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0. 출판의 조건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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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0. 출판의 조건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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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0. 출판의 조건 (2)
2021.04.09.
“다른 애들은 아직이냐?”
“한진욱 선생님 수업이 좀 연장됐다고 합니다. 한 시간은 더 걸릴 거 같은데요.”
“이런. 좀 늦게 판을 벌일 걸 그랬네.”
웬일로 박사 연구실이 소란스럽다 했더니, 고학번 선배들이 다 같이 모여 내부 인테리어를 바꾸고 있었다.
남녀 상관없이 손에 뭐 하나씩 다 들고 있었다. 03학번 김용철을 시작으로 최민식과 강예진의 모습도 보였다.
그때 민우가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선배님들.”
“어, 왔어?”
“이야! 너 타이밍 기가 막히다 아주.”
김용철이 농담조로 말했다. 민우를 본 이재환도 웃으며 혀를 찼다.
고학번 선배들이 일하고 있는데 신입생이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상황이어서 그렇다.
“왜 하필 지금 나타났어? 아까 점심 먹을 때쯤 왔으면 닭 다리라도 하나 뜯을 수 있었을 텐데.”
“아, 괜찮습니다. 돕겠습니다!”
민우는 개념 넘치는 후배였다.
팔을 걷어붙이고 책장 한쪽을 잡았다. 그때 재환이 자신이 끼던 목장갑 한쪽을 벗어 민우에게 던졌다. 그것을 본 민식도 한쪽을 건넸다.
민우의 양손이 든든해졌다.
“감사합니다. 미리 연락 주셨으면 애들 데리고 왔을 건데요. 진섭이라도 부를까요?”
“됐어. 이 정도는 우리가 해야지. 우리가 쓰는 공간인데 후배들한테 맡기면 쓰나.”
“나중엔 저희도 쓰게 되잖아요.”
“그건 그때 문제고.”
참 합리적인 사람이구나. 민우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런 일은 후배들을 시키기 마련인데 재환은 늘 솔선수범을 보였다.
민우는 지금 대화를 잘 기억했다. 본받을 만한 자세라고 생각했다.
“다치지 않게 조심해. 하나, 둘, 셋! 들어!”
“읏차! 조금만 더 이쪽으로!”
30분 정도 몸을 쓰고 나니 내부 정리가 얼추 끝났다. 책장과 책상 위치가 잡혔으니 책만 제자리에 꽂아 넣으면 끝이다.
이재환이 손을 털었다.
“다들 수고했다. 나머지 정리는 천천히 하자. 책 정리는 늦게 온 녀석들이 수고 좀 해.”
“예, 선배.”
“민우 넌 잠깐 나 좀 보고.”
재환은 민우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그대로 두었다가는 다른 선배들에게 부림을 당할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인문관 옆에 있는 휴식 공간에 자리를 잡았다.
날이 더워 옷이 땀으로 금방 흥건해졌다. 재환은 자판기에서 이온 음료를 두 개 뽑아서 하나를 민우에게 던지듯 건넸다.
“얼떨결에 일하느라 고생했다. 허리는 괜찮지?”
“예. 뭐 아파도 괜찮아요. 쓸 데도 없는데. 근데 선배. 담배는 끊으셨어요?”
그와 이야기할 때는 늘 담배를 손에 쥐었는데, 오늘은 이상하게 담배가 보이지 않았다.
“응? 어. 딸애가 싫어하더라고. 넌 안 하지? 절대 하지 마. 담뱃값 오른 건 둘째 치고 한 번 피우기 시작하면 끊기가 힘들어.”
국문과는 흡연율이 굉장히 높은 과 중 하나다. 그래도 민우는 어렸을 적 천식을 앓아 담배에 관심이 없었다.
“멋있네요. 딸을 위해 담배를 끊다니.”
“뭐가 멋있어. 당연한 일을 한 거지. 너도 나중에 애 낳아보면 알 거다. 아빠한테 담배 냄새나! 하면서 코를 막고 도망가는데 얼마나 마음이 아프던지.”
결혼, 출산, 육아. 아직 민우에게는 멀고도 먼 이야기였다. 그래도 민우는 재환의 말을 경청했다.
