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1. 출판의 조건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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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 출판의 조건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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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 출판의 조건 (3)
2021.04.12.
다음 날, 민우는 아침 일찍 지음사에 출근했다. ID카드가 있기 때문에 이제 출입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
삐빅―
카드를 대니 문이 열렸다.
‘아직도 어색하단 말이지. 언제쯤 적응이 되려나.’
목에 카드를 걸고 다니니 왠지 직장인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줄지어 서 있는 화분 너머로 단발머리를 한 젊은 여자가 보였다.
“좋은 아침입니다.”
“어서 와요. 박 쌤, 요즘 일찍 나오시네요?”
인문사회팀 정은아 대리가 친근하게 물었다. 포근한 느낌의 좋은 인상을 가진 사람이었다. 두 아이의 엄마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동안이다.
“1학기 끝났거든요. 이제 방학입니다.”
“대학원에도 방학이 있어요?”
“말뿐인 방학이긴 해요. 학교는 거의 매일 나가봐야 해서요.”
대학원생의 진짜 공부는 방학 기간에 시작된다.
학기 중에는 강의를 들어야 하는 부담감 때문에 관심 분야를 연구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방학에 따로 공부했다.
벌여놓은 일이 많은 민우는 오히려 방학이 되니 더욱 바빠졌다.
누나의 영어 과외는 이제 일 축에도 끼지 못했다.
공모전 준비 때문에 당장 발등에 불이 떨어졌고, 독일어문학 공부는 물론 최민식의 박사 논문 출간 계획까지 세워야 했으니까.
‘말 그대로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란 상황이지.’
거기에 지음사 인문사회팀에 출근까지 하고 있으니 민우는 사생활을 즐길 여유조차 없었다.
그게 조금 아쉽긴 했다.
꺾여가긴 해도 아직 20대 청춘이다. 친구들이 SNS에 여행 사진을 올릴 때마다 부러운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팀장님은 아직 안 나오셨나?’
민우는 슬쩍 윤정민 팀장의 자리를 살폈다. 가방 하나 없이 깨끗이 비어 있었다.
정 대리는 연차가 높은 만큼 눈치가 빠른 사람이었다.
“팀장님 오늘 좀 늦으실 거예요.”
“뭔 일 있었나요?”
“말도 마세요. 어제 회식 있었는데 완전…… 아마 오후에나 나오시지 않을까 싶은데. 무슨 일 있는 거예요?”
“아뇨. 별일은 아닙니다. 저 그럼 들어가 보겠습니다.”
대화를 끝낸 민우는 복도를 가로질러 인문사회연구소로 향했다. 연구 효율을 높이기 위해 인문사회팀과 분리되어 있었다.
마침 장철호가 복도에 설치된 커피 머신 앞에 서 있었다.
“어제 회식했다며?”
“어, 왔어? 윤 팀장님 뭐 좋은 일 있으셨나 보더라고. 혼자 신나게 달리셨지. 카드도 본인 걸로 긁으시고.”
지음사 인문사회팀의 회식 방법은 다양했다. 술을 마시는 날도 있고, 영화나 콘서트를 보는 날도 있다.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누구도 강요하지 않는다는 것.
어제처럼 술을 마시는 회식 자리에서는 마시는 사람만 술을 마시고, 부담되면 음료수나 다른 것을 시켜도 됐다.
그래서 정은아도 그렇고 장철호도 컨디션이 좋은 것이다.
장철호가 따뜻한 커피가 담긴 컵을 내밀었다.
“한 잔?”
“좋지.”
민우가 컵을 받아왔다. 장철호는 다시 머신을 작동시켜 본인 것을 뽑았다.
장철호가 물었다.
“공모전 준비는 잘 돼가? 이번 달 말이 마감이라면서.”
“엉망진창이야. 콘셉트 제대로 안 잡아서 그런지 답이 안 나온다. 너무 즉흥적으로 시작했어.”
“뭐, 한창 즉흥적일 나이긴 하잖아. 같이 하는 친구들도 우리 또래라면서. 그런 패기로 밀고 나가는 거지. 쭉쭉.”
장철호가 미소를 지으며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지적인 미소가 멋있다.
실제로 공대 출신인 그는 공학뿐만 아니라 인문학적 소양을 두루 갖춘 인재였다.
그래서 민우는 그에게 끌렸다.
