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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 출판 계약 (3) (41/500)


041. 출판 계약 (3)
2021.05.06.


민우는 깜짝 놀랐다. 학부는 명인대를 나왔다고 들었지만, 국문과일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브리핑을 할 때 민식이 형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묻지 않았었구나. 어쩐지 이상하다 했어.’

그제야 궁금했던 부분들이 하나둘 풀리기 시작했다. 송승현 실장이 흥미로운 표정으로 민우에게 물었다.

“민우 씨는 저에 대해 모르고 있었나요?”

“예. 명인대 출신이라는 말을 듣긴 했는데 국문과인 줄은 몰랐습니다.”

“그렇군요. 밀린 이야기는 천천히 풀기로 하고. 일단 계약서부터 작성할까요.”

송승현이 출판계약서를 꺼냈다. 총 세 부였다. 하나는 회사 것이었고, 나머지는 공저자 몫이었다.

계약서를 하나씩 받아 든 두 사람은 꼼꼼히 읽었다.

민우는 계약서를 보는 게 처음이었다. 그래서 더욱 집중했다. 오기 전에 표준계약서를 미리 읽은 게 도움이 많이 됐다.

‘인세는 미리 약속한 대로 절반이고, 정가는 원고가 완성된 이후에 책정되네. 원고 납기일은 3개월 뒤고. 좀 타이트한데?’

3개월.

길면 긴 시간이지만, 곧 2학기가 시작된다는 점을 고려해 본다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그래도 해 내야지.’

그렇게 다짐하며 민우는 계약서 검토를 마쳤다. 민식도 다 읽었는지 계약서를 덮었다.

“별다른 내용은 없네요. 민우 넌 궁금한 거 있냐?”

“아뇨. 없습니다.”

“그럼 작성하자.”

민식이 저자 부분에 자신의 이름을 기입했다. 그리고 계좌 정보를 넣고, 미리 준비해 온 도장으로 간인을 했다.

민우도 민식이 했던 것과 같은 절차를 밟았다. 계약서를 각각 한 부씩 갖고, 남은 한 부는 송승현 실장에게 건넸다.

최민식이 웃으며 말했다.

“이렇게 다시 만날 줄은 몰랐는데요. 아무튼 좋은 기회를 주셔서 고맙습니다.”

“기회를 주는 건 어렵지 않아. 결과를 만들어 내는 게 어렵지. 두 사람 손에서 어떤 원고가 나올지 기대해 보겠어.”

과연 송승현 실장이었다. 끝까지 깐깐했다. 계약서를 파일로 갈무리하며 그녀가 물었다.

“내가 제일 걱정하고 있는 부분은 작업 방식인데. 아무래도 공저라서 신경 쓰이는 부분이 한두 군데가 아니야. 어떻게 나눌 생각이지?”

“민우는 서론 부분에서 이론의 배경과 역사적 흐름을 정리할 거고, 일부 작품의 분석을 맡을 겁니다.”

“그 정도의 능력이 된다고 보고 있는 건가? 박민우 씨는 이제 석사 1학기인데.”

민식은 조금도 고민하지 않고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잘 해낼 것으로 생각합니다. 서지훈 선생님 제자니까요.”

가만히 민우를 바라보던 송승현 실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그는 가능성을 여러 차례 입증해 보인 바가 있었다.

무엇보다도 서지훈 교수의 직속제자라면 신뢰할 만했다.

민식이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요즘 서지훈 선배랑 연락하십니까? 학부 때 많이 친하셨잖아요. 사귀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그냥, 뭐. 가끔 하는 정도지.”

송승현 실장은 말을 짧게 끊었다. 그 주제에 대해서는 더 이상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는 의미였다.

‘서지훈 선생님이랑 두 분이 친하셨구나. 혹시…….’

최근에 있었던 일들에 물음표가 연달아 붙었다. 생각해 보면 어려운 일들이 너무 쉽게 풀린 경향이 있었다.

‘선생님이 뒤에서 도와주신 건가?’

민우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서지훈 교수의 성격상 앞에서 도와주면 도와줬지, 뒤에서 뭔가를 할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사람의 일은 모르는 법이다.

혹시나 하는 생각이 꼬리를 물고, 민우는 깊은 상념에 빠졌다.

“민우 씨?”

“예?”

“뭘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아, 죄송합니다. 무슨 말씀을 하셨나요?”

“점심 어떻게 할 건지 물었는데. 시간 괜찮으면 식사나 같이하시죠.”

“좋습니다.”

“못 먹는 음식들은 없죠?”

대답을 확인한 송승현 실장이 내선으로 전남규 차장을 호출했다.

