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0. 출판 계약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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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0. 출판 계약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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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0. 출판 계약 (2)
2021.05.03.
민우는 최민식의 뒤를 따라 술집을 나섰다.
밖은 여전히 소란스러웠다. 학교 근처였다면 방학이라 조용했겠지만, 여기는 역세권이다. 일반인들도 상당히 많았다.
민식은 술집 앞에 놓인 돌기둥에 앉았다. 민우도 그 옆에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그는 담배를 거의 다 필 때까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생각을 정리하는 듯 보였다.
“애썼다. 중간에서 일 추진하느라.”
“아닙니다. 저한텐 굉장히 뜻깊은 경험이었습니다.”
출간도 기쁜 일이지만, 무엇보다도 인문학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해답을 찾은 것이 민우에게는 정말 큰 도움이 되었다.
“누가 석사 1학기 아니랄까 봐 입바른 소리만 하네. 어쨌든 네 덕에 지음사에서 책을 내게 됐구나. 고맙다.”
“제가 더 감사하죠. 공저로 올려 주셨는데.”
민식이 피식 웃었다. 한 번쯤은 으쓱해도 괜찮을 텐데, 이 어린 후배는 늘 겸손하기만 하다.
“그래서 말인데 내일모레 계약 말이다.”
“예.”
“가기 전에 말을 맞춰두는 게 좋을 거 같다. 다른 건 몰라도 인세 부분이 화두일 거 같은데.”
민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화두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객관적으로 봐도 논문에 대한 기여도는 1할도 안 됐다. 그나마 중간에 다리를 놓았기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인세는 생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작업량 자체도 최민식이 압도적으로 많을 게 분명하다. 역량의 차이가 크니까. 안경과 만년필의 힘을 빌려도 민우가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다.
이제 석사 1학기다. 그간 학계 활동을 활발히 해 왔던 민식의 필치를 따라가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얼마 정도가 좋을까?’
공저긴 해도 절반씩 나누는 것은 좀 아니라고 생각했다. 작업량에 따라 공평하게 나누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했다.
민우가 고민하는 사이 최민식이 계속 말했다.
“3천 부 정도 인쇄에 들어간다고 했으니…… 정가가 얼마로 책정될지는 모르겠다만 인세가 10퍼센트라고 가정했을 때 우리 손에 떨어지는 금액은 천만 원도 안 될 거다. 끽해야 700선.”
“전 형 말씀에 따르겠습니다.”
“쯧, 넌 그게 문제다.”
민식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그가 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말했다.
“인마. 선배니까 어려워서 그렇게 말하는 건 알겠는데 이럴수록 자기 밥그릇은 잘 챙겨야지. 내가 다 먹겠다고 하면 그렇게 하겠다고 할 거냐?”
“그건 아니지만…….”
“절반씩 나눈다.”
민우는 깜짝 놀랐다. 민식은 꽁초를 버리고 자리에서 일어서고 있었다.
“하지만 형. 제가 절반의 몫을 해낼 수는 없습니다. 냉정하게 봤을 때 3:7정도로 하는 게…….”
“왜 해낼 수 없다고 단정하는 건데?”
목소리가 좀 컸다. 술이 들어간 민식의 목소리는 여전히 무서웠다. 고개를 숙인 민우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민식이 꾸짖듯 말했다.
“캠벨 논문 찾으려고 밤새도록 자료 찾고 뛰어다닌 거 수빈이한테 다 들었다. 그 정도로만 노력해도 절반의 몫은 해낼 수 있지 않나?”
“그게, 전 제대로 된 논문을 써본 적이 없습니다. 과제로 흉내 낸 게 전부예요.”
“그럼 이번에 제대로 배우면 되겠네.”
“예?”
“백 번이고 천 번이고 계속 써 오라고. 내가 마음에 들 때까지. 까이는 걸 무서워하지 말고.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늘지 않겠어?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퉁명스러운 말 너머에서 배려가 느껴졌다. 그제야 민우는 자신의 특기가 무엇인지를 떠올렸다.
‘노력.’
술기운에 잠시 잊고 있었던 걸까.
최민식의 말은 잔소리가 아니라 충고였다. 민우는 자신 있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번 해보겠습니다.”
“아 나 진짜. 하나는 알고 둘을 모르네. 야, 박민우. 대답이 틀렸잖아. 한번 해보겠습니다고 하면 안 되지. 이럴 때는 해내겠습니다! 이렇게 당당하게 말해야지. 그리고 말이다. 가장 중요한 건…….”
민식이 말을 끊더니 손가락으로 민우의 가슴을 툭툭 쳤다.
“해내겠다는 건 나한테 하는 말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너한테 하는 말이 되어야 한다. 무슨 말인지 알겠냐?”
“아, 예!”
