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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 이상과 현실 (1) (42/500)


042. 이상과 현실 (1)
2021.05.07.


민우는 뜀박질을 멈췄다. 조금만 빨리 달렸어도 차에 치일 뻔했다.

‘뭔 운전을 이따위로 하는 거야?’

차가 인문관으로 이어진 계단 앞을 가로막고 멈춰선 것이다.

곧 운전기사가 내렸다.

민우는 뭐라 한소리를 하려고 했는데 그는 뒷좌석으로 뛰어 문을 열었다.

검은색 레이스 원피스에 흰 재킷을 걸친 여자가 차에서 내렸다. 그녀는 얌전한 걸음으로 인문관으로 이어진 계단을 올랐다.

그 모습을 본 민우는 깜짝 놀랐다.

“정연주?”

그 소리에 계단을 오르던 여자가 멈칫하며 고개를 돌렸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아무 표정도 없던 연주의 얼굴에 미소가 걸렸다. 무채색 그림에 색깔이 들어간 것 같은 극적인 변화였다.

“오랜만이에요. 오빠. 잘 지내셨어요?”

“어, 그래…….”

민우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랐다.

눈앞에 있는 여자는 확실히 프랑스 문학과 석사 3학기 정연주가 맞았다.

근데 분위기가 기억 속에 있던 그녀의 것과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수수하고 내성적인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근사한 의복에 장신구까지 하고 있었다. 화장도 평소보다 진했다.

‘마치 다른 사람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다.’

무엇보다도 그 모습은 연주의 본 모습과 어울리지 않았다. 잘 맞지 않은 옷을 입혀놓은 사람처럼 부자연스러웠다.

민우가 보기에 그녀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배경은 책으로 둘러싸인 연구실이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민우는 생각했다. 재벌 3세의 인생은 생각보다 행복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 다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다른 사람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연주는 그래 보였다.

질문 하나가 목까지 차올랐다.

‘넌 너의 인생을 살고 있는 거야?’

그때 연주가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러세요?”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표정에서 어색한 게 티가 난 모양이다. 민우는 애써 환하게 웃었다.

“아무튼, 오랜만이다. 여기서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네. 잘 지냈지?”

“조금 힘들었는데 잘 버텼어요. 안 그래도 연락 한 번 드리려고 했어요. 그게…… 오빠한테 빚진 것도 있으니까요.”

일전에 강철훈 교수 프로젝트를 말하는 것이리라.

민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과할 정도로 큰 문제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살면서 그 정도의 사정은 생기기 마련이니까.

“괜찮아. 프로젝트는 잘 끝났으니까. 강철훈 선생님 뵈러 온 건가?”

“예. 이제 좀 여유가 생겼어요. 제대로 사정을 설명해 드려야 할 것 같아서 왔어요.”

“학교는?”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아요.”

정연주는 씁쓸히 웃었다. 이제는 체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민우는 뭔가 이야기를 하려고 했다가 그만두었다. 더 이상은 참견이다.

“그럼 선생님 잘 뵙고 가. 나 급한 일이 있어서 가봐야 해.”

“다음에 꼭 연락드릴게요.”

인사치레라고 생각했다.

오늘로 확실히 알게 되었다. 그녀와 자신은 사는 세계가 다른 사람이라고.

민우는 작별을 고하고 다시 인문관으로 뛰어 들어갔다.

한편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정연주는 한숨을 내쉬었다. 좋은 기회였는데, 마음에 담아둔 이야기를 꺼내지 못했다.

그때 수행비서가 조심스레 말했다.

“이사님. 조금 서두르시는 게 좋겠습니다. 여섯 시 전까지는 회사에 들어가셔야 합니다. 다음 일정이…….”

“알았어요.”

그녀도 인문관 안으로 들어갔다. 몇 년간 집처럼 드나드는 곳이었는데, 오늘따라 낯설게 느껴졌다.

* * *

지음사로 출근한 민우는 가방을 내려놓고 슬그머니 연구실을 나섰다. 정은아 대리를 찾았는데, 그녀는 모든 일과를 마치고 쉬고 있었다.

이태백이 따로 없었다. 이어폰을 낀 채 다리를 쭉 뻗고 독서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저, 대리님.”

“으응? 무슨 일이에요?”

정은아 대리가 이어폰을 빼고 바로 앉았다. 휴식을 방해한 것 같아 왠지 미안했다.

“죄송합니다. 혹시 회사 주변에 괜찮은 식당 없는지 해서요.”

“괜찮은 곳이야 많죠. 비싸서 문제지.”

확실히 강남이라 부담이 컸다. 프랜차이즈가 아니라면 전체적으로 가격대가 높았다.

정은아 대리가 되물었다.

“뭐 드시려고요?”

“딱히 정해진 건 없는데. 치즈가 들어간 음식이면 좋을 거 같아요.”

“그럼 회사 뒤쪽 작은 길 쪽에 있는 등갈비집 가보세요. 전에 철호 씨랑 갔는데 괜찮았어요.”

“감사합니다.”

