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27. Q.E.D. (1) (27/500)


027. Q.E.D. (1)
2021.04.02.


5월의 싱그러움이 캠퍼스에 만개했다.

하지만 민우는 도서관에 틀어박혀 단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나오지 않은 것이 아니라 나오지 못한 것이었다.

‘쯧. 이번에도 허탕이네.’

민우는 해외 학술지 복사본을 힘없이 내려놓았다.

<국제인류학저널>에 실린 논문이라 내심 기대하고 있었는데, 이 이론으로는 민식 선배의 논문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판단한 것.

강 교수의 프로젝트가 끝났음에도 민우는 새로운 이론을 찾아 쉴 틈 없는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아우, 눈이 다 뻐근하다. 이러다 진짜 안경 맞추게 되는 게 아닌가 몰라.’

민우는 가방에서 인공눈물을 꺼내 넣고 눈을 꾹 감았다. 벌써 여섯 시간 째 쉬지 않고 텍스트를 읽고 있으니 그럴 만했다.

마침 카페인도 떨어졌다. 민우는 자판기 커피를 뽑아 좀비처럼 휴게실로 내려왔다.

“으어어어.”

소파에 몸을 뉘고 발을 뻗으니 천국에 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대로 눈만 감으면 스르륵 잠이 들 것 같았다.

‘가만있자. 오늘이 며칠이더라.’

민우는 핸드폰을 켜고 달력 앱을 열었다. 오늘은 5월 23일 월요일이었다.

‘기말고사 기간이 얼마 안 남았네. 그 전에 새로운 이론을 찾지 못한다면 일이 틀어지는데…….’

6월에 접어들면 바로 기말고사가 시작된다. 민우가 듣는 과목의 수는 총 세 개.

즉, 학점을 받기 위해서는 소논문 세 개를 준비해야 한다는 얘기다.

논문의 개요는 물론 작품 분석까지 마친 상황이라 촉박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시간은 늘 충분할수록 좋은 법이다.

‘이번 주가 데드라인이야. 어떻게든 이번 주 내로 끝을 보자. 철야를 해서라도.’

민우가 휴대폰을 집어넣으려는 순간 진동이 울렸다. 민우가 팝업을 확인했다.

이수빈: 요즘 왜케 보기 힘들어요? 도서관에서도 안 보이고―ㅅ―

수빈에게 톡이 왔다. 보통은 진섭과 수빈, 그리고 민우 이렇게 셋이 있는 톡방에서 이야기를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민아와의 술자리 이후 수빈은 민우에게 따로 톡을 자주 보냈고, 민우는 그녀가 서운하지 않게 답장을 부지런히 했다.

‘그러고 보니 요즘 같이 점심도 못 먹었네.’

민우는 쭉 뻗은 다리를 맞은편 의자에 올려놓은 채 한가롭게 답장을 보냈다.

― 요즘 해외 저널 서가에서 공부해

이수빈: 12층에 있었어요? 미리 얘기해 주지. 무슨 일 있는 줄 알고 걱정했잖아요ㅠ

― 무소식이 희소식인 법이라는 말 모르냐

이수빈: 지금 그걸 말이라고^^…… 암튼 오늘 저녁은 같이 먹을 거죠?

― 너희들끼리 먹어

뭐라 답장이 왔지만 민우는 읽지 않고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책상이 완전 난장판이었다.

‘정리 좀 해야겠는데? 사서 선생님이 뭐라고 하겠다.’

우선 그는 널려있는 논문을 읽은 것과 읽지 않은 것으로 정리했다.

새로운 이론을 찾지 못했다고 해서 민우는 조금도 손해를 본 게 없었다.

왜냐하면, 그 과정에서 신화학과 관련된 최신의 이론과 지식들이 머릿속에 그대로 저장되었기 때문이다.

현재 민우는 국내의 권위 있는 신화학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지식을 축적해 놓은 상태였다.

물론 민우 스스로는 그 사실을 깨닫지 못했지만 말이다.

‘SSCI급 저널 중에서는 건질 만한 게 없었고, A&HCI급 저널 32개 중 안 읽은 게 8개…… 내일 중으로 모조리 해치운다.’

결의를 다진 민우는 읽지 않은 논문 복사본을 다시 집었다.