“바보는 아닌 것 같아서 다행이군. 그만 들어가자. 기다리시겠다.”
술집으로 다시 들어가는 민식의 뒷모습을 보며 민우는 선배의 역할이 무엇인지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았다.
‘재환이 형이랑 민식이 형을 보면 서로 완전히 다르지만…….’
선배라는 본질은 같다.
‘나도 저런 선배가 될 수 있을까?’
학부 선배와 대학원 선배는 그 역할이 조금 다르다. 민우는 잠시 생각에 잠겼고, 이내 고개를 끄덕이곤 술집으로 들어갔다.
그날 술자리는 새벽까지 계속되었다.
* * *
“안녕하십니까. 좋은 아침입니다.”
민우가 밝은 표정으로 인문사회팀 사무실로 들어왔다. 맨 앞줄에 앉아 있던 정은아 대리가 반갑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박 쌤. 뭔가 오랜만에 보는 것 같네요?”
“어제 못 나왔어요. 좀 일이 있어서.”
사실, 일이 있었던 게 아니라 술병이 나서 나오지 못했다.
이틀 전에 있었던 술자리 때문이었다.
조촐하게 시작된 술자리는 아침까지 계속되었다. 2차로 와인을 마시고 3차로 동동주를 마셨으니 몸이 버티지 못한 것.
그다음 날 민우는 꼼짝없이 자취방에 누워 술병과 싸워야 했다. 어차피 재택근무도 가능했기에 딱히 상관은 없었다.
고생은 했지만 뜻깊은 자리였다.
최민식과의 대화도 그렇지만, 아예 접점이 없었던 강예진 선배와 한 발 더 가까워지게 된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평소 깐깐하고 고집스럽기로 유명한 그녀였지만, 학교 밖에서는 조금 달랐다. 활발하고 나름대로 애교 있는 사람이었다.
옆자리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금방 친해지게 됐다. 그녀를 향한 민우의 편견도 대부분 사라지게 됐다.
그녀는 생각보다 좋은 사람이었다.
“그러셨구나. 그나저나 오늘 계약하는 날이죠? 박 쌤 단행본.”
“예. 이따 출판기획실에 올라가서 하기로 했어요.”
“축하해요. 젊은 나이에 대단하네. 난 스물여덟에 일하느라 정신없었는데.”
그 말에 다른 팀원들도 웃음을 터트렸다. 대개 비슷한 삶을 살았으니까.
“아닙니다. 선배 덕 좀 본 거죠.”
민우는 멋쩍게 웃었다.
단행본 출간 소식은 여기저기에 빠르게 퍼졌고, 많은 사람들이 축하 메시지를 보내오는 중이다.
그중 가장 기뻐한 것은 가족들과 서지훈 교수였다.
어머니는 동네에 소문을 내러 다니기 바빴고, 누나는 인세 절반을 입금하라고 으름장을 놓았으며, 서지훈 교수는 내후년까지 단독으로 단행본을 내서 자신의 기록을 깨라는 농담을 던졌다.
지도교수인 민영환 교수가 별로 탐탁잖은 반응을 보인 것을 제외한다면 모두가 축하해 주었다.
그때 장철호가 다가왔다.
“대리님. 그거 말입니다. 박 쌤한테 먼저 드리는 게 낫지 않을까요?”
“아, 그럴까?”
정은아 대리가 책상 밑에서 뭔가를 꺼냈다. 선물 상자였는데, 꽤 크기가 컸다.
“출판 축하 선물로 우리 팀원들이 준비한 선물이에요. 마음의 선물을 드리면 박 쌤이 안 좋아할 거 같아서. 호호호.”
“뭘 이런 걸 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크기와 내용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상자를 받아든 민우는 가슴이 벅차올랐다.
정은아 대리가 말했다.
“이제 많이 바빠지겠어요. 단행본 작업하려면. 박사 논문 베이스로 다시 고쳐 쓰는 거라고 들었는데 쉽지 않겠네요.”
“다행히 팀장님께서 연구실적으로 인정해 주신다고 해서요. 당분간은 연구소에서도 단행본 작업만 하면 될 것 같습니다.”
“하긴, 어차피 우리 출판사에서 나가는 책이니 그렇게 해도 되겠네. 아무튼, 고생 더 해서 좋은 책 내세요. 우리가 한 부씩 다 사줄 테니까!”
“감사합니다!”
민우는 몇 마디를 더 나누고 연구실로 들어왔다.
자리에 앉자마자 선물 꾸러미를 풀었는데, 초콜릿, 사탕, 과자 등의 간식거리 등이 들어 있었다.
그중 가장 눈에 띈 것은 바로 하얀 봉투였다.
그것을 열어본 민우가 깜짝 놀랐다. 10만 원짜리 백화점 상품권이 들어 있었다.
