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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9. 출판 계약 (1) (39/500)


039. 출판 계약 (1)
2021.04.30.


카페 밖으로 나오니 비가 아직 그치지 않고 있었다. 더위를 식혀주는 고마운 비였다.

민우가 우산을 펼쳤다.

후드드득―

거센 빗줄기가 우산을 때렸다.

수빈은 우산을 가져오긴 했지만, 가방에서 꺼내지 않았다. 손을 잡고 있어서 그녀는 민우와 같이 우산을 썼다.

‘장우산으로 가져오길 잘했네.’

공간이 넉넉했다. 그래도 민우는 혹시라도 빗방울이 튈까 우산을 한쪽으로 기울여 주었다. 덕분에 왼쪽 어깨가 금세 비로 젖었다.

축축해졌지만 괜찮았다. 어차피 말리면 그만이니까.

“비 참 시원하게 오네.”

“그러게.”

손을 마주 잡던 수빈은 자세가 불편해 민우와 팔짱을 꼈다. 큰 변화였지만, 모든 것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그렇게 두 사람은 지하철역으로 걷고 또 걸었다. 느릿한 걸음으로.

“오빠.”

“왜?”

정면을 보고 있던 민우가 고개를 돌렸다.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웬일이야? 집에 다 데려다주겠다고 하고.”

“비 오잖아.”

“비? 고작 그 이유 때문에?”

민우는 웃었다.

그녀와 좀 더 같이 있고 싶었다. 처음엔 그러지 않았지만, 이제는 조금 변했다. 밤새도록 같이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졌다.

“지은 죄가 있으니까 집까지 모셔다드려야지. 원래 공연 봤던 그날 데려다줬어야 했는데.”

“오빠가 매일 죄만 짓고 살았으면 좋겠다.”

“그건 좀. 너 화내니까 좀 무섭더라.”

“화낸 거 아니래도 그러네?”

어느덧 두 사람 앞에 지하철역이 나타났다. 민우는 안으로 들어가려 했는데, 수빈이 팔을 잡아당겼다.

“그냥 우리 걸어가요. 왠지 걷고 싶은데. 비도 오고 좋잖아.”

“그러다 옷 젖어. 감기 든다.”

“오빤 진짜 낭만이라는 게 뭔지 모르는 사람이구나.”

나름 그녀를 배려해서 한 말이었는데 마음에 들지 못한 모양이다. 두 사람은 입구에서 벗어나 반포역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팔짱을 낀 채 인파 속을 헤치고 지나갔다. 사람이 많지 않아 걸을 만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방법을 연구한다.”

수빈이 중얼거리자 민우가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앞을 보며 뭔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좋은 말인 것 같아. 나도 그런 마음가짐으로 공부를 해야겠어.”

“그건 좋은 생각이 아닌 거 같은데.”

“왜?”

“하나의 진리에 이르는 길은 여러 가지라고 생각하거든. 나는 인문학을 표현하는 하나의 방법을 찾는 것뿐이야. 결국, 본인이 스스로 질문하고 답을 찾는 게 가장 좋은 거 아닐까? 깨달음의 깊이가 다를 테니까.”

“그렇구나.”

“조급해하지 말고 충분히 고민한다면 나보다 더 멋진 답을 찾아낼 수 있을 거야. 분명히.”

수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민우의 옆모습을 담은 눈동자에 애정이 차올랐다. 이런 모습 때문에 그에게 반했던 거다.

멋있는 남자는 많았지만, 존경할 수 있는 남자는 없었다.

하지만 민우는 존경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이 사람을 좋아하길 잘했다, 그런 생각으로 이어졌다.

“공연 보길 잘했다. 그치?”

“안 봤으면 큰일 날 뻔했어. 나중에 정 대리님께 식사라도 대접해야지.”

“나는? 나도 지분 좀 가지고 있잖아.”

맞는 말이었다.

수빈의 한마디가 아니었다면 클라이맥스 장면을 제대로 해석할 수 없었을 것이다.

“오빠가 더 잘할게. 그걸로 되겠지?”

수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간접적인 고백에 그녀는 만족했다.

“그럼, 이제 공모전 준비 제대로 할 수 있겠네? 오빠가 원하는 답을 찾았으니까.”

“그렇지. 이제부터가 시작이지.”

민우의 표정에 자신감이 넘쳤다.

지금까지 그는 인문학을 막연하게만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것의 본질이 아닌, 겉면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민우는 인문학이 무엇인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그것이 옳은 것인지 틀린 것인지는 아직 입증되지 않았다. 그것은 평생을 공부하며 증명해 내야 하는 것이었다.

“인문학에 포커스를 두지 말자. 우리 사람, 이웃, 친구들을 위해 학문적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부터 생각하자.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뭘 해야 하는지 답이 나올 거야.”

“오빠 왠지…….”

수빈이 잠시 말을 줄였다. 민우는 그녀를 바라보며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이틀 정도 못 본 사이에 엄청나게 달라진 거 같아.”

