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35. 행운의 티켓 (1) (35/500)


035. 행운의 티켓 (1)
2021.04.22.


서지훈 교수가 돌아간 지 한 시간도 안 돼서 동구청에서 연락이 왔다. 공공기관의 일처리 속도에 의문을 갖던 민우는 깜짝 놀랐다.

― 처음 인사드립니다. 주무관 김유신입니다. 박민우 선생님이시죠?

“아아. 예. 맞습니다.”

― 우선 저희 사업에 협조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거 찾아뵙고 인사를 드려야 하는데 전화로 대신해 죄송하네요.

“괜찮습니다.”

― 통화 괜찮으시죠?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프로그램에 대한 개략적인 설명을 들었다.

서지훈 교수에게 들었던 것과 큰 차이는 없었다. 자세한 내용은 메일로 받는 게 편할 것 같아 민우가 자료를 부탁했다.

― 그럼 또 인사드리겠습니다. 메일은 준비해서 보내드리겠습니다.

“예. 감사합니다.”

전화를 끊고 5분 뒤에 바로 메일이 왔다. 오후쯤 오지 않을까 싶었는데 또다시 놀랐다.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강의구나. 생각보다 규모는 크지 않네.’

20명 내외의 인원이 참여하는 강의였다. 생활이 어렵거나 교육 혜택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청소년들이 참가하게 된다고 한다.

장소는 동구청 소회의실. 프로그램 기간은 7월부터 8월까지였는데, 민우가 배정받은 날짜는 7월 9일 토요일이었다.

페이는 20만 원이었다. 단발성 강의임을 생각해 볼 때 적당한 조건이었다.

‘날짜도 나쁘지 않고. 공모전 예선 접수가 끝난 이후니까 잠깐 내려가서 강의하고 올라오면 되겠다.’

하지만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민우는 공란으로 되어 있는 강의주제에 시선을 멈췄다.

‘인문학 강의라면 어떤 걸 주제로 해야 하지? 애들 대상이니 서사학이나 신화학을 본격적으로 다룰 수는 없고.’

아쉬웠다.

만약 관련 주제로 강의를 했다면 학계 최신의 트렌드를 설명하며 분위기를 주도해 나갈 수 있었을 텐데.

일단 천천히 생각해 보기로 하고, 민우는 오전 공부를 위해 도서관으로 들어갔다.

까똑!

민우는 움찔 놀라 핸드폰을 꺼냈다. 깜빡하고 진동모드로 해놓지 않았다.

톡이 하나 팝업되어 있었다.

‘누나잖아?’

민아는 사진을 하나 보냈는데, 얼마 전에 치렀던 TEPM 성적표였다.

‘맞다. 오늘 성적표 나오는 날이었지? 어디 볼까.’

점수를 확인한 민우는 깜짝 놀랐다.

‘827점? 뭐야 이거. 사기잖아!’

상당히 높은 점수였다. 민우가 명인대 입시 때 열심히 공부해도 701점을 받았으니, 누나는 그보다 한두 단계 더 위인 것이다.

‘이 대악마. 대체 공부를 얼마나 악랄하게 한 거야?’

그래도 납득이 갔다. 누나도 노력이라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으니까. 똑똑하기까지 하니 뭘 해도 금방 성과를 올리는 편이었다.

민우는 열람실 밖 계단으로 나가 대악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 쩔지?

“대체 무슨 수작을 부린 거야? 827점이라니. 말도 안 돼. 이건 사기야.”

― 하하하하. 이게 누님의 진짜 실력이란다. 701점 받은 명인대 국문과의 아무개 씨랑은 차원이 다르지. 과외 필요하면 얘기해 짜샤. 울지 말고. 싸게 해 줄게.

민아는 기분이 정말 좋아 보였다. 전화로 이렇게 웃는 것은 거의 처음이었다.

민우는 잘됐다고 생각했다.

살다 보면 노력의 대가가 공정하지 못한 경우가 있다. 운때가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나는 충분한 대가를 받은 거 같다.

“됐거든요. 길고 짧은 건 대봐야지. 나도 이따 성적 확인해 볼 거야.”

― 위대하신 명인대 석사님께서 설마 나보다 점수가 낮진 않겠지?

민우도 민아와 같이 TEPM 시험을 치렀다. 안경을 쓰지 않고서. 실력을 객관적으로 평가할 만한 자료가 필요했다.

리스닝 부분이 좀 힘들긴 했지만 나머지는 완벽해 고득점을 기대하는 중이다.

