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2. 인문학이란 무엇인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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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 인문학이란 무엇인가 (1)
2021.04.15.
민우는 장철호의 자리로 갔다. 철호는 이어폰을 끼고 엑셀 작업을 하고 있었다.
“철호 씨.”
“예, 무슨 일이십니까.”
장철호는 모드 변환에 능했다. 지금은 직원들이 모두 출근해 있어 말을 높였다.
“바쁘신데 죄송한데요. 기획서 관련해서 잠시 미팅 가능할까요?”
“물론이죠. 10분 뒤에 연구실로 가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로부터 10분 뒤 장철호가 연구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민우는 기획서를 보여주며 전후 사정을 그에게 모두 설명했다.
답을 듣지 않아도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 시크한 표정으로 유명한 장철호가 난감한 기색을 보일 정도였으니까.
“으음. 꽤 어려운 퀘스트를 받았네. 송승현 실장님 브리핑은 다들 꺼려하는 거라서.”
“왜들 꺼려하는데?”
“직장 상사의 네 가지 유형이라는 거 들어 봤어? 한때 웹에서 이슈가 됐던 건데 알려나 모르겠다.”
민우가 모른다고 하자 장철호가 웃으며 설명을 시작했다.
“직장 상사의 성향을 네 가지로 구분한 거야. 똑똑하면서 부지런한 상사. 똑똑하면서 게으른 상사. 멍청하면서 부지런한 상사. 멍청하면서 게으른 상사.”
“그런 것도 있었어? 신기하네.”
“정말 공부만 하고 살았구나. 넌 별로 관심이 없었겠지만 직장인들은 공감할 만한 내용이지.”
민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왠지 또래에 비해 뒤처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이젠 익숙한 일이다.
“넌 뭐라고 생각해? 이 중 가장 힘들 것 같은 상사 유형이.”
“글쎄…… 아무래도 똑똑하면서 부지런한 상사? 뭔가 엄청 피곤해질 거 같은 느낌이야. 뭐 하나 하려고 해도 숨이 막힐 거 같아.”
“사람마다 답은 다르겠지만, 송 실장님이 딱 그 타입이야.”
장철호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리고 설명을 이어갔다.
“한마디로 엘리트지. 이성과 논리로 철저히 무장하신 분이라 우리 팀장님도 꽤 어려워하셔.”
“얘기만으로는 뭔가 좀 막연하네.”
“한번 만나보면 어떤 분인지 알게 될 거다.”
“실장님 전공은?”
“유학파라고 듣긴 했는데 뭐 전공하셨는지는 나도 잘 몰라. 학부는 명인대 나오셨고.”
이성적인 유학파 엘리트.
조금 그림이 그려지는 것 같았다. 설득이라는 행위에 나름. 자신이 있었던 민우는 마음을 다시 고쳐먹어야 했다.
막연하게 설득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하면 안 될 거 같았다. 과정과 절차를 더욱 보강할 필요를 느꼈다.
명인대 출신이 얼마나 깐깐한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으니까.
민우가 질문을 바꾸었다.
“근데 대체 브리핑은 어떻게 하는 거야? 감이 안 오네. 직장생활을 해 본 적이 없다 보니.”
“특별히 정해진 규칙 같은 건 없어. 중요한 건 기획서인데…… 윤 팀장님이 결재해 주셨다면 크게 문제는 없는 거겠지?”
“그냥 기획서 드리고 설명해 드리면 되는 건가.”
장철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간혹 기획 회의를 열거나 프레젠테이션을 이용하는 경우가 있긴 한데 그 정도 사이즈는 아닌 거 같고. 윤 팀장님이 그렇게 하라고 하셨으니 일단 해 보는 게 좋지 않을까.”
“오케이. 시간 뺏어서 미안해.”
짧은 미팅이 끝나고 장철호가 연구실을 나갔다. 민우는 책상에 앉아 다시 고민했다.
‘실장님이 꼼꼼한 사람이라면 과정도 중요시할 거야. 다른 부분도 체크를 해야 한다.’
민우는 기획서를 놓고 냉정하게 판단했다.
이해관계가 얽혀 있지 않은 제삼자가 이 기획서를 봤을 때 부족하다고 생각할 만한 게 뭐가 있을까?
‘출간 동기. 상업적 측면. 학문적 기여도…….’
민우는 모든 항목을 빠짐없이 다시 살폈다.
문득 손이 허전한 느낌에 민우는 가방에서 만년필을 꺼냈다. 기분 탓인지 모르겠지만, 만년필을 손에 쥐고 있으면 생각이 잘 풀렸다.
