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6. 행운의 티켓 (2)
(36/500)
036. 행운의 티켓 (2)
(36/500)
036. 행운의 티켓 (2)
2021.04.23.
“오빠는 바로 도서관으로 가?”
“아니. 볼 거 다 봤으니 출근하려고.”
“저녁도 같이 먹으면 좋을 텐데.”
수빈이 아쉬움을 표했다. 민우는 그 아쉬움을 달랠 방법을 찾았다.
“내일 같이 먹자. 내일은 저녁까지 있을 거 같으니까.”
“그래요 그럼.”
민우는 손을 들어 보이곤 몸을 돌렸다. 그때 뒤에서 수빈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빠.”
민우는 멈춰서 다시 수빈을 바라보았다.
“이따 도착하면 연락해요.”
“알았어.”
“앞으로도 계속.”
수빈이 조심스레 말했다. 무리한 요구라고 생각할까 봐 민우의 눈치를 살폈다. 잠시 머뭇거린 민우는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수빈은 웃었다.
“조심히 가요.”
민우는 바로 버스에 몸을 실었다. 지하철로 갈아타고 약 반시간 후 지음사 본사에 도착했다.
그 와중에 민우는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실적이 부족해. 실적! 실적! 실적!’
민우가 생각하는 실적은 바로 연구실적이었다.
학술지에 논문을 발표하거나 단행본 출간을 하게 되면 실적이 쌓인다. 교수 임용은 물론 각종 심사 청탁 등을 받을 때 중요한 지표로 활용된다.
삐빅―
민우는 ID카드를 대고 인문사회팀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 와요. 박 쌤.”
“안녕하세요.”
익숙한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며 복도를 걸었다.
몇몇 사람들이 말을 걸어왔지만, 그 와중에도 민우는 실적 생각만 하고 있었다.
‘송 실장님 말씀도 일리가 있어. 내 커리어가 없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니까. 지식을 머릿속에만 넣어 둔다고 다른 사람이 인정하는 건 아니잖아?’
그렇다면 대안은?
간단하다. 논문을 써서 학회에 발표하면 된다. 물론 그 과정에는 소정의 심사가 필요하다.
‘내가 지금 쓴 것 중 논문이라고 할 수 있는 건 모두 세 개.’
민우는 1학기 동안 과제로 제출했던 세 개의 페이퍼를 떠올렸다.
최인훈론. 김승옥론. 이청준론.
모두가 좋은 성적을 받았다. 연구개요 단계부터 비판을 듣긴 했지만, 만년필의 숨겨진 설계능력 덕에 A+라는 학점으로 유종의 미를 거뒀다.
그중 최인훈을 다룬 연구는 민우가 가장 아끼는 것이었다.
특히 민우는 최인훈 소설에 나타난 ‘바다’의 이미지에 주목했다. <태풍>과 <광장>을 읽다 보니 그런 생각이 절로 떠오른 것.
최근 습득한 서사학과 신화학 이론을 접목시켜 다시 디벨롭한다면 학회에 발표해도 손색이 없을 것 같았다.
‘물론 그건 내 생각일 뿐이지. 선생님들께 보여드리면 박살 날지도 몰라.’
그때였다.
“박 쌤!”
옆에서 누가 버럭대자 민우가 정신을 차리고 멈춰 섰다.
“예?”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사람이 불러도 대답을 안 하고.”
“아, 죄송합니다. 잠시 딴생각을 했네요.”
“오늘 저녁에 치맥 하러 갈 건데 박 쌤도 껴요. 전에 공연 보러 간 날도 안 왔잖아요.”
난감했다.
이게 사회생활의 어려움이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었다. 그런 게 차츰 모여 민우를 직장인으로 성장시키고 있었다.
“그게…… 요즘 이것저것 준비할 게 많아서요. 죄송한데 다음에 참가하겠습니다.”
“또 바쁘시구나. 에휴. 박 쌤이랑 술 한잔하기 정말 힘드네. 명인대생들은 다 이렇게 공붓벌레인가.”
“그건 아닐걸요.”
곁에 있던 장철호가 턱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쏠렸다.
의자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는 윤정민 팀장의 모습이 보였다.
정은아 대리가 손뼉을 쳤다.
“그렇지 참. 윤 팀장님도 명인대 출신이시지.”
“팀장님을 보면 가끔 명문대의 거품이 벗겨지는 듯한 느낌이 들긴 하죠.”
“그러게. 아주 좋으신 분이야.”
