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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3. 인문학이란 무엇인가 (2) (33/500)


033. 인문학이란 무엇인가 (2)
2021.04.16.


민우는 송승현 실장이 준 책을 허리에 끼고 연구실로 돌아왔다.

마음이 복잡했다.

기획서가 통과되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공격을 당해서도 아니었다.

‘대답을 하지 못했어.’

인문학이란 무엇인가.

민우는 마지막에 던져진 송 실장의 질문에 대답을 하지 못했고, 그것으로 민우의 첫 브리핑은 끝이 난 것이다.

‘문제의식도 없이 인문학의 본질이니 뭐니 운운했으니 얼마나 웃겼겠어. 아아. 최악이다.’

그뿐이 아니었다. 송 실장의 치명적인 한마디가 민우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 본인이 이뤄 놓은 학문적 성취는 아무것도 없는데, 학문이란 이렇고 이런거다라고 떠드는 건 좀 우습지 않나요?

반박할 수 있는 말은 있다. 아직 석사 1학기이고, 학계 활동을 하기에는 이른 나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같은 울타리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나 통하는 말이었다. 학문과 관계없는 분야의 사람들을 이해시키기는 어렵다.

게다가 그녀의 말은 민우가 놓치고 있던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해줬다.

국문학을 8년째 공부하고 있었는데도, 그 상위라고 할 수 있는 인문학이 무엇인지에 대해 진지하게 고찰해 본 적이 없었던 것.

‘부끄러운 일이다. 반성해야 해. 그런데 만약…… 그 질문에 대답을 했다면 어땠을까?’

결과가 조금 달라졌을 수도 있다. 어쩌면 송 실장은 자신의 이야기를 조금 더 들어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결과론적인 이야기야. 쓸모없어.’

끼릭.

민우가 고개를 젖혀 의자에 몸을 기댔다.

어쨌든 기획서는 통과되지 못했다. 그래도 아직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다. 자신이 포기하기 전까지는.

‘그런데 이 책은 왜 나한테 준 거지?’

민우는 들고 있던 <소크라테스의 변명>을 책상에 내려놓았다. 고등학교 때 읽었던가. 정확히 언제 읽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 고전이다.

‘뭔가 의미가 있는 거 같은데 잘 모르겠네.’

민우가 보기에 송 실장은 뭔가 이유 없이 행동할 만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가 책 겉면을 보며 생각에 잠겨 있을 그때 장철호가 안으로 들어왔다.

“송 실장님 뵙고 왔어?”

민우는 책을 한쪽으로 치우고 고개를 끄덕였다. 장철호가 민우의 옆자리에 앉았다.

“어땠어?”

“표정 보면 모르냐. 완전히 박살 났지.”

“연구원이 브리핑하는 건 흔치 않은 일이라 살살 하실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네. 그래도 기분은 안 나쁘지?”

철호의 질문에 민우는 멈칫했다.

생각해보니 그랬다.

상사에게 깨졌다는 느낌보다는, 자신의 한계를 발견한 느낌에 가까웠다.

“그래서 송 실장님 인기가 은근히 좋아. 냉정하게 빈틈을 파고들면서도 보이지 않는 배려가 있거든.”

“하긴, 반말을 쓰실 법도 한데 존칭을 써 주시더라. 그 점은 좀 의외였어.”

“그건 일부야.”

“또 있어?”

“직원들이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을 깔아 준다고 해야 하나. 송 실장님 밑에서 일을 했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런 말을 하더라고.”

민우의 시선이 다시 <소크라테스의 변명>으로 향했다. 장철호의 말을 들으니 왠지 이 책을 탐독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철호가 물었다.

“그나저나 너 오후 스케줄은 어때? 시간 괜찮으면 저녁에 정 대리님이 공연 보러 가자고 하시는데. 공짜 표 생겼다고 하시더라고.”

“힘들 거 같아. 이따 동기들 만나서 공모전 준비해야 해서.”

“오케이. 그럼 그렇게 전달해 드린다.”

장철호가 연구실을 나갔다. 민우는 기획서를 수정하기 위해 컴퓨터를 켰지만, 모니터를 다시 끄고 <소크라테스의 변명>를 집었다.

“소크라테스 아저씨. 도대체 인문학이란 뭡니까?”

민우가 따지듯 물었지만 그는 대답해주지 않았다.

책을 펼쳤다.

아테네인들을 향한 소크라테스의 변론이 막 시작되었다.