“부르셨습니까.”

“인사들 해요. 앞으로 출간 실무를 맡을 전남규 차장입니다. 이쪽은 이번에 단행본 계약을 한 최민식, 박민우 씨고요.”

“안녕하세요. 전남규입니다. 앞으로 잘 봐주십시오.”

“잘 부탁드립니다.”

최민식과 전남규 차장이 악수했다. 민우는 그냥 묵례만 했다. 이미 블로그 건으로 몇 번 만난 적이 있는 사이였으니까.

전남규 차장이 민우를 주목했다.

“민우 씨와는 이렇게 또 인연을 맺게 되네요. 다음엔 어떤 걸로 저희를 놀라게 해 주실지 기대가 됩니다. 하하하하.”

“별말씀을요. 아직 많이 부족합니다.”

민우는 겸손히 웃어넘겼다. 그때 송승현 실장이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차장님. 우리가 늘 가던 한정식집 예약 좀 해 주세요. 20분 뒤로. 별일 없으시면 차장님도 같이 가고요.”

“예. 저도 그럼 같이 가겠습니다.”

“전 잠시 화장실 좀 다녀오겠습니다.”

“제가 안내해 드리죠. 이쪽으로.”

최민식과 전남규 차장이 나가자 민우와 송승현 실장만 남았다.

어색한 공기가 돌았다.

하지만 민우는 묻고 싶은 게 하나 있었다.

“실장님.”

책상으로 돌아가려던 송승현 실장이 멈춰 돌아섰다. 찰랑거리던 머리가 파란색 블라우스에 차분히 내려앉았다.

민우가 용기를 내어 물었다.

“혹시 제가 서지훈 선생님 제자라는 걸 알고 계셨나요?”

“재미있는 질문을 하는군요. 바꿔 말하면, 그분이 기획서 통과에 도움을 준 게 아닌가하고 묻는 거지요?”

과연 그녀는 엘리트였다. 민우의 의중을 단번에 파악해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렇습니다.”

송승현 실장은 자리에 돌아가 앉았다. 민우에겐 그 잠깐의 시간이 천추와 같았다.

“민우 씨가 상아대 출신이라는 건 나중에 알았어요. 그분의 제자인 것도…… 하지만 그게 민우 씨가 제출한 기획서에 영향을 끼치진 않았어요. 그러니까 다른 생각은 할 필요 없습니다.”

“그렇습니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서지훈 교수의 도움이 있었더라면 마음이 불편했을 것이다.

‘하루빨리 선생님 그늘에서 벗어나야지. 혼자 우뚝 서고 싶어.’

그 마음이 전해졌을까.

봄처럼 들려온 나긋한 목소리가 민우의 시선을 끌었다.

“박민우 선생님.”

창문으로 스며든 햇살을 등지고 있던 그녀는 웃고 있었다.

이렇게 예쁘게 웃을 수 있는 사람이었구나. 그런 생각이 절로 드는 미소였다.

“단행본, 잘 부탁해요.”

* * *

6월 30일. 인문학 장려방안 공모전 접수 마감일이 다가왔다.

민우와 친구들은 마지막까지 사력을 다했다. 완성된 논문을 돌려보며 부족한 부분이 없는지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마감 시간을 한 시간 앞두고, 민우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 정도면 충분해. 제출하자.”

잠시 후, 공모전 논문 최종본 접수를 끝낸 민우가 기지개를 쭉 켰다. 모니터에 성공적으로 접수되었다는 메시지가 출력됐다.

“끝. 다들 고생했어.”

“오빠들, 정말 고생하셨어요!”

“내 말이. 아, 오늘은 후딱 들어가서 꿀잠 자야지. 벌써부터 졸음이 쏟아지네.”

뒤에서 지켜보던 수빈과 진섭도 이제는 한숨 돌린 표정이다.

수빈은 고생을 제일 많이 한 민우의 어깨를 주물러 주었다. 그가 방향을 잡아준 덕분에 논문을 쉽게 풀 수 있었다.

물론 그 모습을 진섭이 곱게 바라볼 리가 없었다.

“뭐야, 왜 민우 어깨만 주물러 줘?”

“리더잖아요.”

“와. 사람 차별하는 거 봐라. 세 명밖에 안 되는 팀에 카스트가 있다니. 말세야, 말세.”

싱긋 웃은 수빈이 이번엔 진섭의 어깨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아니, 그것은 주무르는 게 아니라 꼬집는 것에 가까웠다.

“아아악! 그만! 그만해애애!”

“해 달라고 할 땐 언제고? 이리 와요. 아주 시원하게 해 줄 테니까.”

