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4. 첫 강의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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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4. 첫 강의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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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4. 첫 강의 (1)
2021.05.13.
자리에 앉은 민우는 핸드폰을 꺼냈다. 버스에 타면 연락하라는 수빈의 말이 떠오른 것이다.
― 지금 버스에 탔어
기다리고 있었는지 숫자 1이 바로 없어졌다. 읽었다는 표시다. 강의 잘하고 오라는 격려의 답장이 왔다.
민우는 핸드폰을 집어넣으려다 사진첩에서 수빈의 사진을 열었다.
행운의 여신.
핸드폰 배경화면으로 지정해 두고 싶은 사진이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연애를 하는 것은 학교에 비밀로 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 본 버스는 대전행 버스입니다. 곧 출발하오니 승객 여러분들께서는 안전벨트를 착용해 주세요.
정시가 되자 버스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민우는 편하게 앉아 눈을 붙였다. 하지만 눈을 감아도 잠이 오지 않았다.
‘나 지금 긴장하고 있는 거야?’
가슴이 두근거렸다. 묘한 고양감이 뇌리를 자극하고 있었다.
오늘 민우는 대전 동구청에서 주관하는 인문학 프로그램의 강사로 나선다. 그래서 오랜만에 정장을 입고 있었던 것이다.
‘준비는 잘한 거 같은데. 아무래도 처음이라 그런 건가…… 자료 좀 더 볼까?’
민우는 가방에서 프레젠테이션 인쇄본을 꺼냈다. 두툼했다.
총 44개의 슬라이드로 구성된 강의안이었는데, 슬라이드마다 빼곡하게 필기가 되어 있었다.
물론 이제는 안 봐도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외워둔 상황이지만, 막상 강단에 서면 머릿속이 하얗게 될 것 같아서 적어놓은 것이다.
연습은 충분히 했다. 하지만 실전은 다르다.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하는 강의지만 민우는 쉽게 생각하지 않았다. ‘시간을 버렸다’는 생각이 들게 하고 싶진 않았다.
‘어른이든 애들이든 누구에게나 시간은 소중한 거니까.’
민우는 인쇄본을 넘기며 머릿속에서 다시 강의를 연습했다.
강의 주제는 ‘인문학이란 무엇인가’였다.
민우의 커리어를 생각한다면 거창한 제목이었다. 어떤 이는 콧방귀를 뀔지도 모른다. 석사 1학기 주제에 무슨 얘길 하는 거냐고.
‘하지만 나는 다르지.’
약간의 운이 따르긴 했지만 그는 인문학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할 시간을 가졌고, 또 나름대로 해답을 얻었다.
문제는 그것을 어떻게 학생들에게 보여줄까 하는 것이었다.
‘쉽진 않겠지만 그 방법이라면 잘 먹힐 거야.’
민우는 지금까지 공부하면서 느낀 것에 대해 솔직하게 말하기로 했다.
대부분, 학생들이 그렇듯, 그도 놀기 좋아하는 평범한 사람 중 하나였다.
학부 1학년 때는 성적이 거의 바닥이었다. 2학년부터 정신 차리고 복구하지 않았더라면 명인대 입학은 물 건너갔을 정도였다.
그러다 보니 강의를 청소년 눈높이에 맞추는 것도 크게 어렵지 않았다.
과거로 돌아가서, 평범했던 자기가 어떻게 공부를 하게 됐는지를 시작으로 인문학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보여줄 생각이었다.
한 편의 소설처럼 말이다.
‘으아. 안 되겠다. 이따 내려서 약국에서 청심환 하나 사 먹어야지.’
그렇게 생각한 민우는 버스가 멈춰 설 때까지 쉬지 않고 이미지 트레이닝을 했다.
두 시간이 흐르고 버스가 멈춰 섰다.
대전복합터미널에 내려선 민우는 김유신 주무관에게 전화했다.
그와 주차장 입구에서 만나기로 했다. 마중을 나와 있는 모양이다.