민우가 돌아서려는데, 갑자기 정은아 대리가 씨익 웃었다. 소름이 돋았다. 뭔가 자신의 누나와 비슷한 미소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

“박 쌤.”

“넵?”

“솔직히 말해요. 여자친구 생겼죠?”

민우는 깜짝 놀랐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잠시 고민해야 했다.

“대답 못 하는 거 보니까 진짠가 보네.”

“어떻게 아셨어요?”

“요즘 그런 쪽으로 자주 묻는 거 같아서요. 전엔 볼만한 영화 없냐고 물어봤었잖아요. 카페도 물어봤고. 데이트 코스만 너무 뻔하게 물어보니 알 수밖에.”

“박 쌤 여친 생겼다고?”

“오오!”

여자친구라는 말에 인문사회팀 직원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남의 연애사만큼 재미있는 게 없다고 여기는 사람들이었다. 그 와중에도 여전히 윤정민 팀장은 꿋꿋하게 졸고 있었다.

“어디서 만났어요? 공부만 하고 다니는 줄 알았는데 의외로 능력 있는 사람이었네.”

“같은 학교 다니는 동생이에요.”

“CC구나? 사진 좀 보여줘요.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하다.”

“그게…….”

“설마 여친 사진도 없어요?”

“그런 건 아닌데. 만난 지 얼마 안 돼서요. 좀 보여드리기가.”

“빼지 말고요. 뭐 본다고 닳는 것도 아닌데.”

결국, 민우는 지갑에서 수빈의 증명사진을 꺼냈다. 사귀기로 한 날 다음 날 그녀에게서 받은 부적 같은 것이었다.

그것을 본 직원들이 감탄을 쏟아냈다.

“대박! 완전 이쁘다! 연영과 다니는 사람인가요?”

“아뇨. 같은 과예요.”

“모델 해도 되겠네. 진짜 이쁘다. 와아! 나도 젊을 땐 딱 이랬는데.”

그때 장철호가 한마디 끼어들었다.

“대리님. 오늘따라 농담이 좀 지나치신데요?”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아, 아닙니다.”

보정이 조금 들어가긴 했지만 수빈의 미모가 유감없이 발휘된 그런 사진이었다. 그래도 민우는 실물이 훨씬 낫다고 생각했다.

정은아 대리가 증명사진을 민우에게 돌려주었다.

“박 쌤. 순둥이인 줄 알았는데 완전 능력자였네. 어떻게 꼬셨어요?”

“꼬신 게 아니고 그냥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요.”

“이거 딱 그런 느낌 아닙니까? 학원 안 다니고 학교 수업만 듣고 명인대 갔다.”

과연 장철호다운 한마디였다. 그의 멋진 비유에 팀 사람들이 깔깔거리며 좋아했다.

그렇게 한바탕 난리를 치른 민우는 녹초가 되어 연구실로 돌아왔다. 흐느적거리며 의자에 몸을 기댔다.

증명사진을 다시 지갑으로 넣으려다 다시 꺼내 바라보았다. 자신을 바라보며 수빈이 웃고 있었다.

‘이렇게 될 줄은 정말 몰랐는데.’

비가 한창 오던 그날 밤, 민우는 그녀를 데려다주며 많은 이야기를 했다. 비가 그치고 보름달이 떴을 때 두 사람은 서로의 미래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운명의 변곡점이 찾아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단 몇 마디가 오갔을 뿐인데, 두 사람의 관계는 극적으로 변했다.

아파트 앞에 도착할 무렵에는 연인이 되어 있었다. 왠지 민우는 이날 밤의 일을 평생 잊을 수 없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소중히 간직해야지.’

민우는 증명사진을 조심스레 지갑에 넣었다.

시간을 확인하니 5시 30분이 거의 다 되었다.

민우는 미리 준비한 자료집을 들고 연구실을 나갔다. 위층에 있는 전남규 차장을 만나러 갈 시간이었다.

* * *

전남규 차장은 모든 준비를 마치고 회의실에서 민우를 기다리고 있었다. 민우의 자리엔 시원한 음료가 미리 준비되어 있었다.

“단행본 준비는 잘 되고 계십니까?”

“오늘부터 시작했습니다. 어떻게 될지는 저도 잘 모르겠네요. 열심히 해 봐야죠.”

“잘 풀렸으면 좋겠습니다. 혹시라도 저희가 서포트할 일이 있으면 언제든 말씀해 주십시오.”

“감사합니다.”

의례적인 인사말이 오가고, 본격적인 미팅이 시작되었다.

주제는 민우가 운영하는 블로그 관련이었다.

지금까지 여러 일이 있었지만, 민우는 하루도 쉬지 않고 블로그에 게시물을 쌓았다. 뭔가를 읽으면 무조건 그 기록을 남겼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전남규 차장이 자료를 훑기 시작했다.

각종 수치가 입력된 차트가 뒤섞여 있었다. 민우와 처음으로 접촉한 이후 통계자료를 자체적으로 수집하고 있었다.

