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8. Q.E.D.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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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8. Q.E.D. (2)
2021.04.05.
“박민우. 오늘은 지각 안 했네?”
“또 지각했다가 털릴 일 있냐.”
민우는 예전의 악몽을 떠올리고는 고개를 흔들었다. 지각은 한 번으로 충분하다.
6월 둘째 주, 박사 논문 프로포절이 열렸다. 석사과정생들은 발표장에 미리 모여 부지런히 다과와 복사물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때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여학생 하나가 발표장으로 들어왔다. 모두가 그녀에게 인사를 했다.
“다과는 아직이야? 왜 이렇게 굼떠?”
“죄송합니다. 수빈이가 지금 매점에 갔으니 금방 올 겁니다.”
“박창민 선생님 건 따뜻한 녹차로 준비하는 거 잊지 마라. 서정원 선생님은 시럽 넣은 아메리카노. 과자는 달지 않은 걸로. 민영환 선생님은 미지근한 물 드시는 거 알지?”
“예, 선배님.”
“힘들어도 조금만 더 고생하자. 1학기 마지막 행사니까 유종의 미를 거둬야지.”
교수들의 입맛을 맞추는 것도 까다로운 일이다. 이 모든 일의 준비는 박사과정 2학기 강예진이 총괄하고 있었다.
프린트물 세팅을 마친 민우가 진섭의 옆으로 슬쩍 다가왔다.
“오늘은 규모가 좀 크다? 예진 선배가 직접 나설 정도면.”
“2차 프로포절이라 학과장님 오시잖아. 그러니 다들 날이 서 있는 거지.”
“송현우 선생님이 오신다고?”
민우는 긴장했다.
송현우. 국문학계의 거목이자 명인대학교 국문과의 수장이다.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권위를 가지고 있는 자가 바로 그였다.
“오늘 발표 누구누구야?”
“민식 선배 하나뿐이야. 다른 선배들은 이번에 논문 못 쓰는 걸로 결정이 났나 봐.”
“혼자? 엄청나게 까이시겠네.”
“난 벌써부터 뒤풀이가 걱정이다. 뒤끝 작렬일 텐데. 으윽.”
진섭이 저번 프로포절의 뒤풀이를 떠올리고는 인상을 썼다.
보통 발표자가 많으면 공격이 분산되기 마련이다. 프로포절에 나올 정도면 논문의 수준은 비슷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혼자 발표에 나선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교수들은 총력을 다해 한 사람만을 위한 공격을 펼칠 것이다.
그때 강예진의 날카로운 눈매가 이쪽에 닿았다.
“거기, 너희 둘. 딴청 부리지 말고 일해라. 응?”
“죄송함다.”
민우와 진섭은 각자 흩어져 준비를 도왔다.
그 와중에 정장을 입은 최민식이 발표장에 들어왔다. 그는 강예진과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더니 발표자석에 착석했다.
박사 6학기의 관록은 온데간데없이 긴장한 모습이 역력했다.
‘어떻게 됐을까?’
민우는 민식에게 어떠한 이야기도 듣지 못했다. 수정한 논문도 보지 못했다. 프린트물에도 특별한 언급이 없었다.
그가 캠벨의 이론을 받아들였는지 아닌지는 발표가 시작되어봐야 안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민식은 조용히 민우를 바라보기만 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읽을 수가 없었다. 무(無)에 가까운 표정이었다.
곧 그는 논문을 펼치고 발표를 준비했다.
오전 10시 정각.
명인대 국문과의 2차 논문 프로포절이 시작되었다.
“선생님들 들어오십니다.”
교수들이 입장하기 시작했다. 서정원 교수를 선두로, 민영환 교수와 박창민 교수, 그리고 한진욱 교수가 준비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등장한 송현우 교수.
그가 들어오자 먼저 자리했던 교수들이 모두 일어섰다. 학생들도 기립했다.
송현우는 인자한 얼굴로 자리에 앉을 것을 권했다.
“그런데 오늘 발표는 민식 학생뿐인가?”
“그렇습니다.”