“그래? 난 잘 모르겠는데.”

마음이 홀가분하긴 했다.

뚜렷한 목표도 생겼다. 그냥 학문하는 것과 학문적 목표를 정해놓고 공부를 하는 게 이렇게 크게 다를지는 몰랐다.

“분위기가 좀 달라졌다고 해야 하나? 분명히 그래. 난 누구보다 오빠를 잘 아는 사람이거든.”

“잘 안다니. 뭔가 무섭다 좀. 우리 알게 된 지 일 년도 안 됐잖아.”

“시간이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밀도가 중요한 거지.”

밀도가 중요하다. 명언이라고 생각했다. 민우는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어느새 힘든 오르막길이 끝나고 편한 내리막길이 시작됐다.

“아무튼, 내일부터는 본격적으로 공모전 논문 준비하자. 본론을 세 챕터로 나눠서 각자 한 부분씩 쓰고 합치면 될 거 같아.”

“문체 통일은 합친 다음에 내가 한꺼번에 할게.”

“그럼 내가 서론을 쓰고 섭섭이가 결론을 쓰면 대충 공평하게 되겠다.”

빗줄기가 조금씩 잦아들기 시작했다. 아직 가야 할 길이 절반이나 남았는데 비가 그치기 시작한 것이다.

내리막길이 끝날 무렵에는 비가 완전히 멈췄다.

‘조금 더 왔으면 좋았을 텐데.’

흐릿한 하늘을 보며 두 사람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서로의 생각을 읽었는지, 마주 본 두 사람이 풋 하고 웃었다.

그래도 두 사람은 우산을 쓴 채 계속 걸었다. 어느덧 구름이 조금씩 걷히며 풍만한 달이 모습을 드러냈다.

보름달이 떴다.

그리고 그날 밤, 어설펐던 두 사람의 관계도 하늘에 뜬 보름달처럼 가득 차올랐다.

* * *

찌는 듯한 더위가 계속되었다. 가능하면 외출을 삼가라는 뉴스가 나왔다. 폭염주의보까지 발령된 상황.

하지만 민우는 시원한 도서관을 버리고 밖으로 나와야 했다.

얼마 전 이재환이 연락을 해 왔다. 단행본 출간 기념으로 술자리를 마련하겠다는 말이었는데, 그게 바로 오늘인 것이다.

조금만 걸어도 땀이 흘렀다.

민우는 이마를 닦으며 버스에 몸을 실었다.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꿀처럼 달콤하다.

‘으아. 이제야 좀 살겠네. 그나저나 오늘은 누가 나오려나?’

한참 위 선배의 말이라 누가 나오는지 물어보지 못했다. 어차피 거절할 수도 없었으니 가서 직접 확인하는 게 나았다.

‘민식 선배는 당연히 나올 거고, 용철 선배가 나오려나? 석사들 중에서도 몇 명 나오면 좋을 거 같은데.’

민우는 한진섭과 이수빈을 떠올려 보았지만 고개를 가로저었다. 두 사람은 오늘 약속이 있어 일찍 들어간 상황이다.

명인대입구역에 도착한 민우는 약속장소로 이동했다. 너무 일찍 온 탓에 아무도 없었다.

민우는 안에서 기다리겠다고 톡을 남긴 다음 자리를 잡았다. 그로부터 30분 뒤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재환과 최민식이 같이 들어왔다. 민우는 일어서 꾸벅 인사했다.

“오셨습니까. 선배님들.”

“일찍 왔네? 예진이는 아직 안 왔나?”

“예진 선배요?”

“오늘 같이 마시기로 했다. 용철이는 일 있어서 못 온다고 했고. 예진이까지 해서 우리 넷이 끝이야.”

의외였다.

박사 2학기 강예진은 민우와 접점이 거의 없었다. 과정이 다르니 수업을 같이 들어본 적도 없고, 따로 이야기를 나눠본 적도 없었다.

그때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던 최민식이 말했다.

“형. 예진이 좀 늦는다는데요? 지금 연락 왔는데.”

“그래? 그럼 우리끼리 먼저 개시하고 있자. 더운데 일단 맥주로 달려볼까? 그냥 마시면 싱거우니까 이슬이 좀 말고.”

“좋죠.”

민우가 벨을 눌러 맥주와 소주를 시켰다. 늘 그렇듯 안주 선택은 막내의 몫이었고, 민우는 후라이드 반 양념 반을 시켰다.

그때 민식이 끼어들었다.

“그거 가지고 되겠어? 골뱅이무침도 하나 추가로 주세요. 소면은 곱빼기로.”

술이 먼저 나왔다.

민우는 배운 대로 소주잔 두 개를 겹쳐 선까지 따랐다. 이어 맥주를 붓고 숟가락으로 바닥을 '탁' 쳤다. 멋지게 말렸다.

이재환이 감탄했다.

“이야. 잘하네. 어디서 배웠어?”

