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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3. 이상과 현실 (2) (43/500)


043. 이상과 현실 (2)
2021.05.10.


인문사회연구소 연구실로 돌아온 민우는 편하게 앉아 미팅 때 메모한 것들을 다시 한번 살펴보았다.

유익한 미팅이었다.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었다. 전남규 차장의 조언은 적절했다. 확실히 지금까지는 기준 없이 손닿는 대로 포스팅을 하고 있었다.

‘선택과 집중을 할 시기이긴 해. 너무 대중없이 분야를 넓혀놨어.’

일단 민우는 영미문학 분야의 저널을 읽으며 기초자료를 업로드하기로 결정했다.

조너던 캠벨의 이론과 관련 저널을 요약해서 올리면 적당할 것 같았다. 단행본 작업을 하며 읽고 있는 것들이니 부담은 별로 없었다.

‘문제는 카테고리인데. 영미문학을 어떤 기준으로 나눠야 하지? 문학사 정리하듯 시기가 적당할 거 같긴 한데…… 좀 더 생각해 봐야겠다.’

민우는 블로그에 접속해 게시물을 확인했다.

최근에는 헤겔, 니체, 괴테 등 독일의 저명한 문인들에 관한 포스팅을 하고 있었다. 덕분에 이제 독일어는 완전히 마스터했다.

이제 목표로 했던 5개 국어 중 두 개를 마스터했다. 다음은 일본어 차례였다. 민우는 메이지 시대 문학부터 읽기로 했다.

무엇보다도 민우에게 큰 즐거움이었던 것은 번역본을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그는 추리소설을 좋아했고, 특히 히가시노 게이고의 팬이기도 했다.

‘이번 기회에 번역 안 된 것들 모조리 사서 읽어야지. 비용처리 하면 되니까.’

인문사회연구소 소속이었기 때문에 연 200만 원 한도 내에서 어떠한 도서든지 구입할 수 있었다. 만화책을 사도 관계없었다.

영수증을 확인해 보니 아직 100만 원가량 여유가 있었다.

민우는 마우스를 움직였다.

새로운 댓글과 방명록 게시물이 있었다. 민우는 댓글부터 확인했다.

― 불펌빌런: 퍼가요~♡

― ㅇㅇ: 잘 읽었습니다. 요즘 헤겔의 <역사철학강의>를 읽고 있는데요. 혹시 여기에 관한 다른 자료를 소개해 주실 수 없을까요?

― 유진32: 지나가던 인문학도입니다. 정말 유익한 블로그네요. 이웃신청 받아주세요 ㅎㅎ

민우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댓글이 달린다는 것은 생각보다 기분 좋은 일이었다.

민우는 답변을 할 수 있는 댓글에 먼저 답댓글을 달아주고, 헤겔을 언급한 댓글은 보류했다.

<역사철학강의>는 민우도 어렵게 읽은 책이었다. 안경의 힘을 빌리긴 했지만, 입문서를 읽고 난 이후에서야 온전히 자신의 머릿속에 담을 수 있었다.

민우는 고민했다.

‘아예 답댓글을 안 달면 좀 그러니까, 일단 시간이 나는 대로 관련 저널을 포스팅하겠다고 하는 게 좋겠다. 과제가 하나 늘었네.’

민우가 키보드를 두드렸다. 댓글을 단 후 마우스를 움직여 방명록을 확인했다.

게시물이 두 개 올라와 있었는데, 하나는 업체 광고라 지웠고 나머지 하나는 장문의 게시물이었다. 첫 줄을 읽은 민우의 눈이 빛났다.

― 성좌: 반갑습니다. 저는 한일대학교 영문과 박진영입니다.

민우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한일대학교?’

국내 대학 중 Top 3를 꼽을 때 두 번째로 들어가는 대학이다. 명인대, 한일대, 세민대. 이 세 학교가 국내에서 명문으로 꼽혔다.

특히 명인대와 한일대는 라이벌 관계이기도 했다. 전체적인 평가는 명인대가 우수했지만, 이공계 분야에서는 한일대가 조금 우위다.

민우는 흥미롭게 다음 내용을 읽었다.

― 성좌: 포스팅을 보니 최근에 발표된 저널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주인장님 덕분에 기초자료로 활용할 만한 것들을 몇 가지 건졌습니다.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혹시 대학에 계신 분이신지요? 시간이 허락된다면 주인장님과 한번 뵙고 차라도 한잔하고 싶습니다. 제 연락처는…….

박진영은 자신의 전화번호와 이메일 주소를 남겼다. 민우는 잠시 고민하다 핸드폰에 그의 전화번호를 저장했다.

‘학부생은 아닌 것 같고. 대학원생인가? 아니면 교수?’

한번 확인해 볼 필요가 있었다.

민우는 바로 한일대학교 홈페이지로 들어갔다. 그리고 영문과 페이지로 넘어가 교수진을 확인했다.