“용케 여기까지 왔군그래. 학부 때 내 수업을 들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나. 참 오래전 일이었는데. 민 선생께서 고생이 많으셨겠어.”
“하하하.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민영환 교수는 고개를 슬쩍 숙여 겸손을 표했다.
하지만 긴장한 것은 그도 마찬가지였다.
최민식은 자신의 지도 학생이었다. 그가 공격당한다는 것은 논문이 부족하다는 것이고, 결과적으로는 자신의 지도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니까.
“그럼 발표를 시작하지.”
송현우 교수의 사인이 떨어지자 민식이 발표문을 펼쳤다.
주어진 시간은 30분.
한차례 심호흡을 한 최민식이 유창하게 서론을 읽어 나갔다.
* * *
“조너던 캠벨? 처음 듣는 이름이군. 국내엔 소개된 적이 없는 이름인 거 같은데.”
질의응답 시간이 시작되자마자 송현우 교수가 날카롭게 질문했다. 하지만 최민식은 당당했다.
“벨기에 태생의 젊은 학자입니다. 최근 유럽권에서 인류학 연구로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인용한 논문은 어디에 실렸나?”
“저번 달에 발간된 <국제민속학저널>에 실려 있습니다. 참고로 A&HCI급 저널입니다.”
송현우 교수는 입을 꾹 다물었다. 생각이 많아 보였다. 경험이 많은 그의 눈에는 최민식의 논문이 조금 위험해 보였다.
“이 이론이 타당한 과정으로 정립되었는지부터 확인을 해야 할 것 같은데. 캠벨이 젊은 학자라면 이론을 제대로 정립하기에 시간적인 여유가 없을 것이 아닌가?”
“말씀하신 대로 정설로 굳어지기에는 물리적인 시간이 부족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인용이 가능한 이론이라고 판단했습니다.”
“판단의 근거는?”
“이미 캠벨은 관련 논문을 세 건, 그리고 단행본도 한 권 출간했습니다. 모두 권위 있는 저널에 실렸습니다. 영미문학에 대한 분석이 전부입니다만, 이는 이론을 수입하기만 하는 국내 사정에 비추어보면 단점으로 작용하지 않는다고 판단했습니다.”
최민식은 권위 있는 저널이라는 부분에 강조점을 넣었다. 송현우 교수 앞인데도 주눅 들지 않고 명쾌하게 대답했다.
1차 프로포절 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
침음을 내뱉은 송현우 교수가 박창민 교수를 바라보았다.
“박 선생께서는 어떻게 보셨는지요. 왕년에 이청준 소설 연구를 좀 하지 않으셨습니까.”
“이야, 이거. 솔직히 말씀드리면 좀 놀랐습니다.”
박창민 교수가 의외의 반응을 보이자 학생들이 모두 귀를 쫑긋했다.
“말씀하신 대로 이론의 정합성을 따지기는 시기상조지만 이청준 소설의 신화소를 분석하는 것에 있어서 매우 적절한 이론적 근거라고 생각해요. 물론 다듬어야 하는 부분이 적잖이 있습니다만. 그건 차후의 문제가 아닐까 합니다.”
“그렇습니까. 다른 선생님들의 생각은?”
다른 교수들도 박창민 교수와 비슷한 의견을 피력했다. 부분적으로 문제는 있지만 큰 줄기에서는 문제를 찾을 수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
잠시 생각에 잠기던 송현우 교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곧 그의 얼굴에 미소가 보였다.
“요컨대 자네가 최신의 이론을 우리에게 소개한 거로군. 용케도 찾아냈어. 이 정도라면 박사 논문에 적합하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 배경이 궁금해. 대체 이 이론을 어떻게 찾게 된 건가?”
질문을 받은 최민식은 침묵했다. 한동안 말이 없었다.
좌중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는 발표할 때보다 생각이 많아 보였다. 잠시 후, 민식의 표정이 짐을 내려놓은 사람처럼 편안해졌다. 아무도 모르게 가면을 벗은 것이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마이크를 잡고 있던 최민식이 돌연 미소를 지었다.
“캠벨의 이론을 찾은 건 제가 아닙니다.”
