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9. 출판의 조건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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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9. 출판의 조건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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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9. 출판의 조건 (1)
2021.04.08.
“미치겠네. 정말.”
민우는 한숨을 내쉬었다.
307호에 있던 나머지 두 사람, 수빈과 진섭도 답답한 건 마찬가지였다.
세 사람은 함께 모여 인문학 장려방안 공모전 관련 회의를 하고 있었다.
“청소년 교육과정에 인문학 과목을 추가하는 거, 정말 어려울까요?”
“그럼 애들이 다녀야 하는 학원이 하나 더 늘어나는 결과밖에 안 될 거야. 사교육을 조장한다는 비판이 있을 수 있어.”
“그냥 교양 과목으로만 하면 되지.”
“중고딩한테 교양 과목이 어딨냐. 미술 점수 하나에도 목숨을 거는 판인데.”
논박을 당한 수빈은 꿍한 표정을 지었다.
테이블 위에는 지금까지 힘들게 모아 왔던 기초자료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모두가 인문학 관련 자료들이었다.
하지만 막상 자료를 모았는데도 어떻게 조합해야 할지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공모전 마감이 열흘 앞으로 다가왔는데 기가 막힌 아이디어는 생각 안 나고. 답이 없네, 답이 없어. 대체 누가 시작하자고 한 거야?”
민우가 농담 삼아 투덜거렸다.
6월 하순, 갑작스럽게 날이 더워진 탓도 있었지만 답답한 면이 많았다. 물론 동료들을 탓한 게 아니라 스스로에게 답답했다.
자료를 모으고 머리를 맞대면 뭔가 좋은 아이디어가 나올 줄 알았다.
하지만 현실은 청춘 드라마처럼 흘러가지 않았다.
좋은 아이디어는커녕, 의견이 나오면 그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한지부터 판단을 했다. 그러다 보니 모두가 수비적으로 변해 버렸다.
“왜 갑자기 남 탓을 하고 그래요. 자기가 리더 한다면서 당당하게 말하던 사람이 누구더라?”
“맞아. 50만 원 먹을 바에는 500만 원 먹는 게 낫다고 당당하게 말하던 사람이 누구더라?”
수빈과 진섭은 영리했다. 연합전선을 구축했고, 민우를 순식간에 궁지로 몰았다.
결국, 민우는 백기를 들었다.
“그렇지. 맞는 말이네. 내가 잘못했네. 경찰 불러. 자수하게.”
“112가 몇 번이더라?”
“재미없다.”
“미안요.”
민우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무튼, 사죄하는 의미에서 아이스크림이나 먹으러 갈까? 내가 쏜다.”
“와. 진심 오빠가 오늘 한 말 중 제일 쓸모 있는 말이었어요!”
수빈의 날카로운 한마디가 가슴에 꽂혔다. 게임에서는 크리티컬 히트라고 하던가. 꽤 아팠다.
그렇게 세 사람은 307호를 나섰다.
“으아. 개덥네. 진짜.”
진섭은 손으로 햇빛을 가렸다.
말 그대로 찌는 듯한 더위였다. 6월부터 이러니, 진섭의 입에서 이대로라면 세상이 멸망할지도 모른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만했다.
“하늘에 게이트가 열리고 마수들이 쏟아져 나오기 좋은 타이밍이군.”
“야. 판타지 좀 적당히 읽어.”
“모르냐? 요즘 웹소설 시장 겁나게 큰 거. 시장 규모가 수천억이라던데. 월에 억대로 버는 작가들도 많다고 하더라고.”
“남의 잔치지.”
“엄밀히 따지면 남의 잔치는 아니지 않아요?”
수빈이 끼어들었다. 그녀도 요즘 네이비에서 연재되는 로맨스 웹소설을 즐겨 읽는 중이었다.
“어쨌든 장르소설도 대중문학의 일부고, 그만큼 시장 규모를 확장했다는 건 독자들을 많이 확보했다는 증거잖아요. 독자수용이론의 관점에서 연구를 해 보면 재미있을 거 같은데.”
독자수용이론은 작가나 작품에 주안점을 둔 전통적인 연구방식에서 벗어나 독자에게 주목한 이론이다. 최근 젊은 학자 사이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
하지만 ‘독자 해석’의 영역이다 보니 주관적인 측면이 많이 작용해 그만큼 논란이 자주 일어나는 분야이기도 하다.
‘공부만 할 줄 알았는데, 수빈이도 장르 쪽에 관심이 있었나 보네.’