직원들이 농담 삼아 하는 말이었다. 윤정민 팀장도 딱히 뭐라 하지 않았다. 자유로운 의견의 표출. 그것이 인문사회팀의 기치였으니까.
민우가 고개를 살짝 숙였다.
“다음에 꼭 낄게요. 죄송합니다.”
“아뇨. 뭐 죄송할 거 있나요. 아 참, 박 쌤. 공연에 관심 좀 있죠? 인문학 하는 사람이니까.”
“예. 뭐 가끔 보러 가긴 합니다.”
실은 별 관심 없었다. 민우는 공연보다 영화를 더 좋아하는 편이었다.
정은아 대리가 표를 두 장 건넸다.
“아는 동생이 극단에서 조연출을 하는데. 이번에 연출가로 데뷔한다고 표를 좀 보내왔어요. 전에 울 팀 사람들이랑 봤던 건데 나쁘지 않더라고요. 시간 되면 여자친구랑 같이 가요.”
“같이 갈 여자친구……가 없는데요.”
“그럼 만들어서 가야지! 사나이가 왜 그렇게 자신감이 없어요? 공연은 내일모레까지니까 그 안에 여친 만들어서 꼭 가요.”
“하하하. 대리님 오늘 좀 잔인하신데요?”
곁에 있던 장철호가 웃음을 터트렸다. 애인 있는 자의 여유였다. 그 소리에 윤정민 팀장이 잠에서 깼다.
“음냐. 뭐야. 무슨 일들이야?”
“아뇨. 아무것도 아닙니다.”
모임은 자연스레 파했다.
민우는 티켓을 쥔 채 연구실로 돌아왔다.
‘어디 보자.’
공연 제목은 ‘21세기 마리오네뜨’였다. 카렐 차페크(Karel Capek)의 희곡 중 하나인 <로숨의 유니버설 로봇 Rossum’s Universal Robots>을 재해석한 작품이라고 설명되어 있었다.
‘아, 딱 봐도 재미없는 공연이겠는데.’
민우는 예전에 읽었던 기억을 떠올렸다. 희곡이었기 때문에 읽기는 어렵지 않았지만, 내용은 썩 끌리지 않았다.
1920년에 발표된 이 작품은 인간과 로봇의 갈등을 다루고 있다. 인간을 노동으로부터 해방시키려고 로봇을 개발하는데, 결국 그 로봇들이 인류 문명을 말살시킨다는 내용이다.
생명을 가진 인간의 존엄성, 그리고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는 노동 문제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해 주는 그런 작품이다.
‘정 대리님 성격이라면 봤는지 안 봤는지 물어보시겠지?’
결국, 민우는 보기로 결정했다. 표까지 받았는데 성의를 무시할 순 없었다.
이제 누구와 함께 가야 할지를 생각할 차례였다. 자연스레 생각나는 한 사람.
‘수빈이 녀석. 시간 괜찮으려나.’
민우는 우선 스케줄을 확인했다. 내일모레, 공연의 마지막 날에 그나마 여유가 있었다. 저녁이라면 괜찮을 것 같았다.
민우는 바로 수빈에게 톡을 보냈다.
― 빈아. 내일모레 저녁 시간 괜찮으면 공연 볼래?
이수빈: 도착했어요?
민우는 순간 아차 싶었다. 도착하면 연락하라던 수빈의 말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 쏘리. 지금, 도착했어
이수빈: ^^……
― 진짜야
이수빈: 흠… 뭐 됐어. 내일모레 괜찮아. 몇 시 공연?
― 7시 반
이수빈: 그럼 그날 시간 비워둘게. 제목이 뭐야?
― 21세기 마리오네뜨. 카렐 차페크의 로섬의 유니버설 로봇을 재해석한 작품이라는데
이수빈: 원작 안 읽어봤는데. 한번 봐야겠다. 오빠 혹시 가지고 있어?
― 내일 갖다 줄게
수빈과 약속을 잡고, 몇 마디 잡담을 나눈 민우는 핸드폰을 넣고 컴퓨터를 켰다. 실적에 대한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최인훈 논문을 어디다 백업해 뒀었지?’
메일함을 열어 키워드를 입력했다. 마침 인쇄할 때 백업해 둔 게 있었다. 논문 파일을 데스크탑에 저장하고 더블 클릭했다.
스크롤을 내리며 천천히 논문을 다시 훑었다. 여전히 어딘가 엉성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한숨이 흘러나왔다.
민우는 빠르게 지식을 흡수하고 있었지만, 아직 그 지식을 풀어내는 능력은 다소 부족했다. 아니, 많이 부족했다.
