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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4. 인문학이란 무엇인가 (3) (34/500)


034. 인문학이란 무엇인가 (3)
2021.04.19.


송승현이 실장실에서 나왔다. 복도를 걸어 전남규 차장의 자리에 섰다.

“차장님.”

“아, 옙.”

깜짝 놀란 전남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두 손을 앞으로 모으고 공손히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전화로 지시를 내려도 될 텐데, 송승현 실장은 대면보고의 결과를 늘 이렇게 직접 전달하곤 했다.

그녀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중시하는 리더였다.

“아까 그 메일 건 있죠. 진행하는 게 좋겠습니다. 일단 신상 파악하고 컨택해 보세요.”

“알겠습니다. 이후에는 어떻게 진행하는 게 좋겠습니까? 가이드라인이 필요한데요.”

“일단 이야기를 나눠봐야겠지요? 그쪽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들어볼 필요가 있으니까.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도 중요할 것 같고. 미팅 후에 보고서 작성해서 올려요.”

송승현은 직접 만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전남규 차장 정도면 알아서 일을 잘 마무리해 줄 거라고 판단했다.

“계약은 진행하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그건 1차 미팅 후에 조율해 봐요.”

“알겠습니다. 실장님. 그럼 바로 추진하겠습니다.”

“잘 부탁해요.”

송승현은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책상으로 돌아오는 와중에 문득 빈 공간이 느껴져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렸다.

책장이 보였다. 빈 곳은 <소크라테스의 변명>이 꽂혀 있던 자리였다.

‘어리긴 하지만 그래도…….’

덜 여물었지만 민우의 눈빛에서 진심과 열의를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상과 현실 사이에는 늘 괴리가 있는 법이니까.’

책상으로 돌아온 송승현 실장은 민우가 남기고 간 서류철을 열었다. 한참 동안 그것만 바라보며 생각하다 전화기를 들었다.

내선번호 217을 눌렀다. 곧 인문사회팀 윤정민 팀장의 자리로 연결됐다.

“윤 팀장님. 송승현입니다. 예. 아뇨, 급한 건 아니고 자료 하나 좀 부탁하려고요. 인문사회연구소에 박민우 씨라고 있죠? 그 사람 이력서 좀 부탁해요. 예. 메일로요.”

잠시 후 이력서가 메일로 도착했다. 조용히 움직이던 그녀의 눈이 이력서의 학력란에서 뚝 멈췄다.

― 상아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송승현 실장의 모든 관심이 그 한 대목에 집중되었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그녀는 이력서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문득 생각나는 한 사람이 있었다.

* * *

‘으아. 벌써 아침인가.’

민우는 이불에서 몸을 일으켰다. 벌써 새벽빛이 커튼을 비집고 들어오고 있었다.

생각이 많아 밤을 꼬박 새웠다.

이제는 단행본 출간이 문제가 아니라, 자신이 왜 공부를 하는 것인지에 대한 회의감이 들었다. 그러다 보니 한숨도 자지 못했다.

‘안 돼! 생각하지 마! 그만해!’

민우는 고개를 세차게 내저었다. 또다시 어제 일이 복기 되며 머릿속이 복잡해지고 있었다.

석사 1학기.

그는 지금 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행동이 무엇인지를 고민했고, 여느 때와 같은 일상을 반복하는 것이라는 답을 얻었다.

‘기분 전환엔 역시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게 최고지. 하하하!’

민우는 간단히 씻고 아침을 먹었다. 메뉴는 3분 카레. 디저트로 루카치의 유고를 읽는 것도 빼먹지 않았다.

신기하게도 그걸 읽으면 정신이 맑아졌다.

그래서 민우는 매일 아침 일과를 시작하기 전에 유고를 읽는다. 이어서 써야 한다는 부담감이 없잖아 있지만, 그건 나중의 문제다.

드르르르―

전화가 왔다.

언제부터인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요즘 들어 매일 정해진 시간에 오는 전화였다.

― 오빠. 일어났어요?

“어, 그게. 일어났다는 표현은 좀 그러네. 한숨도 못 잤어.”

― 왜?

“그냥. 좀 생각할 게 많아서. 학교야?”

― 지금 가고 있는데, 어디 아픈 거 아니지?

“너무 건강해서 탈이지. 걱정하지 마. 이따 학교에서 보자.”

전화를 끊었다.

이수빈에게서 온 전화였다. 처음으로 영화를 본 날 이후, 두 사람의 거리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변화는 크고 작은 형태로 나타났다.

둘만 있을 때 수빈이 반말을 섞어 쓰게 된 게 큰 변화였고, 개인 톡으로 사적인 이야기를 많이 하게 된 게 소소한 변화였다.