그 한마디에 민우의 눈이 커졌다. 대체 그는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놀란 것은 송현우 교수도 마찬가지였다.
“자네가 아니라고?”
“후배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 친구가 캠벨의 논문을 소개해 주지 않았더라면 이 자리에서 발표를 할 수 없었을 겁니다.”
좌중의 술렁임이 더욱 격해졌다.
가장 놀랐던 것은 지도교수인 민영환 교수였다. 그는 그 이론을 찾은 것이 최민식 본인이라고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어떻게 된 거냐고, 해명해 보라고 최민식을 노려보았지만 민식은 그와 눈조차 마주치지 않았다.
발표장이 묘한 긴장감과 흥분으로 차오르기 시작했다.
송현우 교수가 다시 물었다.
“후배라면 우리 학교 사람일 텐데. 누구지?”
“석사 1학기 박민우입니다.”
“박민우?”
모두의 시선이 민우 쪽으로 쏠렸다. 모두가 믿을 수 없다는 그런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인정해야 했다.
학문적 양심을 떠나 최민식은 습관적으로 민우를 무시하거나 비난해왔다. 그랬던 그가 이렇게 큰 자리에서 민우의 이름을 언급했다.
자칫하면 논문의 가치가 떨어질 수 있는 일인데도, 자신이 한 것처럼 포장해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인데도 그는 민우의 이름을 언급했다.
진실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이 정도로 일이 커질 줄은 몰랐는데. 조금은 즐겨도 괜찮겠지? 보상이라고 생각하고.’
민우는 고개를 들고 어깨를 당당히 폈다. 이런 날이 또 올까.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기분이 짜릿했다.
“박민우.”
학과장 송현우가 다시금 그의 이름을 읊조렸다. 민우를 바라보는 눈빛이 점점 깊어져 갔다.
그것은 대단히 의미 있는 사건이었다.
* * *
준비된 모든 순서가 끝나고 박사 2학기 강예진이 연단에 서서 마이크를 잡았다.
“이상으로 2차 논문 프로포절을 모두 마치겠습니다. 참여해주신 여러분들께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교수들과 학생들이 하나둘 세미나실을 빠져나갔다. 하지만 민우는 그러지 못했다. 수빈과 진섭에게 붙잡혀 질문 공세에 시달리고 있었다.
“대박이다 너! 언제 그런 짓을 한 거야? 아까 송현우 선생님이 너 쳐다보면서 이름 중얼거리신 거 봤어? 와, 진짜 소오름!”
확실히 봤다.
민우로서는 뜻밖의 수확이었다. 어쨌든 송현우 교수의 뇌리에 남는다는 것은 좋은 일이니까.
“오빠.”
“응?”
“아니. 그게…… 그러니까…….”
수빈은 말을 잇지 못했다. 민우가 남몰래 고생한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북받쳐 올랐던 것이다.
실력과 노력으로 인정받겠다.
무슨 말이 필요할까. 민우는 그 대명제를 멋지게 증명해냈다.
그때 민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배님.”
맞은편에 최민식이 서 있었다. 물끄러미 자신을 바라보는 그에게 민우는 정중히 인사했다.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발표가 끝났는데도 아직 답을 얻지 못했다. 내가 너에게 선배라고 불릴 자격이 있는지.”
민식이 가방을 열어 뭔가를 꺼냈다. 그것은 언젠가 도서관에서 민우가 그에게 줬던 것과 같은 브랜드의 캔커피였다.
민우는 그때와 같지만 다른 그것을 받아들었다.
이미 식어 차가웠지만, 민우는 그 속에서 온기를 느낄 수 있었다.
그토록 기다리고 기다려왔던.
“박민우.”
민식은 할 말이 많아 보였다. 하지만 그는 시간과 장소가 적당하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도망가지 말고 뒤풀이는 꼭 참가해라. 알았어?”
“예!”
최민식이 돌아섰다. 발표장을 나가는 그의 뒷모습은 더 이상 외로워 보이지 않았다.
‘민식 선배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좋은 일보다 나쁜 일들이 많았다.
힘들었다.
때로는 포기하고 싶었다.
그럼에도 민우는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한 발 내디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