민우는 수빈의 말을 곱씹었다. 분명 일리가 있는 지적이었다. 장르소설은 민우도 소싯적에 즐겨 읽었으니 잘 안다.
“확실히 독자 개인의 삶에 기초한 연구방법론이니 장르소설의 카타르시스…… 아니 카타르시스라는 표현은 좀 고상하고. 대리만족 정도를 고민해 볼 수 있겠네. 사회적인 연관성을 고찰해 볼 수도 있겠고.”
“거봐요. 역시 오빠랑은 통하는 게 있다니까.”
“근데 중요한 게 뭔지 알아?”
“뭔데요?”
“우리가 지금 준비하는 공모전과는 눈곱만큼도 관련이 없다는 거다. 이를테면 그런 거지. 시험 기간에 하는 방 청소처럼 쓸데없는 거에 재미를 느끼는 거.”
두 사람이 입을 다물었다. 이번엔 민우에게 한 방 먹었다.
민우, 수빈, 진섭은 편의점에서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사 들고 그늘진 의자에 앉았다. 때마침 바람이 불어와 땀을 식혔다.
“우와. 여기가 천국이네요.”
하지만 이수빈은 아이스크림을 제대로 맛보지도 못했다. 저 멀리서 박사 2학기 강예진이 손짓으로 그녀를 부른 것이다.
뭔가 심부름을 시킨 것인지 꾸벅 인사를 한 이수빈은 곧장 인문관으로 달려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진섭이 혀를 찼다.
“저러다 아이스크림 다 녹겠네. 쯧, 쟤도 고생이다. 나름 자대생인데.”
“어쩌면 그래서 더 힘들 수도 있겠지. 선배들의 기대치라는 게 있을 테니까. 게다가 수석이었잖아.”
“하긴.”
그러다 보니 편의점 의자엔 민우와 진섭만 남게 되었다. 이수빈이 있을 때와 없을 때는 분위기 자체가 다르다.
보통 대학원에 대한 이야기들이 많이 나온다. 이수빈이 자대생이기 때문에 함께 할 수 없는 얘기들이 꽤 많다.
“그나저나 이제 두 달만 지나면 막내 신세에서 벗어나겠네. 힘들었다. 정말.”
“그러게 말이다.”
민우는 진섭의 말에 공감했다. 타학교 출신으로서 정말 한 만큼 했던 학기였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모든 일이 좋게 풀렸다. 보존 서고에서의 기연을 시작으로 학문적 성취를 이뤘고, 여러 인맥을 만들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최근엔 다른 동기들과도 어울리게 되었다. 식사는 물론 스터디그룹 제안을 받기도 했고 술자리에 초대받기도 했다.
‘뭔가 이제야 제자리에 돌아온 느낌이란 말이지.’
뜬금없이 민우가 피식 웃었다.
“기억나냐? 너 술 취해서 학교 때려치우겠다고 했던 거.”
“그 얘긴 또 갑자기 왜 해?”
“나한테 감사하라고. 그때 안 말려 줬으면 지금쯤 엄청 후회하고 있었을 거 아냐. 땅을 치고 울고 있었겠지.”
진섭은 뭐라 투덜거렸지만 민우에게 늘 고마워하고 있었다. 그가 아니었다면 대학원 생활을 이겨낼 수 없었을 것이다.
잠시 정적이 찾아왔다.
약속이라도 한 듯, 두 친구는 신록 너머로 펼쳐진 하늘을 멀리 바라보고 있었다. 아득하게.
“어쨌든 우리도 한 걸음 내디뎠네.”
“그렇지.”
“정신승리인가?”
“정신승리면 뭐 어때.”
민우와 진섭은 서로 낄낄거리며 웃었다.
두 사람은 도중에 그만두지 않고 학점을 따낸 것 자체로 만족했다. 이제 15학점만 더 듣고 종합시험을 치르면 석사과정을 수료하게 된다.
대학원은 대학과 달리 1년에 두 차례 입시가 있다. 전기, 후기로 나누어 학생을 선발한다. 두 달 뒤면 신입생이 들어오고, 민우와 친구들은 석사 2학기가 된다.
아직 갈 길은 멀었지만 확실히 한 걸음 내디딘 기분이 났다.
진섭이 물었다.
“그런데 너희 모교에서는 지원한다는 애들 없냐? 벌써 신입생 모집 기간인 거 같더라고.”
“한 명 있긴 해.”
“그래? 가능성 좀 있겠네. 네 덕분에 상아대 평판이 많이 올라갔잖아.”
