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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6. 선배 노릇 (1) (46/500)


046. 선배 노릇 (1)
2021.05.17.


7월 중순.

민우는 도서관과 지음사 인문사회연구소를 오가며 단행본 출간 작업에 집중했다.

책에 들어갈 수많은 작품을 읽고 분석하며 하루하루 성장해 나갔다.

결과물이 생길 때마다 최민식에게 검사를 받았고, 혼나기도 많이 혼나면서 논문 쓰기에 대해 차츰 감을 잡아가는 중이다.

지금도 민우는 박사 연구실에 앉아 최민식에게 피드백을 받고 있었다.

“너는 문장에 잡다한 성분이 많아. 여길 봐. 여기. 응? 지나치게 수식어가 많이 들어갔잖아.”

“그러네요.”

“담백하고 깔끔하게 쓰는 게 좋다. 문장이 짧을수록 이해하기 쉬우니까.”

민식이 불필요한 문장성분을 펜으로 찍찍 그었다. 가차 없었다.

국문과 석사들의 흔한 실수였다.

논문을 쓰다 보면 그럴듯해 보이기 위해 어려운 용어를 습관적으로 쓰게 되는데, 민식은 바로 그 부분을 지적한 것이다.

“어려운 용어를 쓰는 건 좋은데 제대로 알고 쓰는 게 중요하지.”

“네.”

“그리고 이 부분. 핍진이라는 표현을 썼잖아. 이게 소설 주인공의 물질적인 가난을 뜻하는 건지, 아니면 구조주의자들이 말하는 핍진성인지 헷갈릴 수 있다는 생각은 안 드냐?”

“그러네요.”

“그러네요라는 말을 대체 몇 번이나 하는 거야? 앵무새냐?”

“죄송합니다.”

앵무새라는 말에 두 사람이 피식 웃었다. 잠시 분위기가 환기되었고, 민식은 다시 설명을 시작했다.

“아무튼, 그럴 땐 각주를 달거나 원어를 써 주면 돼. 이렇게.”

“넵.”

민우는 기죽지 않고 민식의 말을 새겨들었다. 필요한 건 메모를 했다.

그래도 민식의 지적이 날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었다. 오늘도 몇 개 나오지 않았다.

민우가 가져온 페이퍼를 죽 훑어본 민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처음보단 좀 늘었네.”

“정말요?”

“하지만 이 정도 수준으로는 책에 못 실어. 조금 더 신중하게 써 봐. 일곱 살 먹은 꼬맹이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잘 다듬고. 알았냐?”

“넵! 알겠습니다.”

일곱 살 먹은 꼬맹이.

비유적인 표현이긴 하지만 참 어려운 문제라고 생각했다. 어려운 개념을 쉽게 풀어쓰기 위해서는 그 이상의 지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머릿속에 있는 걸 쉽게 풀어써 줄 수 있는 물건이 있으면 참 좋겠는데.’

망상에 사로잡히던 민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욕심이 지나치면 화를 입는 법이지. 꿈 깨자.’

그때 문이 열리고 강예진이 들어왔다.

“어? 민우 여기 있었네. 어쩐지 307호에 없더라니. 민 선생님이 찾으신다. 시간 날 때 한번 가봐.”

“지금 바로 가겠습니다.”

민우는 가방을 들고 박사 연구실을 나섰다.

그런데 마침 인문관 3층 복도에 송현우 교수가 지나가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송현우 교수가 민우를 알아보고 걸음을 멈췄다. 박사 논문 프로포절 이후로 이렇게 마주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자네. 박민우였지? 이름이.”

“예. 맞습니다.”

송현우 교수가 의미 모를 미소를 지었다.

“요즘 자네 이야기가 심심찮게 들려오더군. 듣기로 서지훈 선생 제자였다고 하던데.”

“맞습니다. 학부는 상아대를 나와서 서지훈 선생님께 배웠습니다.”

“그래. 좋은 선생 밑에서 배웠군.”

이상했다. 뭔가 벽을 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민우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이번에 민식 군과 같이 단행본을 낸다지?”

“예. 그렇게 됐습니다.”

“제목이 뭔가?”

“제목은 신화와 인간이고, 부제는 소설의 신화적 상상력입니다.”

“그렇군. 열심히 해 봐.”

송현우 교수는 상투적인 격려를 남기고 갈 길을 갔다. 왠지 느낌이 서늘했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민영환 교수 연구실을 노크했다.

“선생님. 민우입니다.”

“잠깐만 기다려라.”

민영환 교수는 바쁘게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었다. 민우는 자리에 앉아 20분을 기다려서야 그와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이번 달 말에 학회 있는 거 알고 있지?”

“예.”

현대문학연구학회.

민영환 교수가 연구 이사로 들어가 있는 학회였다. 이번 달 말, 그러니까 7월 29일과 30일 양일간 학술회가 열린다.

“춘식이가 사정상 휴학을 했으니 네가 좀 고생을 해야겠다. 그날 비워 놔라.”

“알겠습니다.”

이미 민우는 그 두 날의 스케줄을 모두 비워 놨다. 혹시라도 민영환 교수의 호출이 있을까 봐.