일단 민우는 약국에서 액체로 된 청심환을 사서 마셨다. 고체로 된 걸 사서 먹었다가 고생을 했다는 이재환의 충고를 떠올린 것이다.
민우는 바로 주차장으로 향했다.
입구에 통통한 체구에 안경을 낀 사람이 서 있었는데, 키가 무척이나 컸다.
민우가 다가가 말을 걸었다.
“김유신 주무관님이신가요?”
“아, 예. 박민우 선생님이시죠? 반갑습니다.”
두 사람은 가볍게 악수를 했다. 김유신 주무관은 자신의 명함을 공손히 건넸다. 민우는 두 손으로 받아 지갑에 넣었다.
김유신 주무관이 앞장을 섰다.
“차로 모시겠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예. 감사합니다.”
강의 40분 전, 민우는 구청에 도착했다. 느릿느릿 오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여유가 느껴졌다.
“잠깐 서류에 서명해 주셔야 할 것도 있고, 일단 사무실로 가시죠.”
“예.”
민우는 문화공보과 사무실로 안내받았다.
잠시 후 김유신 주무관이 서류를 두 장 주었는데, 민우는 하나에 서명하고 다른 하나에 계좌정보를 적었다.
김유신 주무관이 종이를 챙기며 싱긋 웃었다.
“감사합니다. 강의료는 다음 주 중으로 입금될 겁니다. 더 궁금하신 점은 없으시고요?”
“학생이 20명 내외라고 했는데, 정확히 몇 명이나 참가하죠?”
“그게 말입니다. 음…… 요 며칠 지켜봤는데 수강생이 많지 않더군요. 아무래도 주말이고 하니까요.”
민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오늘같이 날씨 좋은 날에는 수업을 듣는 것보다 친구들과 어울려 밖으로 돌아다니는 게 더 나을 수도 있었다.
“강의실에 미리 가서 좀 준비를 해도 괜찮을까요?”
“물론이죠. 이쪽으로 오시죠.”
민우는 한 층 아래로 내려가 소회의실로 들어갔다.
아직 학생들은 한 명도 오지 않았고, 직원 두 명이 마이크와 빔프로젝터를 설치하고 있었다.
“노트북은 직접 가져오셨습니까?”
“제 걸로 쓸게요.”
민우는 노트북을 꺼내 빔프로젝터에 연결했다. 미리 준비한 프레젠터의 전원을 켜고 레이저포인터가 잘 작동되는지 확인했다.
마이크와 컴퓨터엔 모두 이상이 없었다. 내심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시설이 좋았다.
“괜찮은 거 같네요. 이대로 기다렸다가 학생들 오면 시작하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선생님.”
민우는 웃으며 고개를 숙였지만, 얼굴엔 긴장한 빛이 역력했다.
곧 학생들이 하나둘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피부색이 조금 다른 학생도 있었지만 민우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때 문득 떠오르는 생각.
‘맞다. 부적 챙겨야지.’
민우는 가방에서 만년필을 꺼내 안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힘든 고비를 맞을 때마다 도움이 되었던 물건이었다.
어두컴컴한 주머니 속에서 푸른빛이 번쩍였다.
순간 긴장이 싹 사라졌다. 마음이 든든해졌다. 민우는 청심환의 효력이 이제야 나타나는가 싶었다.
“안녕하세요. 오늘 강의를 하게 된 박민우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민우가 꾸벅 인사하자 학생들이 손뼉을 쳤다.
참가한 학생들은 총 아홉 명이었다. 많은 수는 아니지만 그래도 부담이 됐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민우는 사적인 대화로 시작했다.
“여기 온 사람들은 다들 학생일 텐데. 고등학생 손 들어봐요. 좋아요. 다음은 중학생.”
고등학생이 여섯 명이었고, 나머지가 중학생이었다. 거기엔 올해 수능을 쳐야 하는 학생도 있었다.
“저 몇 살처럼 보여요?”
“대학생이요.”
“25살?”