공대생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인문학적 지식들이 신선하고 좋았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장철호와 말을 틀 정도로 친해지게 되었다.
“그래서 지금은 일단 턱걸이라도 본선에 진출하고 2차 프레젠테이션에서 승부를 볼까 생각하고 있어.”
“으음, 그런 전략도 나쁘진 않네.”
“결과는 나와 봐야 알겠지만…… 아무튼 커피 고맙다. 수고.”
민우는 인문사회연구소의 문을 열었다.
15평 정도 되는 아담한 공간에 책상과 파티션이 들어서 있었다. 다른 연구원들은 아직 출근하지 않았다.
다른 연구원이라고 해봐야 민우를 포함해 세 명뿐이다. 출근 시간이 제각각이라 아직 제대로 이야기를 나눠보지도 못했다.
아니, 이야기는커녕 얼굴을 보지 못한 사람들도 있었다.
‘언젠간 인사할 날이 오겠지 뭐.’
민우는 자리에 앉아 컴퓨터를 켰다.
메일로 백업해 둔 기획서 파일을 열었다. 몇 가지 수정해야 하는 부분이 있었다.
민우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저자명 부분이었다. 민우는 키보드에 손을 올린 채 한참 동안 고민하다가 저자명을 수정했다.
저자: 최민식, 박민우 공저
저자명에 민우의 이름이 추가로 들어갔다.
공저로 해야 출판을 하겠다. 그것이 바로 민식이 말한 조건이었다.
‘단행본 공저…… 어마어마한 기회야. 학계에 내 이름을 알릴 수 있는.’
생각만 해도 짜릿했다. 스물여덟이라는 어린 나이로 인문서를 펴낸다는 건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좋은 기회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고민이 됐다.
공저자로 이름을 올리게 되면 최민식이 단독저자일 때와는 전혀 다른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내가 박사학위라도 있으면 모르겠는데 아직 석사과정 중이라 문제야. 저자 소개에 적을 것도 마땅히 없잖아? 반대가 심할 텐데.’
강철훈 교수 프로젝트에서 학생들이 이름을 올리지 못한 것과 같은 이치다.
물론 그런 식으로 이야기해 보기도 했지만 민식은 고집을 부렸다. 공저로 하지 않는다면 출판을 하지 않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민우로서는 고마운 일이다. 그것은 민식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배려였으니까.
하지만 그렇게 되면 지음사에서 출간되지 못할 가능성이 생긴다. 9할 이상이라고 말했던 확률이 5할, 아니 3할 이하로 떨어질 게 분명했다.
‘실장님 결재받기도 전에 윤 팀장님 선에서 까이는 거 아냐?’
하지만 실패에 대한 두려움보다 도전의식이 앞섰다. 그만큼 민우는 단행본 출간에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실적을 쌓을 좋을 기회임엔 분명해. 까짓것 한번 해보자. 밑져야 본전이니까!’
민우는 키보드를 두드리며 기획서를 고쳐 나갔다.
다른 부분은 크게 손댈 것이 없었다. 최민식이 지적해 준 콘셉트 부분만 약간 손을 봤고, 나머지는 그대로 출력해 서류철에 넣었다.
모든 준비가 끝났다.
‘이제 팀장님을 설득하면 돼. 어떻게든 해내서 실장님 결재까지 가 보자.’
민우는 잠시 쉬려고 핸드폰을 꺼냈다. 톡이 몇 개 와 있었는데, 그중 눈에 띄는 게 하나 있었다.
상아문학회 회장에게서 온 톡이었다.
다음 주에 동아리 창립회가 있는데 와 달라는 내용이었다. 스케줄을 확인한 민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대전까지 가기에는 너무 부담스러웠다.
― 미안하다. 다음 기회에 놀러 갈게.
민우는 다음 톡을 확인했다.
수빈과 진섭이 보낸 메시지가 잔뜩 와 있었다. 대부분 공모전에 관한 이야기였고, 민우는 이따 오후에 만나 문제를 해결하자고 제안했다.
민우는 뒤로 가기를 누른 다음 스크롤을 내렸다.
그러다 문득 아래쪽에서 낯익은 이름 하나를 발견했다.
정연주.
‘얘는 잘살고 있으려나?’
프로필 사진이 고즈넉한 가을 하늘로 바뀌어 있었다. 상태메시지는 없었다.