“그건 열어봐야 아는 거지. 그럼 바로 이직 준비하는 거야? 그 정도 점수면 해볼 만한 거 같은데.”

― 이직은 여기저기 알아보고 있긴 한데 아직 준비해야 할 게 남았다. 참, 수빈이는 잘 있니? 언제 밥 한번 먹자고 했는데 통 못 봤네.

“잘 있지 뭐. 요즘 공모전 준비한답시고 정신이 없다. 내가 따로 시간 잡아서 알려줄게.”

― 아무튼, 바쁜 척은 잘해요. 수빈이 잘 챙겨 줘. 어디 가도 그런 사람 없다.

민우는 웃었다. 일전에 술집에서 두 사람이 하는 말을 모두 들었다. 그 말에 담긴 의미가 무엇인지 모를 리가 없다.

“누님이나 잘하시죠. 어디 가도 나 같은 동생 없으니.”

― 맞아. 너같이 철없는 놈이 세상에 또 있겠어?

“어휴, 동생으로 태어난 내가 죄지. 끊는다. 점심 맛있게 드셔.”

통화를 마친 민우는 정보열람실로 내려갔다. 컴퓨터 하나를 잡고 TEPM 공식 홈페이지로 이동했다.

간단한 절차를 거치니 성적표가 띄워졌고, 점수를 확인한 민우는 씨익 웃었다.

957점.

거의 만점에 가까운 점수였다.

TEPM이 상대평가로 점수가 매겨져 만점이 거의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거의 최상위 점수였다.

‘좋아. 이걸로 영어시험은 패스다!’

명인대에서 석사 논문을 쓰기 위해서는 크게 세 가지 절차가 필요하다.

첫째, 소정의 학점을 모두 이수하는 것. 명인대학교 국문과 석사과정은 3학기 동안 총 24학점을 이수해야 한다.

둘째, 종합시험을 치르는 것. 18학점 이상을 이수한 학생들은 종합시험을 볼 자격이 생긴다. 총 세 과목을 치르게 된다.

셋째, 영어시험. 교내에서 치르는 시험에 응시하여 일정 점수 이상을 획득해야 한다. 영어 자격시험 점수로 대체가 가능하다.

이 중 민우는 세 번째 항목을 해결한 것이다. 커트라인이 800점이니 957점을 받은 민우는 성적표만 제출하면 시험이 면제된다.

‘이대로 당하기만 할 수는 없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다!’

찰칵!

민우는 성적표를 핸드폰으로 찍어 누나에게 전송했다.

숫자 1이 사라지자마자 격한 반응이 쏟아졌다.

철없는 동생의 표본을 제대로 보여준 민우는 낄낄거리며 열람실로 돌아갔다.

* * *

정오가 되기 전에 민우는 중앙도서관을 나섰다.

“오빠.”

도로와 이어진 계단 한쪽 구석에 서 있는 수빈의 모습이 시야에 잡혔다.

하얀 볼륨 블라우스에 스키니한 느낌의 반바지를 입었는데, 바지가 너무 짧아 하의를 입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학기 초에는 매일 비슷한 옷을 입고 다녔는데 요즘 들어 다양한 코디를 선보이고 있는 수빈이었다.

수빈이 총총 뛰어올라 왔다. 민우는 그녀보다 빠르게 계단을 내려갔다.

“더운데 왜 뛰고 그러냐. 내가 내려가면 되는데.”

수빈은 멈칫하며 볼을 붉혔다. 뜻밖의 배려에 가슴이 두근거린 것이다.

“근데 진섭이는?”

“진짜 많이 피곤하긴 한가 보다. 섭이 오빠 오늘 점심 약속 있다고 한 거 기억 안 나?”

“아, 그랬었지.”

어제 술자리에서 잠깐 얘기가 나왔던 걸 까먹고 있었다. 민우는 수빈과 함께 중앙도서관을 나섰다.

“학식?”

“오늘은 맛있는 거 먹으면 안 돼요? 정문 근처에 볶음밥집 새로 생겼다던데. 전에 예진 언니가 추천해 줬어.”

“걸어가긴 좀 더운데.”

“그래도 가요. 응?”

“야, 근데.”

민우를 끌고 가려던 수빈이 멈춰 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너 반말할 거면 확실히 해. 섞어서 쓰니까 이상하잖아. 이도 저도 아니고 뭐야 그게?”

“아직 존대가 입에 굳어서. 나름 노력하고 있다구요. 아니. 있어! 헤헤.”

“애쓴다 정말.”