특히 논문 개요를 작성할 때 도움이 됐다. 만년필로 쓰면 목차가 술술 나왔다. 어쩌면 이 물건에 숨겨진 또 다른 능력일지도 몰랐다.
민우는 다시 기획서에 집중했다.
잠시 후 그의 손에 쥐어진 만년필에서 미묘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번쩍!
그 순간 불현듯 떠오르는 하나의 생각.
민우는 그 생각을 놓치지 않고 그대로 빈 종이에 옮겼다.
‘논문의 내용. 맞아. 제일 중요한 걸 잊을 뻔했다.’
새로운 이론을 소개하는 것에 집중하다 보니 논문 자체에 대한 설명이 부족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 알맹이를 보여주는 것보다 껍데기를 꾸미는 데 집중한 꼴.
송승현 실장은 엘리트다. 이론도 이론이지만 논문 자체에 흥미를 느낄 가능성도 있었다.
‘줄거리를 요약하듯 몇 페이지로 논문을 압축시키는 게 좋겠어.’
따로, 작업할 필요는 없다. 박사 논문에도 초록이 들어가기 때문에 최민식이 미리 작성한 논문초록으로 대신하면 됐다.
민우는 즉시 최민식에게 전화를 걸었다.
“예 형. 민우입니다. 죄송한데 지금 논문초록 좀 보내주실 수 있을까요? 네. 제 메일로 좀 부탁드립니다. 주소는요…….”
최민식은 바로 논문초록을 보내왔다.
그대로 인쇄하기엔 전문적인 내용이 많아 민우는 표현을 읽기 쉽게 바꾸었다. 반 시간 정도를 할애하니 부록이 완성됐다.
‘이 정도면 해볼 만하겠어.’
민우는 더욱 두툼해진 서류철을 들었다. 이제 송승현 실장을 만나러 갈 시간이다.
* * *
출판기획실은 한 층 위인 15층에 있었다. 민우는 ID카드를 다시 한번 찍었다.
인문사회팀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였다. 효율성을 중시한 내부 인테리어는 물론, 모든 직원이 컴퓨터에 앉아 작업에 몰두하고 있었다.
‘한 층 차이인데 분위기가 이렇게 다를 수가 있구나.’
민우는 내심 놀라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때 민우를 발견한 여직원이 말을 걸어왔다.
“어떻게 오셨어요? 처음 뵙는 분인 거 같은데.”
“안녕하세요. 인문사회연구소의 박민우라고 하는데요. 실장님을 뵈러 왔습니다.”
“아, 기획출판 건으로 브리핑하러 오셨죠?”
“네.”
윤 팀장이 미리 연락을 넣어 둔 모양이었다. 민우는 곧 여직원이 가리키는 곳으로 갔다.
실장실은 복도 안쪽에 있었다.
문 앞에 섰지만, 민우는 선뜻 노크하지 못했다.
긴장했던 것이다.
윤정민 팀장에게 보고서를 제출하는 것과는 느낌 자체가 달랐다.
‘쉽게 생각하자. 실장님이 아무리 어려워 봐야 민영환 선생님만 하겠어?’
민 교수의 얼굴을 떠올리니 마음이 진정되기 시작했다. 민우는 마음속으로 지도교수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며 문을 노크했다.
“들어와요.”
침을 꿀꺽 삼킨 민우는 조심스레 문고리를 돌려 안으로 들어갔다.
송승현 실장은 책상에 앉아 서류를 검토하고 있었다.
하얀 피부와 붉은 입술이 돋보였다. 단아한 느낌이 든다고 할까. 가슴께까지 내려오는 검은색 긴 생머리가 매력적인 여자였다.
하지만 눈빛은 차가웠다. 사람의 내면까지 뚫고 들어갈 듯한 느낌이었다.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깜짝 놀란 민우는 천적을 만난 동물처럼 고개를 슬쩍 숙였다.
“아, 안녕하세요. 인문사회연구소의 박민우입니다.”
“앉아요.”
부적처럼 여기던 민영환 교수의 이미지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송승현 실장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깐깐해 보였다. 민우는 다시 긴장하기 시작했고, 그 사이 송 실장이 맞은편에 앉았다.
“윤 팀장님께 대강 이야기는 전해 들었습니다. 단행본 출판 건으로 브리핑을 하신다고요.”
“아, 예. 맞습니다.”
“시간이 없으니 빨리하죠. 먼저 기획서를 좀 볼까요.”
민우는 재빨리 서류철을 펼쳐 송승현 실장 앞에 내려놓았다. 그녀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기획서를 순식간에 읽었다.
그때 송 실장이 서류철 뒤에 있는 부록을 주목했다.