뭔가 외롭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 민우는 대화창을 띄우고 잘 지내냐는 메시지를 입력했다. 하지만 보내기 버튼을 누르진 못했다.
‘잘살고 있겠지. 궁금하긴 하지만 내가 걱정할 일이 아니다.’
연주는 대한그룹 회장의 손녀딸이었다. 소위 말하는 재벌 3세. 민우와는 사는 세계가 다른 사람이었다.
딸칵―
때마침 문이 열리고 윤 팀장이 안으로 들어왔다. 술로 실컷 달린 사람 치고 말끔해 보였다.
“박 선생. 나 찾았다면서?”
“아. 팀장님. 안녕하세요. 해장은 하셨어요?”
“해장은 무슨. 아침밥 못 얻어먹고 다닌 지 벌써 10년째야. 대충 편의점 라면으로 때웠지.”
“10년째……요? 결혼하신 지 11년 되셨다고 들은 거 같은데.”
“박 선생. 그만. 거기까지.”
윤정민 팀장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40대 한국 남성들의 애환을 보는 듯했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민우는 지금 막 인쇄한 기획서를 윤 팀장에게 제출했다.
“팀장님. 이것 좀 봐주실 수 있을까요? 저희 학교 선배 박사 논문 출판 건으로 쓴 기획섭니다.”
“누구?”
“최민식 선배요.”
“최민식. 최민식…… 아, 그래. 그 친구. 민영환 교수님 제자지? 어디 보자.”
윤정민 팀장은 테이블로 자리를 옮겨 기획서를 읽기 시작했다. 민우는 긴장한 채 그의 옆을 지키고 섰다.
잠시 후 윤정민 팀장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으으음. 이거 좀 본격적이구만.”
“예. 아무래도 박사 논문이 베이스니까요. 그래도 거의 새롭게 쓰는 것과 다를 바 없어서 해볼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윤정민 팀장이 생각에 잠겼다. 기획서를 몇 번 더 뒤적이고는 생각에 잠기는 걸 반복했다. 고민이 많아 보였다.
“그런데 명인대 국문과 박사 논문은 보통 태인사에서 출간하지 않나?”
“맞습니다. 하지만 관례적으로 출판하는 건 의미가 없다는 판단에서 기획서를 쓰게 된 겁니다.”
“그거야 논문을 쓴 본인들 입장이니까 할 수 있는 소리지. 학위논문이면 자기 자식 같을 텐데 오죽하겠어. 그런데…… 교양서 정도로 쉽게 풀어 쓰는 게 쉬울까? 명색이 박사 논문인데.”
비관적인 말과 함께 윤정민 팀장이 기획서를 덮었다. 생각이 많아 보이는 표정이었다.
‘틀린 건가?’
지금 그가 하는 말도 모두 옳았다. 그래서 민우는 딱히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
“어떻게 안 될까요? 어렵지만 한번 해 보고 싶습니다.”
“그럼…… 일단 실장님께 올려볼까.”
“네?”
“진행하자고.”
“아, 감사합니다!”
뜻밖으로 일이 쉽게 풀려 민우는 신이 났다. 그런데 윤 팀장이 손을 들어 그의 말을 막았다.
“대신. 박 선생이 직접 실장님께 가서 브리핑해. 전문성이 필요한 부분이라 내가 어떻게 할 수 없을 거 같아. 결재하고 간다?”
“브리핑이요?”
민우의 표정이 멍해졌다.
인문사회팀은 하나의 하위 그룹이다. 동등한 그룹으로 자연과학팀, 체육예술팀 등이 있는데 그 상위 그룹으로 출판기획실이 있다. 그곳의 실장에게 결재를 받으라는 소리다.
‘그러고 보니 출판기획실장님이 누구였더라?’
이야기만 몇 번 들었지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었다. 민우는 장철호에게 미리 정보를 얻고 가는 게 좋겠다고 판단했다.
그러는 사이 이미 윤 팀장은 연구실을 나가 있었다. 서류철을 여니 팀장 칸에 결재가 되어 있었다.
‘브리핑은 어떻게 하는 건데? 그냥 기획서만 그럴싸하게 쓰면 되는 거 아니었어?’
막막한 느낌에 한숨이 나왔다.
하지만 이대로 주눅 들고 있을 민우가 아니었다. 그는 마음을 가다듬고 인문사회연구소를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