관?”

민우도 그곳이 어디인지 선뜻 떠오르지는 않았다. 공학계열 쪽 건물에는 아예 갈 일이 없었으니까.

마침 옆에 캠퍼스 전도(全圖)가 있었다. 민우는 재빨리 공학2관의 위치를 확인했다.

“엉뚱한 데로 갔네. 일단 건물 안에 들어가 있어. 더우니까. 내가 그쪽으로 가마.”

― 고맙습니다!

공학2관은 인문관에서 꽤 떨어져 있는 곳이었다. 걸어서 5분 이상은 가야 했다.

매미 우는 소리가 가득했다. 민우는 흐르는 땀을 닦으며 공학2관으로 향했다.

주예린은 투명한 출입문에 매미처럼 딱 달라붙어 있었다. 민우의 모습이 보이자 재빨리 문을 열고 밖으로 달려 나왔다.

“오빠아아!”

놀이동산에서 길을 잃은 아이가 부모를 발견한 듯한 그런 표정이다.

“대체 어디서 내렸길래 여기까지 온 거야?”

“버스를 잘못 탔나 봐요. 들어오는 버스가 더 있는 줄 몰랐거든요. 교문 들어와서 다른 방향으로 가더라고요. 완전 깜놀!”

“스마트폰은 놔뒀다 뭐에 쓰냐.”

“여긴 왜케 쓸데없이 커요? 울 학교는 아담해서 왔다 갔다 하기 편한데.”

“왔다 갔다 하기 편하면 상아대로 가시죠.”

햇볕이 따가웠다.

두 사람은 일단 근처에 있는 그늘로 피했다. 아름드리나무 아래 앉을 만한 곳이 있었다.

“왜 이렇게 일찍 왔어? 아직 시험까지는 시간 많이 남았는데. 네 시 아냐?”

“미리 와서 공부 좀 하려고 했죠. 오빠한테 신세도 좀 지고.”

“신세진다는 말을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거 아니냐.”

“기출문제를 보긴 했는데 뭐가 어떻게 나올지 감이 아예 안 잡혀요. 큰일입니다!”

명인대 국문과 전공시험은 굉장히 까다로운 편이다.

예린은 현대소설 전공으로 시험을 치르는데, 1910년부터 1990년대까지의 문학사를 전부 공부해야 했다.

물론 기출문제를 조교실에서 열람할 수 있긴 하지만 복사를 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에 문제를 외워야 한다. 민우도 그래서 조교실에 열 번 정도는 찾아갔었다.

주예린이 두 손으로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으으. 이러다 떨어지면 어쩌죠? 네?”

“떨어지면 다시 시험 치면 되지. 한 번에 붙을 거라고 생각하지 마. 보통 1년 잡고 준비하니까. 그래야 부담이 좀 덜 할 거다.”

“그래도 졸업하고 바로 입학하면 기분이 좋을 거 같은데.”

그녀는 이제 막 졸업했다. 코스모스 졸업이었다. 한 학기 충분히 준비하고 내년 전기 시험에 응시하라고 했지만, 워낙 고집이 세서 설득하지 못했다.

“문학사는 좀 봤어?”

“시중에 나온 책은 전부 다 읽었어요.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은 외웠구요.”

“생각보다 열심히 했네. 서지훈 선생님은 별말씀 없으셨고?”

“그냥 자신의 운을 한번 시험해 보라고 하시던데요.”

민우는 피식 웃었다. 과연 서지훈 교수다운 격려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오빠. 실은 지금 그것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있어요. 큰일입니다.”

주예린이 진지하게 운을 뗐다.

무슨 일일까? 민우가 귀를 기울이자 그녀가 돌연 울상을 지었다.

“배고파요. 힝. 아침도 못 먹었더니…….”

“야.”

“불쌍한 후배가 아침부터 한 끼도 못 먹었어요!”

한숨을 내쉰 민우는 시간을 확인했다. 오전 11시 반. 곧 점심을 먹긴 해야 할 시간이다.

마침 오늘은 수빈이 학교에 늦게 온다고 했으니 약속은 없었다. 민우는 진섭에게 점심을 따로 먹겠다고 톡을 남겼다.

“옛정을 생각하자니 버릴 수는 없고. 어쩔 수 없지. 가자.”

“야호!”

민우는 철없는 후배를 데리고 학생회관으로 움직였다.

얼마 전에 강의료가 들어와 조금 여유가 있긴 했지만 학식을 먹기로 했다. 연애를 시작하다 보니 예상외의 지출은 최대한 줄이는 게 좋았다.

땡볕에서 10분 정도를 걸었다.

외관이 근사한 유리로 되어 있는 현대식 건물이 나타나자 주예린이 입을 쩍 벌렸다.