진섭은 얼마 전 있었던 박사 논문 프로포절 때를 지목했다.
확실히 그 사건 이후로 민우는 명인대 국문과에서 유명해졌다. 그뿐이 아니라 불명예스러운 별명이 싹 사라졌다.
이제 명인대 국문과 내에서 그를 낙제생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여기 입시가 좀 쉽냐. 1년 정도 꼬박 준비 안 하면 어렵잖아. 너도 청강하면서 선생님들 눈에 들지 않았어?”
“그랬지. 추천서는 옵션이고.”
입시 때를 다시 떠올리니 민우는 한숨부터 나왔다. 자신은 어떻게든 견뎌내 합격했지만, 후배에게 권할 만큼 만만한 것은 아니었다.
어쩌면 그 시간에 다른 일을 한다면 더욱 인생이 풍요로워질 수도 있다.
무엇보다도, 남의 인생에 첨언할 만큼 스스로가 아직 성숙하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진섭이 표정을 바꾸며 물었다.
“여자 후배냐?”
“뭐 그렇지. 인문대 대학원 오려는 남자애들이 얼마나 있겠어.”
주인공은 예전에 동아리방에서 봤던 그 12학번 주예린이었다. 그때도 명인대 대학원에 대해 질문을 했었는데 결국 대학원 진학으로 방향을 잡은 거 같았다.
“예뻐?”
“당연히 너보단 예쁘지.”
“그걸 말이라고 하냐. 당연히 나보다 예뻐야지. 나보다 못 쓰면 어디 얼굴 들고 다니겠어?”
두 사람은 실없이 웃었다.
그러다 진섭이 뭔가를 떠올렸는지 표정을 진지하게 바꾸었다.
“그런데 민식 선배는 어떻게 됐어? 어제가 심사 마감이었잖아. 박사논문에 도장 받았대?”
“그렇게 됐다고 들었어.”
도장을 받았다는 것은 논문이 심사에 통과했다는 의미다. 최민식은 박사 6학기를 마지막으로 대학원을 졸업하게 되었다.
“선배 6학기였지? 흐음. 꽤 빨리 졸업하는 편이네.”
“그렇지. 보통은 8학기 이상들 한다니까.”
“우리는 몇 학기나 공부해야 박사 논문 쓰려나.”
“순서가 잘못됐잖아. 그 전에 석사 논문 쓸 걱정이나 해. 박사는 멀었어.”
어느새 아이스크림을 다 먹은 민우가 껍데기를 쓰레기통에 버렸다.
“민식 선배 박사 논문도 곧 단행본으로 출판되겠지?”
“그렇겠지.”
그때 민우는 잠시 잊고 있던 것을 떠올렸다.
논문 출판.
보통은 태인사에서 독점적으로 박사 논문을 출판한다. 일종의 관례 같은 거라 소량인쇄만 하는 정도다.
하지만 민우는 조금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번 민식의 연구는, 아니 정확히 말해 그의 논문에서 다룬 신화학 이론은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질 필요가 있었다.
진섭이 심술궂게 말했다.
“양심적으로 너한테 인세 50프로는 떼 줘야지. 네가 찾은 이론이 아니었다면 2차 프로포절까지 가지도 못했을 거잖아.”
“박사 논문이 이론 하나 찾았다고 딱 풀리고 그런 건 줄 알어? 순진하긴.”
“아니, 뭐. 말이 그렇다는 거지. 근데 넌 석사 나부랭이 주제에 박사 논문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떠들고 있냐. 밥맛없게.”
“난 다르지. 에이스니까.”
농담이었지만, 진섭은 그렇게 들리지 않았다. 그의 표정이 점점 진지해지기 시작했다.
민우는 점점 앞서가고 있었다.
그것도 눈부신 속도로.
같은 길을 걷는 동료로서 응원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느껴지는 상대적 박탈감에 질투도 나는 게 사실이었다.
그래도 진섭은 긍정할 수 있었다.
친구니까.
“푸하하하! 에이스? 크래커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짜식이.”
“엉아가 다음에 하나 사다 줄게. 씹고 뜯고 맛보고 즐겨보려무나.”
민우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박사 논문이 생각난 김에 일을 진행시켜야겠다고 판단했다.
“나 먼저 간다. 이따 수빈이 오면 같이 아이디어 좀 잘 짜내 봐.”
“어디 가는데?”
“호랑이 소굴에. 저녁 먹기 전에 연락할게.”
손을 슬쩍 들어 보인 민우는 인문관으로 걸어갔다. 그의 목적지는 박사 연구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