“최근 블로그 방문자수가 좀 는 것 같은데…… 혹시 유입 키워드를 확인해 보셨습니까?”

“안 그래도 저도 신기해서 찾아봤는데요. 헤겔, 니체, 괴테 쪽으로 검색해서 들어오는 분들이 많더라고요. 최근 그쪽으로 요약을 올린 게 덕을 본 것 같아요.”

“그렇군요.”

“그래 봐야 100명 남짓 수준이라서 의미 있다고는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학생들이 과제 하려고 찾은 걸 수도 있고.”

중요한 것은 방문자수가 아니었다. 파워블로그로 만들 필요는 없었으니까. 민우는 어떤 콘텐츠를 얼마나 많이 쌓느냐에 주력했다.

블로그는 민우가 지식을 공유하는 창구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 역할을 대신하겠다고 지음사가 나섰다. 그 과정이 중요한 것이다.

전남규 차장이 말했다.

“일단 저희가 생각하는 가장 큰 문제점은 소스가 부족하다는 건데요. 다양한 분야를 조금씩 다루는 것보다는 한 분야에 집중을 해 보시는 건 어떨까요?”

“그건 조정이 가능합니다. 지금은 그냥 손 가는 데로 읽고 있으니까요.”

“일단…… 수요가 많은 영미문학 쪽으로 방향을 잡아볼까요?”

민우는 그렇게 하겠다고 답했다.

두 사람은 가볍게 환담하듯 미팅을 진행했다. 그러다 문득 민우는 한 가지 의문점에 다다랐다.

“이 프로젝트는 오픈 라이브러리로 진행되는 게 확실하죠?”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민우 씨가 상업화를 원하지 않으셨으니 그렇게 진행이 되어야겠지요.”

“그럼 지음사에서는 어떤 식으로 이익을 가져가게 되는 겁니까? 어쨌든 기업이니 이윤을 남겨야 하지 않나 싶어서요.”

“좋은 질문을 해 주셨네요.”

전남규 차장은 마치 이 질문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자신 있게 말했다.

“시대가 변한 만큼 브랜드의 힘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결정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단순히 돈이 오고 가는 시대는 끝났죠.”

전남규 차장은 오픈 라이브러리를 각 대학과 교육기관에 무상으로 공급해서 브랜드 인지도를 올릴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일종의 투자라고 설명했지만, 민우의 의문은 계속되었다.

“지음사는 그렇게 하지 않아도 이미 유명하지 않나요?”

“일반서 분야에서는 그렇습니다만 학술 쪽으로는 아직 부족합니다. 아무래도 송 실장님께서는 새로운 시장을 보고 계신 거 같습니다.”

역시 유학파는 다르구나. 민우는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저희가 좀 걱정스러운 부분은 블로그보다는 민우 씨인데요. 아무래도 단행본 준비를 하시게 되었고, 또 학기가 시작되니까 바쁘실 거 같은데. 계약은 단행본 출간 이후에 다시 논의해 보시는 건 어떻습니까?”

“그렇게 해 주시면 저야 좋죠.”

그 밖의 여러 협의를 거치고 미팅이 끝났다.

민우는 연구실로 돌아갔고, 전남규 차장은 미팅 결과를 요약해 보고서를 써서 실장실을 찾았다.

“실장님. 미팅 결과 보고입니다.”

송승현 실장은 무미건조한 눈으로 보고서를 훑었다.

평소와는 조금 달랐다.

그녀의 표정을 살피던 전남규 차장이 조심스레 물었다.

“저, 실장님. 혹시 윗선과 이야기가 잘 안 된 겁니까?”

“생각보다 반대가 심하더군요.”

“그렇습니까…….”

민우가 전남규 차장과 미팅을 하는 사이, 송승현 실장은 임원 회의에 참석했다. 그리고 오픈 라이브러리에 대해 브리핑했다.

그녀는 유학파의 진면목을 보여주었다. 지음사의 10년 후를 내다보고 만든 기획이었다.

하지만 경영진의 반응은 냉담했다.

한마디로, 상업성이 없다는 이유로 그녀의 제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민우의 블로그를 시작으로 여러 지식인과 만나 큰 그림을 그리고 있었던 송승현 실장은 잠시 붓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당장의 수익이 없으니…… 어쩌면 오픈 라이브러리 서비스 자체가 폐쇄될 수도 있겠어요. 이 분위기라면.”

“박민우 씨에게 이야기하는 게 좋을까요? 아직 계약 전이긴 합니다만 오픈 라이브러리화가 기본 계약 조건이었습니다.”

송승현 실장은 생각에 잠겼다. 이내 그녀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짐을 그쪽에 떠넘길 필요는 없겠죠. 이건 우리들의 싸움이니까.”

“알겠습니다.”

“고생했어요. 나가서 일 보세요.”

찌릿한 두통이 시작됐다.

한숨을 내쉰 그녀는 통에 든 흰색 아스피린을 한 알 꺼내 입에 털어 넣었다.

그날 밤 실장실은 늦게까지 불이 꺼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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