「아테네인 여러분! 나를 고발한 사람들의 말을 듣고 여러분들이 얼마나 많은 영향을 받았는지는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말을 듣고 나 자신도 내가 누구인지 잊을 정도였다는 것을 압니다. 그만큼 그들의 말은 설득력이 있었지요. 그러나 그들은 진실을 거의 한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 * *

“그래서 기분이 그렇게 안 좋아 보였구나.”

수빈이 측은한 표정으로 민우를 바라보았다. 마음 같아서는 손을 잡고 위로해 주고 싶었지만 옆에는 진섭이 있었다.

장소는 지음사 1층에 위치한 북카페였다. 지음사 직원은 음료를 공짜로 즐길 수 있기 때문에 이곳에 종종 모인다.

오후 네 시. 손님들이 뜸할 시간이라 분위기는 고요했다. 그 와중에 민우는 오전에 있었던 일들을 모두 풀어냈다.

“그럼 결국 공저자 부분을 수정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거겠네.”

“그렇지.”

“크아, 아깝다! 단행본 하나 뽑으면 목에 힘 딱 주고 다닐 텐데!”

진섭이 정확히 짚었다. 송승현 실장이 문제 삼는 부분은 그것밖에는 없었다. 아직까지는.

“공저로 하지 말고 민식 선배 이름만 내보내는 걸로 바꿔요. 그렇게 공격당하면서까지 무리할 필요 없는 거잖아요.”

“지음사 쪽에서 출간하는 조건이라서 안 돼. 나도 민식이 형 설득해 봤는데 불가능했어. 공저로 하지 않으면 그냥 태인사에서 낸다고 하시더라.”

“쓸데없는 데에서 고집을 부리시네.”

말은 그렇게 해도 수빈은 민식을 다시 보게 됐다. 공저로 한다는 것은, 민우의 노력을 가장 크게 인정해 주는 방법이었기 때문이었다.

진섭이 끼어들었다.

“그냥 태인사에서 내라고 해버려 그럼. 쿨시크하게.”

“진섭아. 우리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는데 생각 좀 하고 살자. 응? 그러고 싶었으면 내가 지금 이러고 있겠냐?”

“농담을 다큐로 받으면 내 입장이 뭐가 되냐?”

“아무튼, 어려운 문제네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수빈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민우의 일을 늘 자신의 일처럼 생각하는 그녀였다. 게다가 특별한 마음까지 있다. 그러다 보니 진섭과는 온도 차가 날 수밖에 없었다.

‘이 녀석. 또 걱정하는 모양이네. 야, 그러지 마!’

그녀에게 걱정을 끼쳤다는 생각이 드니 미안했다. 민우가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괜히 내 일 때문에 너희들까지 머리 아프게 했네. 미안하다. 신경 쓰지들 마.”

“아녜요. 우리가 남인가?”

“그렇지. 한배를 탄 동료잖아.”

“마지막 건 좀 오글거리니 치우고.”

그래도 친구들에게 이야기를 털어놓으니 마음이 좀 편해졌다.

문득 작년 말 서울에 처음 올라왔을 때가 생각났다.

입시 준비 때문에 힘든 일이 많았다. 돈도 넉넉지 않았고, 고민을 공유할만한 친구들이 없었다. 물리적으로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입학 허가를 받고 난 이후에도 걱정이 많았다. 과연 잘 적응할 수 있을까. 동기들과 잘 어울릴 수 있을까.

조금 어려운 부분도 있었지만, 결국 수빈과 진섭이라는 좋은 동기를 얻었다. 올해 최고의 수확이라고 할 만했다.

‘좀 더 긍정적으로 생각해볼까? 아직 시간은 충분하니까.’

민우는 빨대를 물었다. 차갑고 쓴 커피가 혀에 닿았다. 수빈의 목소리도 귀에 닿았다.

“송 실장이라는 분 말씀, 그냥 흘려들어요. 어차피 오빠가 커리어를 쌓는 건 시간문제잖아요. 박사과정 들어가면 논문도 자연스레 발표할 거고.”

“그만하라니까. 왜 사서 감정낭비를 해? 내가 알아서 할게. 이제 신경 쓰지 마.”

“어떻게 그래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오빠 일인데…….”

수빈의 말에 분위기가 이상해졌다. 가만히 듣던 진섭이 인상을 찡그렸다.

“수빈이 너 말이 뭔가 좀 묘하다?”

“뭐가요?”

“아니, 객관적으로 봐도 좀 그래. 뭔가 연인 사이에 오가는 말 같아.”

“뭔 소리예요. 그게. 그냥 걱정돼서 한 말인데.”

“수상해!”

수빈은 단호하게 잡아뗐지만, 기대하는 눈으로 민우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정작 민우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괜히 기대했나.