“그런데 학회에서 어떤 일을 하면 됩니까?”

“그냥 행사 진행한다고 생각하면 돼. 먹거리 준비하고 인쇄물 체크하고. 자세한 건 예진이한테 들어.”

“예.”

민우는 벌써부터 기대가 됐다. 학회는 한 번도 참석해 본 적이 없었는데, 이번 기회에 제대로 경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무튼, 그건 중요한 게 아니고. 크흠, 너 제2외국어 시험 프랑스어로 쳤지?”

“아뇨. 독일어입니다.”

“뭐?”

민영환 교수는 당황했다. 그러더니 몇 올 남지 않은 머리를 긁적였다.

민 교수가 자신에게 얼마나 관심이 없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었다. 실망스러웠지만, 민우는 표정에 드러내지 않았다.

“이런 이런. 내가 착각을 했나.”

“무슨 일이신데요?”

“아니, 그게. 뭐 번역을 좀 할 게 있는데. 그게 프랑스어로 되어 있어서.”

“학부 때 프랑스어도 공부를 좀 했었는데요. 번역 정도는 할 수 있습니다.”

“그래?”

민영환 교수가 책상으로 가서 종이 한 장을 가지고 다시 돌아왔다. 프랑스어로 가득한 인쇄물이었다.

“이거 할 수 있는지 한번 봐라.”

“예. 잠시만요.”

민우는 가방에서 안경을 꺼냈다. 막힘없이 술술 읽혔다. 프랑스 문학에 관한 내용이었는데 일부분이라 정확히 어떤 글인지 알 수는 없었다.

민우가 자신 있게 말했다.

“할 수 있습니다.”

“좋아. 그럼 번역 좀 네가 맡아라. 파일은 메일로 보내주마. 거기에 메일 주소 적어서 줘.”

민우는 재빨리 메일 주소를 적어 민영환 교수에게 건넸다. 예전의 민우라면 얌전히 돌아갔겠지만, 지금은 다르다.

“그런데 이게 뭔지 여쭤봐도 될까요?”

민우가 당당히 물었다.

민영환 교수는 민우를 빤히 바라보더니 선심 쓰듯 대답을 해 주었다.

“이번 학술대회에 초청 인사가 오는데. 프랑스 소르본에 있는 피에르 랑느 박사. 그 사람이 이번에 발표자로 참여한다. 그거 초록이다.”

“피에르 랑느 박사요?”

민우는 어디선가 들은 기억이 났다.

순간 떠오르는 게 있었다. 일전에 강철훈 교수의 번역 프로젝트를 할 때 정연주의 입에서 몇 번 이름이 나온 사람이었다.

그만큼 꽤 명망이 있는 사람이라는 얘기다.

“요약본이라 뭐 그리 중요한 건 아니지만, 어쨌든 인쇄물에 들어가는 거니 실수 없게 해라.”

“빈틈없이 하겠습니다.”

민우는 꾸벅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랑느 박사. 어떤 사람일까?’

민우는 이따 도서관에 가서 그의 저술을 검색해 읽어보기로 했다.

307호로 들어갔는데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민우는 노트북을 켜고 이메일을 열었다. 민영환 교수가 보낸 파일이 들어와 있었다.

워드를 실행시키고 번역에 들어갔다.

몇 페이지 되지 않았기 때문에 작업은 10분도 걸리지 않았다.

민우는 노트북을 끄려다가 문득 재미있는 생각을 떠올리고는 다시 마우스를 잡았다. 양해도 구하지 않고 멋대로 일을 시키는 민 교수를 놀려주고 싶었다.

‘바로 보내면 깜짝 놀라시겠지?’

민우는 번역본을 바로 민 교수의 메일로 보냈다. 그는 아웃룩을 쓰고, 지금 컴퓨터 앞에 앉아 있으니 메일을 바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바로 민 교수에게 전화가 왔다.

― 야, 너 제대로 하라니까 번역기 돌렸냐? 왜 이렇게 빨리 했어?

“제대로 했습니다. 어렵지 않아서 바로 했는데요. 무슨 문제라도 있었습니까?”

― 어? 아니, 그게…….

민우의 대답에 민 교수는 말을 머뭇거렸다. 쉽다고 할 줄은 몰랐다. 그러더니 한번 확인해 보겠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확인해 볼 수 있었다면 나한테 시키지도 않았겠지.’

아마 민영환 교수 성격이라면 인맥을 동원해서라도 번역을 다시 한번 체크할 것이다.

‘오히려 그렇게 되면 나한텐 이득이야.’

전문가가 확인을 해 준다면, 민 교수는 민우의 실력을 인정할 수밖에 없어질 것이다. 민우가 노리는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노트북을 정리한 민우는 가방을 열어 플래너를 집었다. 얼마 전 수빈이 선물로 준 것이었다.

그것을 펼쳐 스케줄 부분을 확인했다. 29, 30일엔 아무것도 없었다.

‘현대문학연구학회 학술대회.’

그렇게 적은 민우는 플래너를 편 김에 스케줄을 전체적으로 한번 정리하기로 했다.