“근데 너 석사 논문계획서는 어떻게 됐어? 저번 주에 다시 민 선생님께 보여드린다고 했잖아.”
“30년대 농민소설 연구로 바꿨습니다. 아무래도 민 선생님 전공 분야가 그쪽이라서. 일단 허가를 받긴 했는데…….”
떨떠름했다.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가 아니라 누군가가 원하는 분야의 논문을 쓴다는 것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표정을 눈치챘을까.
재환이 민우의 어깨를 다독였다.
“석사 논문은 연습이라고 생각하고 마음 편히 먹어. 네가 하고 싶은 연구는 나중에 얼마든지 할 수 있으니 아이디어 잘 보관해 두고.”
“네. 선배님.”
예전에 서지훈 교수에게도 비슷한 얘기를 들었다. 만약 이재환이 교수가 된다면, 그와 비슷한 사람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순식간에 이온 음료를 비운 재환이 캔을 구겨 분리수거함에 버렸다. 그리고 말했다.
“그런데 연구실엔 왜 온 거냐?”
“민식 형하고 상의할 일이 있어서요.”
“형? 그렇게 부르기로 한 거야?”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요.”
최민식과의 개인적인 약속이라 민우는 따로 설명하지 않았다.
일전에 술자리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자신은 선배라고 불릴 자격이 없다. 그 자격을 갖출 때까지 형이라고 불러라.
최민식다운 속죄이자 반성이었다.
“다행이네. 잘 풀린 것 같아서. 그럼 내가 들어가는 길에 나가 보라고 말 전해주마.”
“부탁드립니다.”
잠시 후 이재환이 인문관 안으로 들어가고 최민식이 밖으로 나왔다.
“너 많이 컸다? 석사 나부랭이가 사람 오라 가라 하게 만드네.”
“죄송합니다.”
“죄송하긴 뭘 죄송해. 그냥 해 본 소리 가지고.”
민식은 웃고 있었다. 비웃음이 아니라 가면을 벗은 진짜 웃음이었다. 민우도 이제 그것이 농담이라는 사실을 잘 알았다.
뒤풀이 술자리에서 두 사람은 밤새도록 술을 마셨다.
먼저 자리를 청한 것은 민식이었다.
민우의 앞자리에 앉자마자 그가 꺼낸 첫마디는 이것이었다. 고맙다고. 그리고 미안하다고.
민우는 그가 꺼내는 이야기를 귀담아들었고, 술잔이 오고 가는 와중에 자기의 생각을 솔직히 말했다. 민식은 진지한 태도로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물론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있기도 했다. 목소리가 높아질 때도 있었고, 가라앉을 때도 있었다. 논리적일 때도 있었고 감성적일 때도 있었다.
하지만 밤새도록 술을 마시고 아침 일찍 단둘이 해장을 할 무렵에는 서로를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몸은 피곤했지만 민우는 날아갈 듯 기분이 좋았다.
관계를 회복한 것은 물론, 덤으로 학과 내에서 평판이 수직 상승했으니 그로서는 최상의 결과를 얻은 셈이다.
민식이 담배를 물고 불을 붙였다.
“후우, 그래서 용건은?”
“형 박사 논문 출간 때문에 여쭤볼 게 있어서요. 어떻게 되고 있습니까?”
“아, 그거.”
민식이 담배를 잠시 입에서 뗐다. 표정이 좀 복잡해졌다.
“지금 그런 거 신경 쓸 여력이나 있겠냐. 수정 지시가 들어온 게 한두 개가 아니라서. 인쇄 넘길 때까지 수정만 줄곧 하게 생겼다.”
확실히 그는 여전히 피곤해 보였다. 도장을 받게 됐다고 해도 심사위원들의 요구사항을 모두 해결하려면 하루 이틀로는 어림도 없다.
석사 논문 심사는 세 명, 박사 논문 심사는 다섯 명의 위원이 참여한다. 즉, 민식은 크게 다섯 개의 수정 지시를 이행하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대부분의 학생들은 논문 인쇄 직전까지 수정에 시달리게 된다. 민식도 예외는 아니었다.
“태인사에서는 연락 없었고요?”
“있긴 했지. 안 그래도 다음 주에 편집장 만나기로 했는데. 뭐라고 할까. 고민? 그런 게 좀 있다.”