“와, 여기가 학생회관이에요? 엄청 크다!”

“상아대도 이번에 새로 짓지 않았어?”

“그것보다도 훨씬 커요! 와, 진짜 멋있다!”

민우에게는 이제 익숙한 곳이었지만, 예린에게는 달랐던 모양이다.

‘굳이 표현하자면 동물원에 처음 온 시골소녀 같은 느낌인데.’

민우는 한숨을 내쉬며 예린의 등을 툭툭 밀어 재촉했다. 주변의 시선이 은근히 신경 쓰였다.

그렇게 두 사람은 점심을 먹고 다음 행선지를 고민했다. 시험에 대한 얘기를 해야 했는데, 도서관에 들어갈 수가 없어 카페로 가기로 했다.

커피값이 아깝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문득 민우는 좋은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오빠랑 친한 동기 하나 있는데 불러도 되나? 그 친구한테도 들을 게 많을 거야. 걔도 타학교 출신이거든.”

“좋아요!”

예린은 사교적인 사람이었다. 다른 사람과 어울리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은 아니었다.

민우는 진섭에게 전화를 걸었고, 그는 5분도 되지 않아 인문관 지하에 있는 카페로 뛰어왔다.

“안녕하십니까. 한진섭입니다. 듣던 대로 미인이시네요.”

진섭은 어울리지 않게 정중을 떨었다. 민우는 속으로 웃음을 참으며 주예린을 소개했다. 같은 동아리 후배이자 아끼는 동생이라고.

두 사람이 다시 인사를 교환했고, 민우가 덧붙여 말했다.

“예린이는 라떼 좋아하니까 아이스로 한 잔 시키고 나는 모카 프라푸치노로 부탁한다.”

“오케이!”

자연스럽게 계산이 진섭에게 넘어갔다. 작전에 성공한 민우는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주예린은 맞은편에 앉았다.

“서류는 잘 냈어?”

“그럼요. 사진도 예쁘게 찍어서 잘 붙여서 넣었죠. 근데 원서비가 넘 비싸더라고요. 진짜 대학들 돈 좀 만지겠어요.”

“어딜 가나 다 똑같지 뭐. 근데 TEPM은 몇 점 나왔냐? 저번에 갱신한다고 했잖아.”

“810점이요.”

“학점은?”

“4.4!”

“너 은근 공부 좀 했구나? 맨날 최철호랑 놀러 다니는 거 같더니만.”

서류만 놓고 봤을 때 민우보다 훨씬 나았다. 민우는 TEPM 701점에 학점은 4.2였으니까.

그렇다면 남은 것은 이제 전공시험이다. 전공시험만 무사히 치르면 1차 전형은 충분히 합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예린이는 낯가림도 없고 활발한 성격이니까 면접까지만 가면 어떻게든 될 거 같은데.’

때마침 진섭이 음료를 들고 합석했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와, 케이크까지! 잘 먹을게요. 오빠 센스 짱이다.”

“내 베프가 아끼는 후배인데 이 정도 대접은 해야지.”

과연 진섭이었다. 시키지도 않은 치즈케이크까지 준비하는 성의를 보였다.

성격이 비슷해서일까. 진섭과 예린은 금방 가까워졌다. 민우가 모카 프라푸치노를 채 절반도 마시기 전에 두 사람은 말을 텄다.

그러다 보니 민우는 굳이 자신이 이곳에 있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잘됐다. 섭이한테 뒤를 맡겨도 되겠는데? 10분만 더 앉아 있다가 일어나야지.’

그렇게 생각한 민우는 본론으로 들어갔다. 아무리 그래도 기출문제 정도는 짚어 주고 가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예상 문제 정리해 놓은 것 좀 줘봐.”

“넵.”

예린이 가방에서 프린트를 꺼냈다. 공부를 많이 했는지 메모가 한가득 채워져 있었다.

나올 만한 기출문제 스무 개와 그 모범답안이 잘 정리되어 있었다. 민우는 진섭과 함께 문제를 쭉 훑었다.

“나쁘지 않네.”

“그러게.”

두 오라버니가 인정하자 예린의 표정이 뿌듯해졌다.

“엣헴. 근데 문제는 어떤 식으로 나오는 거예요?”

“학부 전공 시험이랑 비슷해. 큰 문제 너덧 개 정도 나오고 그중 세 개 골라서 쓰는 거야. 문제 하나당 답안지 양면으로 한 장 이상 써야 한다.”

“으아! 양면으로 한 장이요? 단면이 아니라?”

“그래. 양면으로. 내용은 책에 나와 있는 대로 쓰되 네 생각을 조금 덧붙이는 형식으로 하면 될 거다. 너무 자기 견해를 드러내지 마. 안 좋아하시니까.”