학회 이야기를 해서인지, 민우는 자신의 커리어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됐다.

‘아무래도 학회 활동은 단행본 출간 이후부터 하는 게 좋겠지? 제대로 배운 다음에 논문을 고쳐 쓰는 게 훨씬 나을 테니까.’

단행본 작업을 마치고 나면 얼마나 성장해 있을까. 기분 좋은 상상이 펼쳐졌다.

최근 단행본 작업을 하며 최민식에게 논문 작성법과 작품 분석 방법 등을 배우고 있었다. 틈틈이 이재환에게도 도움을 받는 중이다.

그때 떠오르는 한 사람.

‘민영환 선생님께도 가끔은 여쭤봐야지. 선배들하고만 어울리면 쓴소리를 하실 게 분명하니까.’

가능하면 민영환 교수에게는 석사 논문에 대한 질문만 하기로 했다. 자신의 아이디어가 담긴 새로운 논문은 보여주고 싶지가 않았다.

그렇게 민우는 계속 스케줄을 조정했다. 만년필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3개월 뒤면 단행본 출간이고…… 2학기가 끝나고 나서야 학회 발표 준비를 할 수 있겠네.’

박사과정에 들어온 이후부터 학회 활동을 시작하는 게 일반적이지만 민우는 더 빨리 움직이기로 했다.

최대한 실적을 올리는 게 좋다고 판단한 것이다.

무엇보다도 박사과정 입학 때 연구 실적이 있다면 가산점을 받을 수 있어 유리했다.

‘박사과정은 자대생 위주로 뽑으니까 나를 뽑을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드는 게 좋아.’

박사과정 입학은 석사 때보다 더욱 까다롭다. 여러 조건을 따지는 것은 당연하고 선발 인원이 한 자릿수에 불과하다.

운이 없으면 자대생도 다음 학기로 입학을 미뤄야 하는 경우가 생기기도 한다. 입학정원이 그때마다 바뀌기 때문이다.

그때 307호의 문이 열렸다.

“혼자 뭐 해?”

진섭이 들어왔다. 민우는 플래너를 덮고 만년필을 가방에 넣었다.

“이제 도서관 가보려고. 어디 갔다 왔냐?”

“과외.”

“용케 구했네. 요즘 국어논술 자리 별로 없는 거 같던데. 다들 영어, 수학만 하잖아.”

“친척이야. 그게 아니면 하늘의 별 따기지. 학원 쪽으로는 다시 가고 싶지 않아서 알음알음하다 겨우 얻어걸렸어.”

약한 척은 다 해도 진섭은 나름 인서울 출신이었다. 송파 쪽에서 학원 강사로도 꽤 일을 해왔다고 들었다.

그래서 그가 술만 마시면 대학원을 포기하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한 것이기도 했다. 돌아갈 곳이 있으니 비교적 선택하기가 쉬운 것이다.

하지만 민우는 달랐다.

대학원을 그만둔다면, 아니, 그만둔다는 상상조차 해보질 않았다.

진섭이 가방을 던지고 옆자리에 앉았다.

“오늘 그 후배 만났어?”

“후배?”

민우는 뒤늦게 그 말의 의미를 깨달았다.

“아. 오늘 전공 시험이구나.”

오늘은 대학원 입학시험이 있는 날이다. 명인대 대학원 국문과에 입학하기 위해서는 전공시험과 면접, 제2외국어 시험을 모두 통과해야 했다.

시험을 치르지 않는 학과도 꽤 있지만, 명인대 인문대는 모두 전공 시험을 쳤다.

진섭이 두 눈을 반짝였다. 여자 이야기만 하면, 그는 늘 이렇게 눈을 빛내곤 했다.

“이따 시험 끝나고 같이 저녁이나 먹는 건 어때? 이쁘다면서.”

“너보다 이쁘다고 했지 그냥 이쁘다곤 안 했다.”

“사진 좀.”

“공부에 집중하십쇼. 한 선생님.”

“새끼 치사하게. 넌 왜 동업자 정신이 없냐. 같은 솔로끼리.”

“나 솔로 아니…….”

“뭐?”

“아니, 그게. 솔로 아니고 싶다고.”

하마터면 수빈과의 관계를 실토할 뻔했다.

진섭의 여자 타령은 이제 지긋지긋했다. 하루빨리 소개팅을 주선해주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하며 민우는 307호를 나섰다.

‘국문과 전공시험이 오후 4시였던가.’

시계를 확인했다. 지금이 오전 11시니까, 약 5시간 뒤면 시험이 시작된다.

‘준비 많이 했으려나? 시험이 쉽지는 않을 텐데.’

민우는 얼마 전 주예린과 했던 대화를 떠올렸다. 진학에 대해서 신중하게 생각을 해보라고 했는데, 그녀는 결국 명인대를 택했다.

민우의 활약 덕에 타대생들에 대한 선입견이 많이 줄어들었다고는 해도 명인대는 명인대다. 멘탈이 강하지 않으면 버티기가 어렵다.

‘그래도 녀석이 선택한 길이니까 응원해 줘야지.’

그렇게 도서관으로 가는 도중, 전화가 한 통 걸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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