“오지 마!”

벌떡 일어난 진섭이 도망갔다. 수빈은 그를 잡기 위해 테이블을 빙글 돌았다.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서로 물고 물리는 추격전을 벌였다.

멍하니 그 장면을 지켜보던 민우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만들 해. 정신 사납게. 초딩들이냐?”

말을 들을 기미가 보이지 않자 민우가 가방을 들고 일어섰다. 그러자 진섭을 쫓던 수빈이 뚝 멈췄다.

“어디 가려고요?”

“도서관에. 나 당분간 해외 서가 코너에 짱 박혀 있을 거니까 그런 줄 알아.”

오늘부터 단행본 출간 준비에 돌입하기로 했다. 책 제목은 <신화와 인간: 소설의 신화적 상상력>으로 결정되었다.

이 책에서 민우가 맡은 것은 이론의 정리와 일부 작품 분석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보다 많은 해외 자료가 필요했다.

진섭이 테이블 맞은편에서 수빈을 경계하며 말했다.

“하루 정도는 쉬고 내일부터 하지? 이따가 술 한잔해야지. 큰일 하나 끝냈는데 그냥 넘어가긴 좀 그렇잖아.”

“너 일찍 들어가서 잔다며. 붕어냐?”

“어, 그러네…….”

머쓱했던 진섭이 입을 뻐끔거렸다. 그것을 본 수빈이 손뼉을 치며 깔깔거리며 웃었다.

“근데 오빠. 저녁은요?”

“저녁은 지음사로 넘어가서 먹을 거 같아. 차장님하고 미팅이 있어서.”

수빈은 뭔가 할 이야기가 있다는 듯 민우를 바라보았다. 그 신호를 눈치챈 민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수빈이 웃었다.

307호를 나서자마자 톡이 하나 도착했다. 수빈이 보낸 것이었다.

빈이♡: 이따 저녁에 지음사로 갈게. 같이 저녁 먹자!

― 왔다 갔다 번거롭지 않겠어?

빈이♡: 걸어서 30분밖에 안 걸리는데 뭐~ 그런 거 신경 쓸 시간에 저녁 메뉴나 생각해 봐^^

요즘 들어 저 웃는 이모티콘이 무서워지는 민우였다. 민우는 알겠다고 답장을 남기고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이따 출근해서 정 대리님한테 맛집 좀 추천받아야겠다.’

인문관을 나선 민우는 중앙도서관 12층 해외 저널 서가로 이동했다.

해외 저널을 읽어야 했기에 안경을 착용했다. 영어는 완벽하게 읽을 수 있었지만 다른 유럽어는 아직 익숙하지 못했다.

컴퓨터에 앉아 데이터베이스 검색창을 띄웠다. 민우는 키보드에 손을 올린 채 생각했다.

‘일단 캠벨의 이론과 관련이 있는 저널은 모두 조사해야 해. 참고문헌 목록을 만드는 게 좋을 텐데…… 그렇다면 방법은?’

곧 민우는 해답을 찾았다. 예전에 서지훈 교수에게 배웠던 것을 떠올린 것이다.

‘캠벨의 저널에서 인용목록을 체크해 역추적하는 방식으로 하자.’

민우의 손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 시간 정도 컴퓨터와 씨름해 약 50여 건의 관련 논문을 찾아냈다. 첫 시도치고는 나쁘지 않은 성과다.

‘리스트 작성. 메모장에 기록하는 것보단 엑셀 파일로 만드는 게 낫겠지?’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내 전원을 켜고 엑셀 시트를 띄웠다. 그리고 관련 논문의 제목, 위치, 형식, 쪽수 등을 꼼꼼히 기록했다.

그러다 보니 벌써 오후 4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벌써? 조금 더 해야 하는데…… 어쩔 수 없지. 빨리 정리하고 나가자.’

민우는 서둘러 자리를 정리하고 도서관을 나섰다. 오늘 오후 5시 반에 전남규 차장을 만나기로 했으니 조금 서두를 필요가 있었다.

그때 잊었던 뭔가를 떠올린 민우가 가방을 열었다. 아무리 뒤져도 있어야 할 파일이 보이지 않았다.

‘없네. 놓고 온 건가? 어휴. 나도 섭이 따라 붕어가 된 건가.’

미팅에 쓸 자료라 민우는 어쩔 수 없이 방향을 바꾸어 인문관으로 뛰기 시작했다. 307호 사물함 안에 파일을 넣어 둔 것 같았다.

그때 도로 저편에서 검은색 세단이 유유히 다가왔다. 지나가던 학생들이 힐끔 볼 정도로 매우 고급스러운 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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