민우는 이미 그의 고민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학문적인 욕망이 큰 사람이니까…… 피땀 흘려 쓴 논문을 아무렇게나 출판하고 싶지는 않겠지.’
관행적으로 몇 부 찍지도 않는 출판사와 계약하기가 여러모로 아쉬울 것이다. 게다가 민식의 논문은 최신의 이론을 소개하고 있었다.
최신의 이론.
그 점에 대해 민우는 민식과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었다.
박사 논문을 대중에게 소개하는 것은 어렵다. 학부생도 소화해내기 어려우니까.
하지만 논문을 읽기 쉽게 가공하고 판매 채널을 늘린다면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지식을 나눠줄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자신이 힘들게 찾은 이론이 이렇게 묻히는 건 아까웠다.
그게 바로 민식을 찾아온 이유였다.
“혹시 다른 출판사를 생각하고 계신 겁니까?”
“솔직히 말하면 그래. 태인사 쪽 하고 작업하면 기껏해야 300부 남짓 찍을 건데 그렇게 묻히기에는 아까운 논문이라서.”
민식이 담배를 비벼 껐다. 그리고 민우를 바라보며 물었다.
“제2저자님의 생각은 어떠신지?”
“네? 제2저자요?”
민우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걸 보던 민식이 피식 웃으며 민우의 어깨를 툭 쳤다.
“인마. 너 말이야. 너. 여기에 너 말고 또 누가 있어.”
“아.”
제2저자.
한마디뿐인 말이지만, 민우의 얼굴에 절로 미소가 걸렸다. 이제 민식은 자신을 완전히 인정해 주었다. 하나의 연구자로서.
“제 생각에는 태인사보다는 다른 출판사에서 개정본을 내는 게 좋다고 봅니다.”
“개정본이라면?”
“이쪽 분야에 지식이 없는 사람들이라도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는 수준으로 수정해서 출판을 하는 거죠. 신화학 이론을 소개할 겸 입문서로 방향을 잡아도 좋을 거 같고요.”
“예를 들면 <광장을 읽는 일곱 가지 방법>같은 느낌으로?”
“바로 그겁니다.”
팔짱을 낀 민식은 고민했다.
그 사이 민우가 품에서 명함을 하나 꺼냈다. 자신의 이름이 박힌, 지음사 인문사회연구소 연구원 명함이었다.
“실은 제가 여기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요. 허락해 주신다면 팀장님께 형 논문이 단행본으로 출간 가능한지 여쭤보려고 합니다.”
“지음사잖아?”
명함을 받아 든 민식은 놀랐다.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베스트도 바로 지음사 출간이었기 때문이다.
“가능하려나.”
“논문을 어떻게 바꾸느냐가 핵심이겠지만 출간 자체는 어렵지 않을 거라고 봐요. 그래서 제가 준비한 게 하나 있는데…….”
민우가 가방에서 서류철을 하나 꺼냈다. 그것을 본 민식이 살짝 놀랐다. 자신의 이름과 논문 제목이 보였기 때문이다.
“형 박사 논문 출판 기획서입니다. 아직 팀장님께 제출하기 전이라 따끈따끈해요.”
행과 열이 꽉 차 있었다. 한눈에 봐도 정성껏 쓴 기획서였다.
“얌마. 너도 바쁠 텐데 언제 이런 걸 다 썼어?”
“제가 해야 하는 일이라서요. 안 쓰면 연구비 안 나옵니다.”
“음. 잠시 좀 읽어보자.”
민식이 기획서를 정독했다.
서류에는 빈틈이 없었다. 출간 동기와 상업적 측면에서 충분히 실현 가능한 논조로 작성되어 있었다.
검토를 마친 민식이 기획서를 민우에게 다시 넘겼다.
“통과될 확률은 얼마로 보고 있냐?”
“9할 이상입니다.”
“꽤 높군.”
민식은 다시 한번 고민했다. 한참 후 그가 입을 열었다.
“좋아. 허락하지. 대신 조건이 있다.”
“조건이요?”
그가 편하게 웃으며 조건을 이야기했다. 전혀 생각지 못했던 말이라 민우는 놀라면서도 깊은 고민에 빠져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