박진영이라는 이름이 보였다.

이메일이 일치하는 것을 보니 그 사람이 맞는 것 같았다.

‘조교수네.’

문자를 하나 보내려다가,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민우는 통화 버튼을 눌렀다.

― 네, 박진영입니다.

“안녕하세요. 교수님. 블로그 방명록에 남겨주신 글 보고 연락드립니다. 별사탕입니다.”

― 아? 별사탕 님이라고요? 반갑습니다. 이렇게 일찍 연락을 주실 줄은 몰랐네요. 하하하. 정말 반갑습니다.

목소리를 들어보니 그렇게 나이가 들어 보이지는 않았다. 직급이 조교수라면, 일반적으로 30대 중후반일 것이다.

안정감 있는 중저음이 매력적인 남자였다. 하지만 수업을 들으면 좀 졸리지 않을까. 그런 느낌이 드는 목소리였다.

― 실례지만 어디 대학에 계신지요?

“명인대에서 석사과정 중입니다.”

― 석사요?

“예. 이제 1학기 끝내고 2학기 들어갑니다.”

― 이거 의외네요. 내공이 심상치 않아서 박사급이실 줄 알았는데…… 흐음, 그럼 비교문학 쪽 전공하고 계신 겁니까?

“아뇨. 국문학 전공입니다.”

― 국문학이요?

박진영 교수가 두 번 놀랐다. 비교문학 전공이라면 이해를 하겠는데, 국문학 전공자가 해외 저널 자료를 올릴 줄은 몰랐던 것이다.

“식견을 넓히려고 다양한 분야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카테고리를 보셨으니 아시겠지만, 인문학 관련이라면 모두 다루고 있어요.”

― 그러셨군요…… 이거 전화로 이야기할 만한 일은 아닌 거 같은데. 시간 괜찮으시면 한번 학교로 들러 주시죠. 저는 수요일하고 금요일에 늘 연구실에 있습니다.

“교수님. 스케줄 확인하고 다시 연락드려도 괜찮을까요?”

― 물론이죠.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민우는 일단 전화를 끊었다.

일정 캘린더를 보니 다음 주까지는 좀 어려울 것 같고, 다다음 주 금요일이 괜찮을 것 같았다.

민우는 바로 문자로 약속을 잡았다.

‘새로운 인연이 시작되려는 건가? 블로그 하길 잘했다.’

민우가 막연한 기대감에 휩싸일 무렵, 노크 소리가 들렸다.

주인공은 장철호였다.

“민우. 잠깐 시간 괜찮아?”

“어.”

그런데 장철호의 표정이 별로 좋아 보이지 않았다. 그가 간이 의자를 끌어다가 민우의 옆자리에 앉았다.

“너 블로그 건으로 우리 회사랑 계약한다고 했었잖아.”

“그렇지. 아직 계약은 하지 않았지만.”

“오픈 라이브러리가 기본 조건이라고 했었지?”

민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장철호도 민우의 블로그를 자주 방문하는 회원 중 하나였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계약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됐다.

팔짱을 낀 철호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거 우연히 들은 건데…… 지음사 오픈 라이브러리 있잖아. 이거 없어질지도 모른다더라.”

민우의 미간이 찡그려졌다.

“없어진다고?”

“수익성이 없다고 경영진에서 사업 철수까지 생각하고 있나 봐. 아까 콘텐츠개발팀에 놀러 갔다가 우연히 들었다.”

“그래?”

민우는 입을 꾹 다물었다. 하지만 그게 다였다. 딱히 별다른 반응은 없었다.

“생각보다 데미지가 없네?”

“아, 그게. 너무 일이 쉽게 풀린다는 생각이 들긴 했어. 그리고 아직 계약 전이잖아. 계약서에 사인하기 전까지는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게 당연하지.”

장철호가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할 거냐?”

“별수 있나? 지켜봐야지. 난 지음사가 아니어도 딱히 상관은 없어. 처음부터 그럴 생각으로 블로그 만든 건 아니니까.”

“그렇다면 다행이고.”

“것보다 송 실장님이 걱정이네.”

“왜?”

철호가 물었고, 민우는 즉시 답을 하지 않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많은 일이 있었다.

“나 말고도 다른 사람들 섭외하신다고 들었거든. 오픈 라이브러리를 중심으로 뭔가 크게 해보시려는 것 같았는데. 그거 엎어지면 실장님 프로젝트도 공중분해 되는 거잖아.”

“그렇지.”

“내 일도 아니고 내가 어찌할 수도 없는 일이긴 한데…… 좀 신경 쓰이긴 한다.”

민우는 그녀에게 빚진 게 있었다. 하지만 엄밀히 따져 지음사의 직원도 아니었기에 어떻게 힘을 줄 만한 방법이 없었다.

민우의 생각이 깊어질 무렵, 전화가 왔다.

