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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5. 첫 강의 (2) (45/500)


045. 첫 강의 (2)
2021.05.14.


쉬는 시간에도 민우는 강의실을 나가지 못했다. 학생들이 이것저것 물어왔기 때문이다.

“잠깐, 잠깐만! 한 사람씩 질문을 받을게요.”

학생들의 말문이 트였다. 민우가 다른 선생들과는 다르다는 걸 인지한 것이다.

학교라는 틀에 갇혀 있던 학생들에겐 민우의 강의가 신선할 수밖에 없었다. 강의 자체가 알기 쉬워 재미를 붙일 수 있었다.

‘쉬는 게 쉬는 게 아니구만. 잠깐이라도 멍 때리고 싶은데.’

휴식이 필요했던 민우에게는 난감한 상황.

그래도 보람은 있었다. 아이들이 생각과 이성이라는 개념에 대해 막연하게나마 이해했다는 것에 작은 성취를 느꼈다.

강의가 통했던 것은 그가 학생들의 눈높이를 제대로 맞췄기 때문이었다.

그는 강의에서 소크라테스의 문답법을 응용했는데, 질문과 답변이라는 상호작용을 통해 학생들이 스스로 깨달을 수 있게 했다.

만약 송승현 실장이 <소크라테스의 변명>을 권하지 않았더라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질문에 대해 답변을 하다 보니 쉬는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다시 수업이 진행되었고, 한 시간이 더 지나자 준비된 강의가 모두 끝났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요. 아쉽지만 제가 준비한 수업은 여기까지입니다. 어땠습니까. 모두 도움이 됐나요?”

“네!”

아이들이 무엇을 배웠느냐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들의 표정에서 긍정이 싹텄다는 것을 확인한 민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성공이다. 이 정도면 충분해.’

지식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을 보듬어줄 수 있는 강의.

그것이 민우가 추구하고자 했던 것이고, 학생들은 이번 강의를 통해 그 실마리를 얻을 수 있었다. 표정에서 알 수 있었다.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더 질문할 내용이 있으면 메일 주고요. 남은 주말 잘 보내요.”

“감사합니다.”

학생들이 하나둘 강의실을 떠나기 시작했다.

그때 피부가 까만 학생이 강단으로 슬그머니 다가왔다. 오늘 가장 수업을 열심히 들었던 김민덕이었다.

“쌤. 저, 그게…… 쌤처럼 말을 잘하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되나요?”

동남아시아계 혼혈인 것 같은데 한국어가 유창했다. 그 모습이 조금 신기했다. 하지만 민우는 티내지 않고 자연스레 질문을 받았다.

“지금도 충분히 잘하는 거 같은데?”

“뭔가 학교에서 발표 같은 걸 잘 못 하겠어요. 질문하는 것도 왠지 부끄럽고.”

민우는 어떤 기분인지 바로 이해했다. 자신도 학창시절 그런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친구의 경우는 얘기가 조금 다르다. 피부색이 달라서 오는 편견과 맞서야 했다.

“말을 잘하려면, 우선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를 정확히 알아야 해. 정확하게 알기 위해서는 생각하는 힘을 길러야 하고.”

“생각을 잘한다고 해서 말이 입으로 술술 나오는 건 아니잖아요.”

“물론 연습도 필요하지. 이건 비밀인데, 나도 오늘 수업을 하려고 스무 시간 넘게 연습을 했어. 이번이 첫 강의였거든.”

“정말요?”

“그래. 너만 알고 있어. 알았지?”

김민덕은 깜짝 놀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민우가 워낙 강의를 잘해 원래부터 잘하는 걸로 알았던 것이다.

민우가 김민덕의 어깨를 다독였다.

“노력이 없이 얻을 수 있는 건 많지 않아. 집에 가서 내가 한 이야기를 잘 생각해 봐. 숙제야.”

“예, 쌤. 감사합니다.”

김민덕이 꾸벅 인사를 하고 강의실을 나갔다. 왠지 서울에 도착할 때면, 녀석이 남긴 메일이 메일함에 와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민우가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보았다.

‘드디어 끝났다…….’

바닥에 누워 대자로 뻗고 싶을 정도로 피로감을 느꼈다. 하지만 그 전에, 한 가지 해결해야 하는 문제가 있었다.

‘내가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중반부터는 준비한 대로 하지 않고 즉흥적으로 강의를 풀어 나갔다. 학생들의 질문에 대답하는 형식으로 수업이 이루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도 막힘이 없었다. 얼버무리지도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믿기지 않을 정도의 기지가 발휘되기도 했다.

마치 평생을 강단에서 보낸 사람이 빙의하기라도 한 것 같은 느낌.