“아무튼, 빨리 가요. 아니 가자! 나 배고파.”

민우는 수빈이 끌고 가는 대로 몸을 맡겼다. 그러다 보니 수빈이 민우의 팔짱을 끼고 가는 꼴이 되고 말았다.

정문까지는 걸어서 15분 정도가 걸렸다.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그래도 수빈은 뭐가 그리도 즐거운지 쉴 새 없이 옆에서 재잘거렸다.

그렇게 두 사람은 새로 오픈한 철판볶음밥집으로 들어갔다. 에어컨이 돌아가고 있었다. 천국에 온 듯한 기분이었다.

“뭐가 맛있대?”

“치즈불닭볶음밥이요.”

민우는 거기에 사이다를 추가해 주문했다. 곧 음식이 나오고 불판에서 지글지글 익기 시작했다.

과연 깐깐하기로 유명한 박사 2학기 강예진의 미각은 정확했다. 주문한 음식은 민우의 입맛에도 딱 맞았다.

“맛있네. 다음에 선배한테 또 추천해 달라고 해야겠다.”

“그러게요. 정말 맛있었어. 커피는 내가 살게요.”

“아 쫌 통일하라니까! 하나로.”

“내 맘이지롱.”

수빈은 혀를 살짝 내밀었다. 이제는 즐기고 있는 게 분명했다.

배불리 먹은 두 사람은 더위도 피할 겸 근처에 있는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공모전으로 잠시 분위기가 진지해졌다. 민우는 수빈이 체할까 봐 인문학 강좌에 대한 이야기로 화제를 바꾸었다.

“그런 것도 있었구나. 어떻게 하게 된 거야?”

“오늘 아침에 서지훈 선생님 오셨었거든. 그때 말씀해 주시더라고. 해 볼 생각 없냐고.”

“서지훈 선생님이? 그럼 나도 불러주지. 선생님 한번 뵙고 싶었는데.”

“왜?”

“우리 과에서 되게 유명한 분이거든. 이런저런 일화도 굉장히 많고. 학부 때부터 남다르셨다고 들었어.”

남다르다.

그 말에 문득 민우는 예전부터 들었던 궁금증을 떠올렸다.

‘근데 선생님은 왜 상아대를 선택하신 거지?’

능력 면에서 그는 충분히 명인대에 임용이 될 수 있었다.

연구 업적은 물론 강의 평가도 거의 만점에 육박했다. 실제로 명인대에서 제안을 받았다고 들었는데, 그는 상아대를 선택했다.

민우의 생각이 깊어졌다.

“오빠?”

“아, 미안. 선생님이 좀 바쁘시더라고. 나도 얼마 못 뵈었어.”

“그래도 담에 꼭 불러줘. 응?”

“알았다.”

“아니면 나중에 대전에 같이 내려가요.”

“그건 안 돼.”

“치이.”

민우는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점심시간이라 많은 학생들이 정문을 오가고 있었다. 왠지 자신의 시간만 멈춘 것 같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근데 강의주제는 뭐로 정했어?”

수빈이 묻자 민우가 다시 그녀를 주목했다.

“고민 중인데. 애들 대상으로 하는 거라서 정하기가 쉽지 않네.”

“오히려 나이대가 낮으니 어렵구나.”

민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차라리 학부생들을 가르치는 게 속 편할 것 같았다.

“그래도 완전히 막연한 건 아냐. 뭔가 좀 특별한 게 필요할 것 같다는 실마리는 잡고 있어.”

“특별한 거?”

“아무래도 소외계층을 대상으로 하는 강의니까, 그 친구들의 지식보다는 마음을 보듬어 줄 수 있는 수업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해서 말야.”

수빈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마음 깊숙이까진 이해하지 못했다. 민우처럼 어려운 시절을 보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민우가 대단하다는 생각만 할 뿐이다.

대화가 끊겼다. 그래도 두 사람은 어색함을 느끼지 않았다.

“아, 맞다.”

수빈이 뭔가 생각났다는 듯 가방을 열었다. 그녀가 꺼낸 것은 피로회복제였다.

“오빠 아침에 목소리 피곤한 거 같아서 샀는데. 이거 마시면서 공부해요.”

“커피에 바커스까지…… 잠잘 생각 말고 계속 공부나 하라는 건가.”

“그런 거 아냐!”

살짝 토라진 수빈이 귀여웠다. 연애한다면 이런 느낌일까. 민우는 그렇게 생각하며 피로회복제를 손에 꼭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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