이수빈이었다.

민우는 하던 일을 대강 정리하고 지음사 1층 로비로 내려갔다.

* * *

정은아 대리가 추천해 준 등갈비집은 기대 이상이었다. 약간의 과장을 보태면, 수빈이 한 입 먹을 때마다 맛있다는 말을 할 정도였다.

“다음에 또 오자. 치즈 진짜 맛있었어. 쭉쭉 늘어나는 게. 그치?”

“그러자.”

식사를 마치고 민우가 계산하려고 영수증을 들었는데, 수빈이 날름 빼앗았다.

“내가 살게. 오늘 과외비 받았지롱.”

“미리 좀 말하지 그랬어? 그럼 더 비싼 거 먹으러 갔을 텐데.”

“그럴 줄 알고 얘기 안 한 거야.”

수빈은 카운터로 가 계산했다.

과외비를 받았다는 것은 사실 거짓말이었다. 수빈은 민우가 어렵게 공부를 하는 걸 알고 있었고, 그에게 부담을 주기 싫었다.

“이제 어디 가지?”

“북카페 갈까? 좀 읽어야 할 게 있는데…… 아, 미안해. 나 인문학 강의하는 거 있잖아. 그거 준비 좀 해야 해서.”

“그래요. 그럼.”

두 사람은 가끔 카페에서 서로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집중력이 떨어질 때면 잡담을 나누고 다시 책을 읽는 식이다.

공부는 해야 하는데 보고는 싶고, 그러다가 선택하게 된 방법이었다.

민우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잔을 주문하고 사원증으로 계산했다. 지음사 직원은 하루에 석 잔까지 공짜로 마실 수 있었다.

‘응? 어디 간 거야?’

커피를 받아 든 민우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수빈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한쪽 구석에 놓인 서가를 거닐며 읽을 만한 걸 고르고 있었다. 민우는 먼저 자리를 잡고 가방에서 프린트를 꺼냈다.

잠시 후 수빈이 책을 골라왔다. 요네자와 호노부의 <빙과>라는 책이었다.

“이거 예전에 오빠가 읽어 보라고 했던 책이지?”

“맞아. 마일드한 추리소설인데, 독특해. 사람이 죽지 않는 유일한 추리소설이라고 할까.”

수빈은 고개를 끄덕이며 책을 펼쳤다. 이미 민우는 프린트에 집중하고 있었다.

하지만 수빈은 책에 집중하지 못했다. 힐끔힐끔 민우를 바라보더니 꿍한 표정을 짓는다.

언젠가 한 번은 10분 동안 빤히 민우를 바라보기만 했었다. 하지만 그는 단 한 번도 자신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책만 손에 잡으면 민우는 말 그대로 다른 사람이 되었다.

그래도 수빈은 긍정했다. 그것도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의 일부분이니까.

“오빠.”

민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눈빛은 심해를 담고 있었다.

몸을 비비 꼰 수빈이 턱을 괴고 엎드렸다. 그리고 빤히 민우를 올려다보았다. 옆에 앉을까 생각도 했지만 그러진 못했다.

“오빠아아아.”

참다못한 이수빈이 팔을 휘적거렸다.

“어?”

“인문학 강의 다음 주지?”

민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준비는 얼마나 했어? 그거 슬라이드 인쇄한 거야?”

“응.”

“나 좀 볼래.”

민우는 웃으며 프린트를 건넸다. 그것을 받아 든 수빈은 꼼꼼히 살펴보았다.

메모가 빼곡하게 채워져 있다. 강의 내용에 관한 메모는 물론, 시선 처리며 목소리 톤은 어떻게 할 것인지까지 다 전부 적혀 있었다.

수빈은 감탄했다.

겉으로 보면 좀 허술한 면이 없잖아 있는 사람인데 이렇게 세세한 곳까지 신경을 쓰고 있었다니.

수빈이 맨 위에 있는 강의 주제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면 그렇지. 그런 생각에 미소를 짓는다.

“주제가 좀 무거운 거 아냐?”

“쉽게 풀어 봐야지. 어려운 걸 쉽게 풀어내는 게 진짜 실력이라고 배웠다.”

묻지 않아도 누가 가르쳐줬는지 이제는 안다. 민영환 교수는 그런 걸 가르쳐주는 위인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서지훈 교수겠지.

“나도 들으러 갈래. 오빠의 기념비적인 첫 강의인데 내가 안 들을 수 없지.”

“그러지 마. 나중에 똑같은 일 당하고 싶지 않으면. 나도 너 첫 강의 때 맨 앞에 앉아서 막 이상한 질문 할 거야.”

“이러기야?”

민우는 피식 웃으며 프린트를 다시 받았고, 두 사람은 각자의 독서에 집중했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났다.

7월 9일 토요일. 민우는 대전으로 향하는 고속버스에 몸을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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