흔히 말하는 ‘썸’을 타고 있는 두 사람.

그래도 민우는 서두르지 않았다.

아직 수빈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그녀가 자신을 좋아한다고 해서 그 마음을 이용하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내일은 내가 먼저 전화를 해 볼까? 늘 받기만 하니까 뭔가 미안한데. 어려운 일도 아니니 한번 해 보자!’

당연한 일을 뒤늦게 깨닫는 민우였다.

아무튼, 그는 아침 9시가 되어서야 명인대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창에 머리를 기댄 채 핸드폰을 켰다. 매번 하는 일은 새로운 메일이 왔나 보고, 블로그 댓글과 방명록을 체크하는 것이었다.

블로그 쪽은 댓글 하나 없이 깨끗했다. 그런데 메일이 하나 와 있었다.

‘지음사에서? 업무 관련 메일인가.’

그건 아닌 모양이었다.

발신인을 보니 출판기획실이다. 민우는 연구소 소속이기 때문에 다른 팀에서 메일을 받을 일이 거의 없다.

‘잠깐. 혹시 어제 브리핑 때문에?’

메일이 열렸고, 민우의 눈이 행간을 따라 부지런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잠시 후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걸렸다.

‘드디어 물었구나!’

메일을 보낸 것은 송승현 실장이 아니라 전남규 차장이었다.

블로그를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고, 그것과 관련해 미팅을 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언젠가 이런 컨택이 올 거라는 생각은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지음사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대학 부설 연구소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런데 죄송해서 어쩌죠? 저는 송승현 실장님이 지적하신 것처럼 SCI급은커녕 KCI급 저널에도 논문을 실은 적이 없는 잉여인데!’

마음 같아서는 그렇게 답장을 보내고 싶었다.

하지만 민우는 일단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지금은 신중해야 할 때였다.

‘이번 제안을 잘 이용한다면 나에게 유리한 상황을 만들 수 있을지도 몰라. 아껴 뒀다가 조커로 활용해야지.’

그때 진동이 울렸다.

핸드폰을 꺼내 발신자를 확인한 민우가 깜짝 놀랐다. 즉시 통화버튼을 눌렀다.

“예, 선생님.”

― 바쁘냐?

“아닙니다. 말씀하세요.”

전화를 건 사람은 모교 지도교수인 서지훈이었다. 그가 먼저 연락을 해오는 경우는 매우 드물어 민우가 놀란 것이다.

― 좀 상의할 일이 있는데 한번 볼 수 있나 해서 말이다. 오늘 괜찮을까?

“오늘이요? 오늘은 좀…… 아무래도 대전에 내려가려면 여유가 필요해서요. 내일은 어떠세요?”

― 내려올 필요 없다. 나 지금 명인대니까.

“아! 지금 학교 가는 길입니다. 선생님 시간 괜찮으시면 바로 만나도 괜찮습니다.”

민우는 서지훈 교수와 약속을 잡았다. 오전 10시에 경영대 뒤쪽에 위치한 카페 미엘에서 만나기로 했다.

‘무슨 일로 서울에 오신 거지?’

그런 궁금증을 품에 안으며 민우는 307호에 들렀다. 오늘 읽어야 할 논문과 책을 챙겨 들고 바로 카페 미엘로 향했다.

서지훈 교수는 이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민우를 보며 손을 들었다.

“너 얼굴이 왜 그래? 논문 쓴 거 또 이면지함으로 들어갔냐?”

“이제 그 정도로는 어림도 없죠. 면역이 돼서.”

“이야, 많이 컸다. 이제 석사 논문 써도 되겠네. 하하하!”

민우는 멋쩍게 웃으며 맞은편에 앉았다. 창가 자리라 햇빛이 들고 좋았다. 더워지려면 아직 여유가 더 필요한 시간이다.

“여기서 뵈니까 뭔가 기분이 이상해요. 매번 상아대에 계신 것만 봐서 그런가.”

“이상할 거 뭐 있나? 내 학교 내가 찾아온 건데.”

“그러게요.”

맞는 말이었다. 서지훈 교수는 학부 지도교수기도 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대학원 선배기도 하다.

“가만있지 말고 뭐 하나 시켜라. 시원한 걸로.”

서지훈 교수의 신용카드를 받아들고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비싼 걸 마실 기회였지만 지금은 카페인이 필요했다.

음료를 받아 온 민우가 물었다.

“그런데 여긴 무슨 일로 오셨어요?”

“왜 왔겠어. 송현우 그 양반 만나러 왔지. 이따가 출판사에도 잠시 들러야 하고. 겸사겸사 맞춰서 올라왔다.”

서지훈 교수의 지도교수가 바로 송현우였다. 듣기로는 학부 및 대학원 시절 송현우 교수가 매우 총애하던 제자였다고 한다.