그래도 수빈은 웃었다. 핸드폰에 걸린 흰색 토끼 인형 고리를 만지작거리면서.

“다른 건 몰라도 송 실장님이 왜 <소크라테스의 변명>을 줬는지 모르겠어.”

“그런 거 아닐까? 소크라테스의 유명한 명제 있잖아. 네 꼬라지를 알라 뭐 이런 거.”

민우는 이제 진섭의 말을 무시하기로 했다. 수빈을 바라보며 말했다.

“솔직히 말하면…… 뭔가 내가 처한 상황과 묘하게 맞물려 있어서 머릿속이 복잡해.”

“오빠 상황이 어떤데요?”

“우리가 준비하는 공모전 말이다.”

민우가 빨대로 투명 컵을 휘저었다. 얼음이 달그락거리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두 사람은 얌전히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주제가 인문학 장려방안이고, 거기에 대해 논문을 쓰는 공모전이지?”

“그렇죠.”

“그런데 인문학이 뭔지 대답도 못 하면서 제대로 준비를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더라고. 결과적으로 수박 겉핥기밖에 되지는 않을까.”

“그건…….”

수빈이 뭐라 반문을 하려다 말았다. 듣고 보니 민우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그것은 곁에 있던 진섭도 마찬가지였다.

팔짱을 낀 민우가 두 사람에게 물었다.

“인문학이란 뭘까?”

“그게 딱 답이 나오는 문제는 아니잖아. 마치 철학이란 무엇인가랑 비슷한 질문이지.”

“그쵸. 좋은 비유네요.”

특별히 기대하고 한 질문은 아니었지만, 민우는 입이 썼다. 커피 때문만은 아니었다.

“어쩌면 답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가 공모전 준비를 헤매고 있는 건 아닐까.”

지나가듯 흘러나온 민우의 한마디.

그리고 찾아온 침묵.

그것을 무언의 긍정이라고 판단한 민우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늘 회의는 글른 거 같고. 조금 이르긴 한데 맥주나 시원하게 한잔하러 갑시다.”

* * *

노크에 이어 문이 열렸다.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던 송승현 실장이 의자를 돌렸다. 출판기획실 전남규 차장이 다가왔다.

“보고드릴 게 있습니다. 실장님.”

“하세요.”

“국제교류팀에서 메일 하나가 왔는데, 포워딩해 드렸습니다. 확인 부탁드립니다.”

“잠깐 기다려요.”

송승현은 아웃룩을 열어 새로 도착한 메일을 확인했다. 새 메일 15건 중 전남규 차장이 포워딩한 메일이 있었다.

FW: 블로그 콘텐츠 확인 요청의 건

제목을 클릭했다.

메일을 읽던 송승현의 미간이 살짝 찡그려졌다. 국제교류팀에서 보낸 메일에는 어떤 블로그 주소와 메모가 적혀 있었다.

― 다중언어에 능숙한 블로거 같습니다. 해외 인문학 관련 저술들이 요약되어 올라오고 있는데 기획실에서 향후 가능성을 판단해 컨택 요청드립니다.

송승현의 표정을 살피던 전남규가 조심스레 고개를 숙였다.

“해외 저술에 관한 일이라 다른 팀에 협조를 요청했습니다만, 실장님께서 잘 알고 계실 거라는 답변을 받았습니다. 바쁘신데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확인해 볼 테니 가서 일 봐요.”

다시 홀로 남은 송승현은 메일에 적힌 링크를 클릭했다.

네이비에서 서비스하는 블로그로 바로 연결되었다.

날카로운 시선이 메뉴를 훑었다. 문학, 예술, 철학 등의 대분류가 설정되어 있었고, 나라별로 하위 카테고리가 존재했다.

게시물은 약 30여 개. 영어를 번역한 포스팅이 가장 많았고, 최근에는 독일어 저술을 번역한 포스팅이 올라오고 있었다.

그중엔 유학 시절 송승현이 직접 읽은 저술이 꽤 있었다. 그래서 정보가 정확한지 아닌지를 따지기가 수월했다.

‘적어도 6개 국어는 한다는 얘기인데.’

곧 판단이 끝났다.

이 블로그의 게시물들은 깔끔하고 정확하게 작성되어 있었다. 볼륨이 쌓인다면 여러모로 쓸 만한 원천자료가 될 것 같았다.

‘누굴까?’

흥미가 동했다.

아직 올라온 게시물은 많지 않지만, 국제교류팀이 관심을 가질 만하다고 생각됐다.

송승현은 마우스를 움직여 블로그 정보를 확인했다.

“별사탕?”

그것은 블로그 주인장의 닉네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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