시간의 흐름과 함께 많은 학생들이 12층 서가를 오갔다. 하지만 오직 민우만이 그 자리를 지킨 채 열의를 불태우고 있었다.

어느덧 해가 지고 어둠이 깔렸다.

밤 10시가 되자 12층 사서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녀가 민우 옆에 와서 조용히 말했다.

“학생. 폐관 시간이에요.”

“아! 죄송합니다. 시간 가는 줄 몰랐네요.”

민우는 허둥지둥 자리를 치웠다. 복사물들이 많아 가방에 넣는 데 꽤 시간이 걸렸다.

“잠깐 기다려요. 쇼핑백 갖다 줄 테니까.”

곧 사서가 쇼핑백을 하나 들고 다시 나타났다. 덕분에 민우는 복사물을 편하게 들고 이동할 수 있었다.

“요즘 아침 일찍부터 늦게까지 공부하던데, 논문학기인가 보죠?”

“아뇨. 그냥 개인적으로 봐야 하는 게 있어서요.”

“열심이네. 좋은 결과 있기를 바랄게요.”

“감사합니다.”

모르는 사람에게 격려를 받으니 마음이 가벼워졌다. 민우는 엘리베이터에 올라 지하 1층을 눌렀다.

지상 열람실은 밤 10시면 문을 닫지만 지하 1층부터 지하 2층까지의 열람실은 24시간 운영된다. 복사물이 있으니 민우는 오늘 철야를 하기로 결정했다.

띵동.

지하 1층에 도착하자 엘리베이터가 멈춰 섰다.

내리려던 민우는 깜짝 놀랐다.

문이 열리자 환하게 웃고 있는 이수빈의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뭐야, 너.”

“이수빈인데요.”

“재밌냐?”

같잖은 농담에 민우는 피식 웃었다. 처음엔 너무 피곤해서 헛것을 본 줄 알았다.

“아직 안 가고 있었어? 오늘 과외 있다고 했잖아.”

“미뤘어요.”

“악질 선생이네.”

“이렇게 예쁘면 좀 악질이어도 상관없지 않아요? 그보다, 잠깐 시간 좀 내줘요.”

“뭐 잠깐 정도는. 그런데 그건 뭐야?”

수빈은 손에 쥐고 있던 것을 눈앞에 대고 흔들어 보였다.

“도시락이요. 저녁 안 먹는다고 하길래 집에 가서 간단히 뭐 좀 싸 왔어요.”

“왜 쓸데없는 짓을 하고 그래.”

“민 선생님이 늘 말버릇처럼 말씀하시잖아요. 공부는 밥심으로 하는 거라고.”

“한 끼 굶는다고 사람 어떻게 안 된다.”

“오빠 성격에 한 끼 굶지는 않았을 거 같은데.”

정확히 꿰뚫었다.

민우는 요 며칠 사이 저녁을 거의 먹지 못했다. 빵으로 때울 때도 있었고, 그냥 넘길 때도 많았다.

“아무튼, 자리 좀 옮기자.”

두 사람은 지하 1층 휴게실로 이동했다.

밤늦은 시간이라 사람이 별로 없었다. 민우와 수빈은 테이블을 하나 차지하고 도시락을 열었다.

김밥과 유부초밥, 과일로 채운 간단한 도시락이었다. 수빈은 일회용 젓가락을 뜯어 민우에게 건넸다.

“금방 한 거라서 맛있을 거예요. 많이 먹어요.”

“잘 먹겠습니다.”

민우는 먼저 김밥을 집었다. 김 특유의 비린내 없이 고소하니 맛있었다. 유부초밥도 시큼하게 잘 만들어졌다.

“맛있네.”

“당연하죠. 누가 한 건데.”

수빈은 턱을 괴고 민우가 먹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행복한 표정이다.

“근데 오빠.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

“뭔데?”

“왜 그렇게 몸 축내면서까지 민식 선배를 도와주려고 하는 거예요? 솔직히 난 아직도 이해가 안 돼요.”

“누가 누굴 도와줘?”

수빈은 멍해졌다. 민우의 대답은 자신의 예측 범위를 한참이나 벗어난 것이었다.

“까놓고 말해 내 도움이 필요할 만한 사람이야? 민식 선배나 되는 사람이?”