민우는 펜을 꺼내 나올 만한 문제에 체크를 했다.

“먼저 애국계몽기 신소설에 대해서 봐야 하고. 특히 전통 계승여부에 대한 쟁점 위주로 체크해. 그리고 카프(KAPF)문학, 30년대 농민 소설, 50년대 전후소설, 60년대 대표작가들…… 그리고 70년대 대중문학사를 집중해서 보면 된다. 80년대 이후는 안 나올 거야 아마.”

“넵.”

민우는 명인대 국문과 교수들의 관심분야를 모두 알고 있었다. 그 부분을 집중해서 본다면 적중률이 높다고 생각했다.

다 됐다고 생각한 민우는 기출문제 프린트를 진섭에게 건넸다.

“너 오후 스케줄 없지?”

“어. 그렇지.”

“그럼 예린이 좀 부탁한다. 주예린. 나머지는 이 친구가 잘 가르쳐 줄 거야. 모르는 거 있으면 피라냐처럼 집요하게 물어뜯어.”

“벌써 가시려고요?”

“벌써라니? 누구 때문에 예정에도 없는 한 시간 반을 소비했는데.”

“와, 대박 매정하다. 소비래. 소비!”

“낭비라고 표현하지 않은 걸 감사하게 생각해라.”

민우가 가방을 챙기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눈짓으로 진섭에게 잘 부탁한다는 신호를 보냈다. 그는 문제없다는 표정으로 엄지를 척 세웠다.

* * *

도서관으로 돌아온 민우는 정보검색실에서 피에르 랑느 박사의 이력을 검색해 보았다.

소르본 대학의 교수였고, 문학 및 예술사조 전반에 대한 책을 많이 펴낸 사람이었다.

‘외국의 저명한 학자들은 문학만 하는 게 아니라 예술사조도 같이 하는 경향이 있구나. 확실히 폭넓은 시야를 갖는 게 중요하긴 해.’

그런 생각을 하며 민우는 랑느 박사의 저서가 도서관에 있는지 확인해 보았다. 원서 한 권이 비치되어 있었다. 정식 번역된 도서는 없었다.

서가로 가서 그의 저서를 찾은 민우는 늘 앉던 자리로 돌아와 가벼운 마음으로 책을 열었다.

안경 너머로 새로운 세계가 펼쳐졌다.

‘정말 학식이 풍부한 사람이구나. 프랑스어를 할 줄만 알면 학회 때 말 좀 섞어보겠는데 아깝네.’

안경의 한계였다.

읽고 쓰는 것에는 도움을 주지만, 듣는 것까지는 어떻게 해 주지 못했다.

‘영어로 한번 대화를 시도해 봐야겠다. 보통 학회 나오는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영어는 하니까.’

학회 전까지 이 책을 다 보기로 하고, 민우는 공부할 것들을 꺼냈다.

그때 누군가 어깨를 툭툭 건드리며 옆에 앉았다. 이수빈이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싶었는데, 그녀는 할 말이 있는지 바깥을 가리켰다.

민우는 수빈과 휴게실로 내려왔다. 그때 민우는 가벼운 현기증을 느끼곤 몸을 비틀거렸다.

“오빠?”

“어? 아니. 괜찮아. 발을 잘못 디뎠어.”

민우는 멋쩍게 웃었다.

현기증은 오래 지나지 않아 사라졌다. 요즘 들어 어지럼증을 가끔 느꼈다. 안색도 예전에 비해 좀 나빠져 있었다.

“그 인문학 강의 동영상 있잖아. 다 봤는데 정말 잘하더라. 유익했어. 이거 인터넷에 한번 올려보는 게 어때?”

“무투브 같은 데 말이지?”

“응응.”

민우는 고민했다.

사실 그러고 싶은 마음이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자신이 좋은 강의를 했는지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나한테 권한이 없어. 구청 쪽에서 하는 사업이라 그쪽 허가를 받아야 할 거야.”

“그럼 전화 한번 해봐요. 어차피 계약한 것도 아니라서 법적인 구속력도 없을 거 같은데.”

“알았어. 나중에 해 볼게.”

“진짜 이 명강의를 아홉 명 밖에 안 들었다는 게 너무 아까워서 그래.”

“네 눈에 뭐가 쓰인 건 아니고?”

“그런가?”

민우는 웃으며 수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지금은 단행본 출간에 올인을 해야 할 때였다. 민우는 기지개를 켜며 일어섰다. 이제 2차전을 치르러 가야 할 시간이었다.

“슬슬 가볼까?”

한편 그 시각, 주예린은 인문관에서 자신의 미래를 건 시험을 치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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