‘아무리 봐도 이건 내 능력이 아니야.’

자연스레 민우는 안주머니를 뒤졌다. 루카치의 만년필이 고풍스러운 빛을 내고 있었다.

‘년필아. 이것도 네 힘이냐?’

민우는 피식 웃었다.

허탈한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지만, 민우는 이번 수업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우게 됐다. 강의하는 방법에 대해서.

안경도, 만년필도 그랬다. 특별한 능력을 지니고 있어도 그 능력을 잘 활용하지 않으면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없다.

노력이 바탕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이다.

그때 인기척이 들리자 만년필을 다시 넣고 고개를 들었다. 김유신 주무관이 다가오고 있었다.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다른 직원들은 영상 촬영 장비를 해체하고 있었다. 이번 강의는 사진뿐만 아니라 영상물로 기록이 된다고 들었다.

“주무관님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애들 모으기 힘드셨을 텐데.”

“아닙니다. 제가 해야 할 일인걸요. 그나저나 정말 명강의였습니다! 감동적이네요. 제 아들놈도 와서 들으라고 할 걸 후회됩니다.”

“과찬이십니다. 그런데 아, 힘드네요. 이거.”

다리가 후들거렸다. 뒤늦게 긴장이 풀린 것이다. 민우는 교탁에 몸을 기댔다.

“일단 좀 앉으시죠. 제가 마실 걸 좀 준비해 오겠습니다.”

“부탁드립니다.”

민우는 앞자리에 있는 의자에 앉아 휴식을 취했다.

잠시 후, 다시 돌아온 김유신 주무관이 마실 것과 USB를 건넸다.

“강의 영상본과 사진들을 담았습니다. USB는 강의 기념으로 드리는 거니 그냥 가져가시면 됩니다.”

“마침 필요했는데 잘됐네요. 감사합니다.”

민우는 집으로 돌아가는 즉시 강의 영상자료를 분석할 생각이었다.

강의는 경험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기술도 중요하다. 무의식중에 발휘된 기술을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영상파일이 인터넷에 공개가 되나요?”

“아직 거기까지는 확정되지 않았습니다. 절차가 좀 있어서 내부 논의를 거쳐야 할 거 같습니다.”

“그런가요.”

민우는 자신의 강의 동영상이 무투브에 올라가면 어떨까 하고 생각했다. 인기 여부를 떠나 많은 학생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민우는 USB를 만지작거렸다.

‘언젠간 쓸 데가 있겠지.’

그때 김유신 주무관이 조심스레 제안했다.

“박 선생님. 가능하다면 다음 프로그램에도 초청하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다음이라면 언제가 될까요?”

“일단은 겨울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생각보다 이번 프로그램의 평가가 좋아서, 장기 프로젝트로 추진하려고 합니다.”

“한 번만 강의하는 거죠?”

“예.”

민우는 고민 없이 하겠다고 답했다. 한 번 정도는 본가에 들르는 겸에 하면 부담이 전혀 없었다.

“터미널까지 모셔다 드릴까요?”

“아뇨. 본가에 들러야 해서요. 버스타고 바로 가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한 10분 의자에 앉아 휴식을 취한 민우는 가방을 들고 구청을 나섰다.

근 한 달 만에 본가를 찾은 민우는 의외의 인물과 만났다. 누나 박민아가 후줄근한 티셔츠를 입은 채 라면을 먹고 있었다.

“뭐야. 온다는 말 없었잖아.”

“너한테 일일이 보고하고 다녀야 되니?”

“맛있겠네.”

누나의 구박보다도 탱글탱글한 면발에 시선이 쏠렸다. 배에서 신호가 왔다. 생각해보니 점심도 거르고 강의를 했다.

“한 입만.”

“점심 안 먹었어?”

“응.”

“아이구. 우리 불쌍한 동생님. 그럼 내가 대신 더 맛있게 먹을게.”

과연 대악마였다. 민우에게는 한 젓가락도 허락하지 않았다.

민우는 방으로 돌아와 옷을 갈아입고 간단히 씻었다. 방으로 돌아오니 컴퓨터가 켜져 있었다. USB를 슬롯에 꽂았다.

폴더를 여니 동영상 파일 하나와 사진이 여러 장 들어 있었다.

민우는 먼저 사진부터 확인했다. 전문가가 찍은 것이 아니라 구도가 좀 엉성하긴 했어도 볼만은 했다.

‘제일 잘 나온 한 장은 수빈이한테 보내고.’

핸드폰으로 사진을 옮겨 톡으로 보냈다. 과외 중인 모양인지 숫자 1이 사라지지 않았다

민우는 동영상 파일을 더블클릭했다. 편집이 되어 있지 않아 준비하는 장면까지 모두 담겨 있었다.