“저 일하는 곳 팀장님이 알려주셨어요. 이것만 알면 술자리에서 이쁨받을 수 있다고 하시던데요.”

“좋은 분 만났구나.”

“알고 보니 우리 학교 출신이시더라고요. 철학과 나오셨대요.”

민우는 속으로 아차 싶었다. ‘우리’라는 단어를 잘못 사용한 게 아닌가 싶었다. 민우는 다른 학부를 나왔으니까.

하지만 두 선배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잔을 들었다.

건배사는 재환의 몫이었다.

“아무튼, 축하한다 박민우. 공저긴 해도 스물여덟에 단행본을 내다니. 이거 우리 과 신기록 아니냐? 학술서에 한정한다면.”

“그럴걸요? 제일 빠른 게 서지훈 선배일 겁니다. 서른한 살에 내셨던 걸로 기억해요.”

“하하하. 이거 플래카드라도 걸어야 하는 건가. 아무튼, 대단해. 너희 둘 다.”

이런 식으로 칭찬을 들을 줄 몰랐던 민우는 어색하게 웃었다. 한편으로는 익숙한 이름이 나오니 반가웠다.

‘서지훈 선생님이 서른한 살에 단행본을…… 역시 천재셔. 나는 안경이 없었다면 해낼 수 없었을 텐데.’

하지만 민우는 긍정했다.

어쨌든 송승현 실장을 설득시킨 것은 자신의 능력이었다. 겸손한 것은 좋지만, 자신이 한 일을 과소평가할 필요는 없었다.

그때 최민식이 물었다.

“박민우 너 상아대 출신이었지? 그럼 서지훈 선배 알겠네?”

“맞습니다. 제 지도교수셨어요.”

“역시. 어디서 이런 특이한 애가 굴러들어왔나 싶었더니 선배 제자였구나.”

최민식은 고개를 끄덕였다. 완전히 납득한 표정이었다. 서지훈 교수의 위상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는 말이었다.

잔이 순식간에 비었다. 민우가 다시 소맥을 말기 시작했다. 그 사이 맞은편에 있던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눴다.

“근데 출판 계약은 언제냐?”

“내일모레요.”

이재환이 목소리를 죽였다. 민우에게 들리지 않도록.

“인세는?”

“아직 얘기 안 했습니다. 민우랑 얘기를 해 봐야죠.”

이재환은 뭐라 한마디 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예전의 최민식이 아니었다. 그가 알아서 문제를 잘 해결할 것이다.

그때 문이 열리더니 강예진이 들어왔다.

외모로만 보면 단발 보브펌을 한 귀여운 여자인데, 실은 그렇지 않다. 송승현 주니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깐깐하다.

“오라버니들 미안요. 뭐 정리할 게 생겨서 늦어버렸네. 어머, 벌써 술 말고 있어요?”

“왔냐?”

빈자리는 민우의 옆자리뿐이었다. 강예진이 앉자 좀 부담스러웠지만, 민우는 멋쩍게 웃었다.

“축하한다. 박민우.”

대뜸 강예진이 손을 내밀었다. 악수하자는 건가? 민우는 얼떨결에 그녀의 손을 잡았다.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열심히 하라구. 그런데 오늘은 오라버니 두 분이 쏘시는 거죠?”

“그래. 걱정하지 말고 마셔라.”

“앗싸! 그럼 안주로 배 채워도 되겠네. 그럼 2차는 와인 어때요? 이 근방에 괜찮은 바 하나 있거든요. 좀 비싸긴 하지만.”

이재환이 최민식을 바라보았다. 네가 내라, 그런 표정이었다. 민식은 난감해했지만 예진의 제안을 거절하지 못했다.

곧 안주가 나오고 술자리가 본격적으로 벌어졌다.

빈 병이 하나둘 테이블 끝에 쌓이기 시작했다. 세 사람은 정말 술을 잘 마셨다. 듣기로 셋이 자주 이렇게 뭉친다고 했다.

한창 이야기가 오가던 도중에 강예진이 고개를 갸웃했다. 민우를 보면서.

“근데 넌 왜 민식 오라버니한텐 형이라고 하고 재환 오라버니한텐 선배라고 하니? 설마 나이가 더 많아서?”

“아뇨, 그게요.”

“됐어. 그냥 말 나온 김에 형으로 통일하자.”

재환이 재치있게 말을 잘랐고, 이에 질세라 강예진이 나섰다.

“그럼 나도 누나 할래. 민우 너 스물여덟이지?”

“네.”

“누나라고 불러.”

강예진은 올해로 스물아홉이다. 민우보다 한 살이 많았다.

얼떨결에 형과 누나가 추가로 늘었다. 좋았다. 삭막한 대학원에서 사적인 관계를 늘린다는 건 분명 좋은 신호다.

그때 최민식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화장실 갈 겸 한 대 피우고 오겠습니다. 박민우. 잠깐 나가자.”

“아, 옙.”

무슨 일일까. 그는 뭔가 할 말이 있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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