“와, 오늘 똑똑한 친구들이 많이 왔네. 제가 좀 동안이긴 하죠.”
모두가 웃었다. 뒤에서 강의를 촬영하고 있던 김유신 주무관까지 웃을 정도였으니 이 정도면 충분했다.
민우가 본론으로 들어갔다.
“오늘은 인문학이 무엇인가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좀 재미없는 주제가 될 수도 있겠는데요. 하하하. 벌써 하품하는 친구들이 있네.”
민우가 농담을 던지자 하품을 하던 한 학생이 화들짝 입을 가렸다.
“아무튼, 여러분들이 흥미를 가질 만한 이야깃거리를 많이 가져왔으니 끝까지 재미있게 들어 주세요. 아 참, 그 전에.”
민우가 칠판 앞에 섰다. 그리고 자신의 이메일 주소를 적었다.
“여기 제 이름하고 이메일 주소 보이시죠? 강의가 끝난 이후에도 궁금한 게 있다면 이쪽으로 메일 보내세요.”
학생들이 수첩에 민우의 이메일 주소를 적기 시작했다.
단발성 강의이지만, 민우는 이번 한 번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특강을 들을 때마다 그런 생각을 했다.
질의응답 시간은 부족하다. 강사와 좀 더 이야기하고 싶은데 편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하는.
게다가 이번 프로그램은 소외계층 청소년들에게 꿈과 희망을 준다는 취지로 만들어졌다.
만약 이 중에 학문에 뜻이 있는 학생이 있다면 최대한 도와주고 싶은 게 민우의 마음이었다. 지식을 나눠주는 것에 돈이 드는 것은 아니니까.
그래서 그가 칠판에 자신의 이메일 주소를 적은 것이다.
“인문학이라고 하니까 뭔가 어렵죠?”
“네.”
민우는 ‘인문학’이라는 단어를 칠판에 적고 그 옆에 사람을 하나 그려 넣었다. 그사이에 같다는 기호가 들어갔다.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인문학은 그냥 사람이라고 생각합시다. 사람에 대한 것이라고.”
대답이 시원치 않았다.
민우는 진행하기 전에 한 가지 문제를 해결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다들 얼어있네. 우리 하나 약속을 할까요? 오늘 이 자리에서 누가 어떤 얘기를 하든지 비웃지 않는 걸로. 손을 든 사람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걸로.”
“네.”
“어떤 이야기든지 좋습니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생각나면 잽싸게 손을 드세요. 손을 많이 든 학생한테는 선물을 줄게요.”
분위기가 조금씩 풀렸다.
민우의 젊은 나이가 생각보다 큰 변수로 작용했다. 그는 학생들이 주로 사용하는 은어들을 섞어 쓰며 친근감을 높였다.
“인문학이 무엇인지 알아보기 전에 먼저 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해볼까요? 인간이 무엇인지, 또 어떤 존재인지는 옛날부터 많은 사람들이 고민을 해 왔어요.”
민우가 프레젠터를 조작했다. 화면이 넘어가며 유명한 철학자들의 사진이 출력되었다.
민우는 알기 쉽게 그들이 어떤 생각을 했고, 또 어떤 말을 남겼는지 설명을 해 주었다.
특히 민우는 비사(祕史)에 신경을 많이 썼다. 일반적으로 잘 알려진 이야기보다는 그 뒷이야기에 흥미를 보이는 법이니까.
역사의 흐름에 따라 설명을 하는 것만으로도 30분이 훌쩍 지났다.
“결국, 이 사람들이 하고 싶었던 말은, 인간이 어떻게 하면 인간다울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시간이 흐르면 세상은 바뀌고, 우리들이 살아가는 환경도 계속 바뀌니까요. 음, 조금 교과서에 나올 법한 얘기처럼 들리죠?”
민우가 맨 앞에 있는 학생을 지목했다. 이번 강의에서 가장 집중력이 좋은 남학생이었다.
“학생 이름이 뭐죠?”