“이건 뭐지요?”
“논문 요약본입니다. 내용이 궁금하실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첨부했습니다.”
“보기보다 꼼꼼하군요.”
예측이 맞아떨어졌다. 민우의 표정에서 긴장감이 조금 사라졌다.
가만히 민우를 바라보던 송 실장이 다시 기획서로 시선을 내렸다. 그런데 그때, 그녀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설명을 들을 필요도 없겠어요. 이 기획으로는 책 못 나갑니다.”
송 실장이 서류철을 덮었다.
막 자세한 설명을 준비하려던 민우는 당황했지만, 단박에 거절당하니 오히려 오기가 생겼다.
이곳은 대학이 아니었다.
눈치를 볼 것도 없고 굽실거릴 것도 없었다.
“어떤 이유 때문입니까?”
“공저자명에 본인 이름이 있네요. 명인대 석사과정 중이죠? 적어도 박사수료는 해야 저자 리스트에 올릴 수 있지 않을까요.”
“이 논문에 사용된 핵심이론을 소개한 것이 바로 접니다. 저자와 협의된 부분이기도 하고, 누구보다도 이 분야에 대한 이해가 깊다고 자신합니다.”
민우는 자신이 있었다.
해외 유력 저널에서 발간된 최신의 신화학 관련 논문을 모두 머릿속에 담은 그였다. 자신이 없는 게 오히려 이상했다.
하지만 송승현 실장의 생각은 달랐다.
“그걸 누가 어떻게 알아주지요?”
차분한 반박.
선뜻 무슨 의미인지 와 닿지 않았다. 민우는 이어지는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저자에 대한 신뢰는요. 독자가 책을 선택하는 여러 기준 중 무척 큰 폭을 차지하는 기준이에요. 객관적으로 지식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은 학위만 한 게 없지요. 이 분야의 서적에서는.”
“하지만 이 기획은 학술서가 아니라 교양서에 가깝습니다. 거의 새롭게 다시 써야 하니까요. 저자의 학력이 책 구매에 큰 영향을 끼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민우 씨의 커리어가 부족하다는 것엔 이론의 여지가 없어요.”
송승현 실장은 정석적으로 약점을 파고 들어왔다. 타협의 여지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재고해 주십시오. 이번 기획은 인문사회팀의 존재 이유를 보여주는 하나의 모범적인 사례가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모범적인 사례요?”
“저자 문제 때문에 좋은 텍스트가 빛을 보지 못하는 경우는 없어야 한다고 봅니다. 새로운 지식을 알기 쉽게 대중에 소개한다. 이것이야말로 인문학의 본질이 아닐까요.”
민우의 마지막 표현에 송승현 실장이 예민하게 반응했다.
“인문학의 본질?”
그녀가 웃었다. 비웃음인지 호기심인지 잘 구분이 되지 않는 그런 애매한 웃음이었다.
“재미있는 사람이네요. 민우 씨는. 그 정도로 자신이 있나요? 본질을 운운할 정도로.”
“자신이 없다면 기획서를 낼 수 없었을 겁니다.”
“내 말을 제대로 이해를 못 하신 거 같은데. 박민우 씨, 아니. 박민우 선생님께서는…….”
달라진 건 호칭만이 아니었다.
분위기도 마찬가지였다.
송승현 실장의 차가운 시선이 칼처럼 날아와 박혔다.
“소위 말하는 SCI급 학술지에 논문을 게재한 적이 있으신지요?”
민우는 허를 찔렸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질문이었다.
“없습니다.”
“그럼 KCI급 학술지에는?”
“없습……니다.”
“등급 외 학술지에는?”
“…….”
그 짧은 시간 동안 민우는 억울함과 부끄러움을 동시에 느꼈다. 하지만 기업의 논리는 냉혹했다.
“본인이 이뤄 놓은 학문적 성취는 아무것도 없는데, 학문이란 이렇고 이런거다라고 떠드는 건 좀 우습지 않나요?”
“학문적 성취와 생각의 피력은…… 다른 차원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뭐, 그럴 수 있겠죠.”
송 실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녀의 눈은 여전히 차가웠다.
“그럼 어디 박 선생님의 생각을 한번 들어볼까요. 질문을 좀 바꿔서. 아까 인문학의 본질에 대한 이야기를 하셨지요.”
송승현 실장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는 서고에 비치된 책을 하나 골랐다. 플라톤의 <소크라테스의 변명>이라는 책이었다.
다시 돌아온 그녀는 책을 민우의 앞에 놓았다. 그리고 조용히 물었다.
“인문학이란, 과연 무엇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