‘이렇게 큰 걸 받아도 되나?’
민우는 팀원들에게 고마움 이상의 감정을 느꼈다. 한편으로는 그간 바쁘다는 핑계로 회식을 거절한 게 미안해졌다.
백화점 상품권은 누나에게 주기로 하고, 초콜릿 하나를 까서 입에 넣었다.
달콤했다.
책상을 정리하고 민우는 컴퓨터를 켰다. 부팅되는 와중에 가방에서 단행본 관련 자료를 모아 둔 파일을 꺼냈다.
‘오전 중으로 개요를 완성해야 해. 이따 민식이 형 만나서 이야기를 하려면 자료가 있는 편이 좋으니까.’
민우는 시간을 확인했다. 오전 9시 50분. 최민식과의 약속은 오전 11시로 잡혀 있었다.
‘시간은 충분해. 시작하자.’
민우는 가방에서 만년필을 꺼냈다. 이면지를 하나 뒤집어놓고, 깨끗한 면에 필기를 시작했다.
번쩍!
만년필에서 기묘한 기운이 흘러나오자 필기 속도가 점점 빨라지기 시작했다.
‘끝났다!’
단 5분 만에 단행본에 쓰일 목차가 정리됐다.
최민식의 논문은 이미 충분히 읽었고, 어떤 방식으로 바꿀 것인지도 오래 고민을 해왔기에 쉽게 끝을 낸 것이다.
‘민식이 형이 마음에 들어 할지는 모르겠지만. 한번 부딪쳐 봐야지.’
민우는 이틀 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그때 민식은 이렇게 말했다. 백 번이고 천 번이고 계속 써 오라고. 까이는 걸 무서워하지 말고. 그러다 보면 실력이 늘 거라고.
‘이번 기회에 최대한 많이 배워놔야 해. 그래야 내 힘으로 논문을 써낼 수 있을 테니까.’
민우는 이면지에 정리한 목차를 컴퓨터로 옮겨 인쇄를 걸었다. 그리고 그밖에 참고할 만한 자료들을 챙겨 파일에 넣었다.
그러다 보니 한 시간이 훌쩍 지났다.
약속 시간이 거의 다다랐을 때 핸드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최민식이었다.
“네, 형. 도착하셨어요? 알겠습니다. 그럼 제가 지금 바로 내려가겠습니다.”
민우가 서둘러 1층으로 내려갔다.
로비에서 정장을 걸친 최민식의 모습이 보였다. 민우가 게이트를 넘어 그쪽으로 달려갔다.
“오셨어요?”
“바로 올라가면 되냐?”
“아뇨. 방문자용 ID카드 받아야 해요. 혹시 신분증 있으세요?”
최민식이 지갑에서 주민등록증을 꺼내 민우에게 건넸다. 두 사람은 데스크에서 방문자용 ID카드를 받아 게이트를 통과했다.
엘리베이터에 오른 민우는 15층 버튼을 눌렀다. 그때 문득 생각난 것이 있어 민식에게 말했다.
“참, 이번 계약은 차장님이 아니라 출판기획실장님이 직접 진행하신대요.”
“실장님이 직접?”
“예. 계약도 할 겸 책에 대해 이것저것 더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그렇군. 어떤 분인데?”
“좋은 분이에요.”
너무 막연하게 설명한 게 아닌가 싶었지만, 민식은 별로 관심을 갖지 않았다. 누가 나와도 상관없다는 태도였다.
15층에서 내린 민우는 민식을 실장실로 안내했다. 노크하니 안에서 들어오라는 소리가 들렸다.
민우가 문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실장님.”
“어서 와요.”
그런데 민식은 인사는커녕 송승현 실장을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그가 이렇게 놀란 표정을 짓는 건 민우도 처음이었다.
“승현…… 누나?”
“오랜만이네. 얼굴 좋아 보인다. 살 좀 찐 거 같은데?”
송승현 실장이 자리에서 일어서 이쪽으로 걸어왔다. 손을 내밀고 악수를 청했다. 그제야 민식은 환하게 웃으며 손을 잡았다.
“와, 진짜 놀랐네요. 어떻게 여기서 만날 수가 있지? 정말 승현 누나 맞죠?”
“맞아. 거의 7년 만이지?”
“그쯤 됐죠. 정말 생각도 못 했네. 박사 다 마치고 온 겁니까?”
“그래. 한국에 들어온 지는 얼마 안 됐어. 일단 앉자. 민우 씨도 앉아요.”
세 사람이 소파에 앉았다.
아무리 봐도 두 사람은 아는 사이인 것 같았다. 자리에 앉자마자 민우가 조용히 귀에 대고 물었다.
“형. 실장님하고 아는 사이셨어요?”
“우리 과 선배야. 01학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