‘나중에 앞부분은 잘라내는 게 좋겠네.’

베개를 끌어안고 조용히 감상을 시작하는 민우.

그때 문이 벌컥 열렸다.

“야동 보냐?”

“대낮부터 뭔 헛소리야. 라면이 상했나.”

“나와.”

무슨 일인가 싶어 거실로 나가보니 김이 모락모락 나는 라면이 끓여 있었다. 계란과 대파까지 들어가 있어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돌았다.

김치에 밑반찬까지. 딱 봐도 정성이 들어간 한 상이었다.

“밥 좀 잘 챙겨 먹고 다녀라. 니가 그러니까 평생 여친이 없지.”

“있는데?”

방으로 돌아가려던 민아가 멈칫했다. 순간 그녀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무슨 개수작이야?”

“그러고 보니 깜빡하고 누나한테 얘기 안 했구나. 얼마 전에 수빈이랑 사귀기로 했어. 그러니까 이제 솔로 아님.”

“수빈이도 대학원 생활이 힘들긴 힘든가 보구나. 인생 최대의 실수를 하다니…….”

“잘 먹겠습니다!”

민아는 혀를 차며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무서운 속도로 라면을 해치운 민우는 설거지한 다음 누나의 방문을 열었다.

베개가 날아왔다. 민우는 이미 예상하고 있어 가볍게 피했다.

“아 이 새끼가 진짜 노크하라니까!”

“누나.”

민우는 흰 봉투를 내밀었다.

얼마 전 인문사회팀원들에게 선물로 받은 백화점 상품권이 든 봉투였다. 민우는 거기에 10만 원권 하나를 더 추가했다.

“이거 출간 기념으로 선물 받은 건데 누나 써. 난 쓸 일이 없어서.”

“뭔데?”

“백화점 상품권.”

봉투를 열어본 민아가 깜짝 놀랐다. 장난인 줄 알았는데 진짜 백화점 상품권이 들어 있었다.

“너 진짜 책을 내긴 내나 보구나.”

“당연하지.”

겉으로는 툴툴거려도 민아는 동생이 자랑스러웠다. 하루하루 성장하는 게 눈에 보이니 어찌 예쁘지 않을 수 있을까.

“이건 내일 엄마랑 같이 백화점 나가서 옷 한 벌 사는 걸로 하고. 좀 이르긴 하지만 소맥 한잔 어때?”

“좋지.”

두 남매는 집 근처에 있는 단골 술집으로 향했다. 예전에 이직 문제를 이야기했던 그 허름한 호프집이었다. 여전히 손님은 없었다.

민우는 능숙한 솜씨로 소맥을 말았다. 그것을 본 민아는 회사에서 쓸데없는 것만 배워 온다고 구박했다. 하지만 맛있게 마셨다.

민우가 오징어를 씹으며 물었다.

“뭔 일이야? 누나가 먼저 술을 마시자고 하고.”

“좋은 소식이 있단다. 아가야. 쨔잔!”

민아가 핸드폰을 내밀었다. 문자 메시지가 하나 떠 있었는데, 뭔가의 합격 통보였다.

“이직 성공!”

자세히 보니 선우기획이라는 기업에서 온 합격 통보 메시지였다.

“뭐야. 어떻게 된 거야?”

“헤드헌팅 기업 통해서 취직이 됐어. 좀 힘든 게 많았는데 운이 통했지. 경영지원팀으로 가게 됐어. 업무도 비슷해.”

“잘됐다. 속 시원하게 사표 던지고 나올 수 있겠네 이제.”

“그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다!”

민아가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보는 민우가 속이 다 시원해질 정도였다.

“근데 선우기획은 뭐 하는 회사야?”

“생긴 지는 오래 안 됐는데, 대한그룹 쪽 자회사야. 작지만 내실 있는 기업이지.”

“대한그룹?”

문득 민우는 떠오르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정연주. 최근에 우연히 마주쳤을 때 행복해 보이지 않는 표정이 마음에 걸렸다.

그녀는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 생각은 오래가지 않았다.

“어쨌든 잘됐네. 축하해 누나.”

“좀 손발이 오그라들긴 하지만 할 말은 해야지. 고맙다 동생아. 영어 가르쳐 줘서.”

이번 이직에 가장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던 것이 바로 TEPM 점수였다.

“뭐 내가 한 거 있나. 누나가 열심히 한 거지.”

“그러는 의미에서 축하주 니가 쏴라.”

“하, 누나가 아니라 양아치네.”

그러면서도 두 남매는 깔깔거리며 웃었다. 손님 하나 없는 호프집이 두 사람의 목소리로 활기를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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