‘학회에 제출할 만한 수준으로 다듬으려면 시간이 좀 걸리겠다. 민 선생님께 보여드리고 도움을 받는 게 좋겠는데.’
사실 서지훈 교수가 생각나긴 했다.
하지만 민우는 그건 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도 가르치는 대학원생들이 있고 또 자신의 대학원 지도교수는 민영환 교수니까.
‘아니. 아직 민 선생님께 도움을 받을 만한 시기는 아니야. 신중할 필요가 있다.’
민우는 서지훈 교수의 충고를 떠올리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었다.
― 도움을 받는답시고 함부로 논문을 남한테 보여주지 마라. 네 논문이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나가는 걸 바라지 않는다면.
당시 서지훈 교수는 누군지 분명히 언급은 하지 않았지만, 맥락상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민영환 교수.
그가 제자의 연구물을 훔쳤다는 얘기를 듣지는 못했다. 하지만 유비무환(有備無患)이라 했던가. 민우는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민우는 후보군 중에서 교수들을 모조리 지웠다. 그러다 보니 대학원 동료들이 남았다.
‘믿을 만한 선배는 재환 선배랑 민식이 형뿐이네. 아직까지는.’
생각보다 아군이 많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자. 사람을 알아가는 것은 그만큼의 시간이 필요로 한 법이니까.’
일단 민우는 논문 파일을 종료했다. 틈틈이 디벨롭해서 선배들에게 조언을 듣기로 했다.
민우는 습관적으로 메일을 확인하다 일전에 전남규 차장이 보낸 메일에서 손가락을 멈췄다.
‘참, 답장을 한다는 걸 깜빡했구나.’
민우는 곰곰이 생각하다 자리에서 일어섰다.
답장하는 것보다는, 직접 출판기획실로 찾아가는 게 더 나을 거라고 생각에서였다.
* * *
“안녕하세요.”
입구 쪽 여직원은 기억력이 별로 좋아 보이진 않았다. 민우를 알아보지 못했다.
“어디서 오셨죠?”
“인문사회연구소에서 왔습니다. 전에 한 번 뵈었죠?”
“아 전에 브리핑하셨던 분이구나. 무슨 일로 오셨나요? 미리 연락 온 건 없었는데…… 실장님은 지금 외근 나가셨고요.”
“브리핑 때문에 온 건 아니구요. 전남규 차장님을 뵈러 왔습니다.”
“저쪽으로 가 보세요.”
민우는 여직원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걸으며 파티션에 걸려 있는 이름을 열심히 훑었다.
곧 전남규 차장의 이름이 보였다.
민우가 그 옆으로 가서 그에게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차장님. 안녕하세요. 인문사회연구소 박민웁니다.”
“예? 인문사회팀에서 무슨 일로.”
“메일 받고 연락드리려고 했는데 직접 찾아뵙는 게 나을 것 같아서 왔습니다.”
“메일이요?”
전남규 차장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그는 민우의 정체를 조금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네. 제가 바로 별사탕입니다.”
멍하니 민우를 바라보던 전남규 차장이 벌떡 일어섰다.
“블로거 별사탕 님이 민우 씨라고요?”
“맞습니다.”
순간 출판기획실에 정적이 찾아왔다.
모든 직원들이 일하다 말고 민우를 바라본 것이다. 국제교류팀에서 공식적으로 협조 요청이 온 이후로 블로거 별사탕은 모두의 관심을 받고 있었다.
“믿지 못하시는 거 같은데. 보여드릴게요.”
민우는 핸드폰을 열어 블로그 화면을 띄웠다. 닉네임이 별사탕이었고, 블로그에 관리 버튼이 분명히 보였다.
그제야 전남규 차장은 현실을 인정했다.
“아, 이런. 전혀 모르고 있었는데. 이거 정말 당황스럽네요. 같은 식구일 줄이야.”
“죄송합니다. 답장을 보내려다가 깜빡해서.”
민우는 갑의 위치에 있었지만 최대한 공손하게 행동했다. 그래서일까. 민우를 대하는 전남규 차장의 태도가 더욱 진지해졌다.
“아닙니다. 아니에요. 아, 이걸 어쩌지. 하하, 죄송합니다. 너무 깜짝 놀라서.”
“바쁘시면 제가 나중에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아이고, 괜찮습니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서 얘기 좀 나누실까요?”
“그러시죠.”
전남규 차장이 앞장을 섰다. 민우는 출판기획실 직원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회의실 안으로 들어갔다.
저렇게 어린 사람이었어?
출판기획실 직원들이 모여 쑥덕거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