“김민덕입니다.”
“좋아요. 민덕 학생. 하나만 물을게요. 학생은 지금 자기가 인간답게 살고 있다고 생각하나요?”
김민덕은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민우가 대신 대답했다. 하지만 민우는 그의 이야기가 아닌, 자신의 이야기를 했다.
“저는 여러분들 나이 때 무척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급식비도 나라에서 지원을 받았고 문제집은 선생님들께 빌려서 썼지요. 매일 밤 10시까지 학교에 붙잡혀 있어야 했고 성적이 안 좋으면 맞아야 했어요. 그때는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리 행복하지는 않았던 거 같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민우가 칠판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생각의 힘’이라는 글자를 적었다. 그리고 펜 끝으로 툭툭 건드렸다.
“내가 지금 어느 위치에 있고, 또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아는 게 중요하다는 겁니다. 그걸 알기 위해서는 많은 것을 보고 끊임없이 생각해야 해요.”
“생각을 잘하려면 교과서 같은 어려운 책을 많이 읽어야 하나요?”
어떤 여학생이 손을 들고 질문했다. 예상했던 질문이었다. 민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굳이 책에 의존할 필요는 없습니다. 요즘은 좋은 영상물들도 많이 나오고 있어요. 다큐멘터리나 TED같은 것들이요. 여러분들 세대는 책보다는 멀티미디어에 친숙하니까 다양하게 보는 게 좋습니다.”
민우가 몇 가지 볼만한 다큐멘터리를 정리해 주었고, 학생들이 그것을 받아 적었다.
“결국, 어떤 주제에 대해서 여러 가지 관점으로 바라보는 게 중요합니다. 한번 실습을 해볼까요. 학생은 왜 여기에 왔죠?”
“책 읽는 걸 좋아하는 데 강의가 도움이 될 거 같아서요.”
“어떤 책을 주로 읽나요?”
“만화책을 많이 보고 요즘은 인소도 읽어요.”
“재미있는 만화책을 보면 기분이 어때요?”
“재미……있죠?”
뻔한 대답에 학생들이 웃었다. 민우도 웃으며 계속 물었다.
“그 재미가 학생에게 어떤 영향을 주나요?”
“스트레스가 확 풀려요.”
“스트레스가 풀리면 다른 일도 잘할 수 있겠네요?”
“네.”
“그렇다면 그 만화책은 유익한 것이네요.”
“그렇죠. 하지만 선생님들은 못 보게 하시지만.”
“왜 선생님들이 못 보게 할까요?”
“공부에 안 좋다고 말씀하시니까요.”
“이상한데요. 조금 전엔 유익하다고 했는데, 선생님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군요. 왜 그런 차이가 생기는 걸까요?”
민우의 질문에 학생이 입을 닫았다. 뭔가 생각이 많아 보이는 표정으로. 하지만 애초에 대답을 기대하고 한 질문은 아니었다.
민우가 모든 학생에게 말했다.
“이런 식으로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 보세요. 답은 여러 가지여도 상관없습니다. 생각하는 법은 사람마다 다르거든요.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생각하는 힘이 늘어날 겁니다.”
몇몇 학생들이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민우가 잠깐 시계를 확인했다. 한 시간이 흘렀다. 잠시 휴식을 할 때였다.
“생각이 하나씩 모여 차곡차곡 쌓이게 되면 그게 여러분들의 ‘이성’이 됩니다. 그리고 그걸 말로, 혹은 글로 조리 있게 풀어내는 사람을 우리는 ‘지성인’이라 부릅니다. 대학 나왔다고 지성인 소리 듣는 건 옛말입니다. 학교를 나오지 않아도 훌륭한 지성인들은 어디에나 있는 법이거든요. 그게 여러분이 될 수도 있고.”
민우가 프레젠테이션을 종료하니 화면이 까매졌다. 하지만 학생들의 표정은 처음보다 훨씬 밝아져 있었다.
“잠시 10분 정도 쉬었다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