“그런데 너. 뭐 사고 친 거 있냐? 송 선생님 입에서 네 이름이 튀어나오던데. 깜짝 놀랐지 뭐야.”

“말씀 못 들으셨어요?”

“못 들었으니까 묻는 거지.”

“아, 그게 말입니다.”

얼마 전에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캠벨의 이론을 찾은 것을 시작으로 박사 논문 프로포절에서 있었던 일 모두를.

서지훈 교수는 말 그대로 깜짝 놀랐다.

“그런 일이 있었어? 아니, 네가 진짜 그런 일을 해냈단 말야?”

“운이 좋았죠.”

“하하하하하!”

모두의 시선이 이쪽으로 쏠렸다. 당황한 민우는 주변에 머리를 숙이며 사과했다.

“어쩐지 민 선생 표정이 뭐 씹은 거 같더라니! 오전에 잠깐 인사할 일이 있었거든. 하하하! 그랬구나. 그랬어. 잘했다. 역시 내 새끼야!”

자신의 일처럼 기뻐하는 서지훈의 모습을 보니 마음이 뿌듯해졌다.

하지만 그것은 지나간 일이다.

언제까지 과거의 성공에 도취 되어 있을 민우는 아니었다. 이제는 더 앞으로 나아가야 할 때였다.

“그런데 선생님. 상의할 일 있다고 하셨잖아요.”

“아 참, 내 정신 좀 봐. 음, 그게…… 뭐 큰일은 아닌데 부탁 하나만 하려고.”

부탁?

서지훈 교수의 입에서 쉽게 들을 수 없는 단어였다. 그는 잔심부름조차 제자들에게 시키지 않는 사람이었다.

민우는 정자세로 다음 말을 기다렸다.

“대전 동구청에서 주관하는 강의 프로그램이 하나 있는데 혹시 해 볼 생각 없나?”

“무슨 프로그램인데요?”

“소외계층을 대상으로 하는 강의인데, 인문학 관련 주제라면 어떤 거든 오케이야. 특강 형식이라 한 번만 하면 되니 부담도 없을 텐데. 어때?”

“인문학…….”

그 단어를 들으니 왠지 막막해졌다. 어제 실장실에서 있었던 일로 자신감이 거의 바닥을 치고 있었다.

서지훈 교수가 정확히 그 표정을 읽었다.

“왜. 싫어?”

“아뇨. 싫은 건 아닌데. 좀 자신이 없어서요.”

“자신이 없다니? 이야. 서울 더위가 무섭긴 무서운가 보다. 너 자신감 하나로는 상아대 수석이었잖아.”

어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할까 하다가 말았다. 언제까지 서 교수에게 빚을 질 수는 없었다.

“이제 막 대학원에 들어왔는데 강의 같은 걸 할 만한 짬이 되나 싶기도 하고. 저 아직 스물여덟밖에 안 됐잖습니까.”

“나이는 숫자일 뿐이고 누구에게나 처음은 있어. 강의를 한다고 누군가를 가르치러 간다고 생각하지 마. 강단에 서보면 알겠지만 너도 분명히 배우는 바가 있을 거다.”

‘배우는 바’라는 표현에 막연한 기대감이 들었다. 어쩌면 이번 강의를 통해서 뒤엉킨 실타래를 풀 수 있지 않을까?

무엇보다도.

‘도망치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언젠가 서 교수가 했던 말 중 하나가 떠올랐다. 연구실에서 답을 얻을 수 없다면 강의 현장에서 얻으면 된다는.

민우는 결심을 굳혔다.

“저라도 괜찮다면 하겠습니다.”

“잘 생각했어. 그럼 담당자한테 네 번호 알려줄게. 어이쿠.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나? 나 이만 가야겠다. 출판사 미팅이 있어서. 밥은 다음에 먹자고.”

서지훈 교수가 서둘러 일어섰다. 민우는 조금 아쉬웠지만 다음 만남을 기약하며 그를 주차장까지 배웅했다.

“근데 어디 출판사 가세요?”

“지음사. 이태준 전집 출간 때문에 미팅이 있어. 군침 돌지 않냐? 너 나중에 박사 따고 오면 한자리 끼워줄게.”

“그날이 오기나 할까요. 아무튼, 잘 다녀오세요. 또 연락드리겠습니다.”

“얼굴 좀 펴고.”

“옙.”

곧 서지훈 교수의 구형 소나타가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차 좀 바꾸시지. 명색이 명인대 출신 교수라는 분이.’

차는 굴러가기만 하면 된다는 그의 지론을 언제 깰 수 있을까. 민우는 학부 시절을 추억하며 인문관으로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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