민식은 이미 KCI급 학술지에 5회 이상 논문을 실을 정도로 연구력을 인정받은 사람이었다. 그에 비하면 민우는 이룬 것이 없었다.

“그건 아니지만…….”

“아부하려는 것도 잘 보이려는 것도 아니야. 그냥 증명하고 싶어. 석사 나부랭이도 할 수 있다는 걸. 타 학교 출신도 해낼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은 거라고.”

“오빠.”

“무엇보다도…… 막상 일을 시작하니 내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시험해 보고 싶어졌어. 이번 일을 해낸다면 정말 크게 성장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학자로서도, 인간으로서도.”

민우는 자신의 생각보다 훨씬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수빈이 한숨을 내쉬었다. 걱정은 기우였다. 그는 생각보다 훨씬 강한 사람이었다. 어느새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오빠 고집을 누가 말려요. 민아 언니가 와도 못 말리겠네.”

“그거 칭찬이지?”

“그럼요. 당연히 칭찬이지.”

순식간에 도시락을 다 비운 민우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수빈은 조금 더 앉아있고 싶은 눈치였지만, 민우를 따라 일어서야 했다.

“밤샐 거예요?”

“그래야지.”

무리하지 말라고 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조금 다른 응원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오늘 밤에는 꼭 오빠가 원하는 이론을 찾기를 바랄게요.”

“고맙다. 이 빚은 꼭 갚을게.”

수빈과 헤어진 민우는 자리를 잡고 인쇄물을 펼쳤다. 이제 남은 저널은 네 개. 수빈의 응원을 받아서인지 느낌이 좋다.

‘이 안에 내가 원하는 페이퍼가 있을까?’

민우는 호흡을 가다듬고 다시 안경을 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흘러 새벽이 되었다. 지하 1층 열람실에 남은 것은 이제 민우 혼자뿐이다.

그는 집중을 잃지 않고 저널을 읽어 나갔다.

째깍째깍―

초침 소리와 함께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세상의 모든 것이 초침 소리에 묻혀 사라질 무렵. 바로 그때.

“어?”

민우의 입이 벌어졌다.

두 눈도 서서히 커졌다. 시침이 막 새벽 4시를 지날 무렵이었다. 그의 눈빛이 곧 떠오를 태양처럼 번뜩였다.

전율.

민우는 눈 앞에 펼쳐진 텍스트에서 분명한 쾌감을 느꼈다.

‘이거라면 가능할지도 몰라!’

손에 쥐어진 것은 <국제민속학저널> 최신호의 일부였다. 조너던 캠벨이라는 저자가 쓴 논문이 민우의 관심을 사로잡은 것이다.

벨기에 출신 민속학자인 캠벨의 이론은 명확했다. 전통적인 신화학을 계승하고 있으면서도, 현대적인 분석틀을 제시하고 있었다.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침을 꿀꺽 삼킨 민우. 두 손으로 뺨을 가볍게 때리고 다시 저널을 들었다.

‘다시, 신중하게 확인해봐야겠어.’

민우는 논문의 첫 페이지로 돌아와 다시 검토를 시작했다.

그렇게 한 시간이 지났다.

“해냈어. 해냈다고!”

검증이 끝났다. 이 이론이라면 분명 가능성이 있다.

감격을 이기지 못하고 벌떡 일어섰다.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도서관이 아니었다면 시원하게 소리를 한번 질렀을 것이다.

‘아니. 아직 끝난 게 아니지.’

민우는 다시 자리에 앉아 흥분을 가라앉혔다.

아직 남은 일이 하나 더 있었다.

복사본을 챙겨 도서관을 나섰다.

목적지는 인문관에 위치한 박사수료생 연구실. 새벽이라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불을 켠 민우는 최민식의 자리 앞에 섰다.

곧 복사된 논문이 그의 책상 위에 놓였다. 만감이 교차했다. 그 감정을 억누르며 민우는 포스트잇에 간단히 메모를 남겼다.

― 선배님. 우연히 저널을 읽다가 흥미로운 부분이 있어 복사본을 남깁니다. 논문에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박민우 드림.

민우는 불을 끄고 연구실을 나섰다.

할 일은 끝났다.

이제 최종 선택은 최민식의 몫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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