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6. 새로운 이론을 찾아서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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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6. 새로운 이론을 찾아서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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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6. 새로운 이론을 찾아서 (3)
2021.04.01.
“표 끊고 올게요.”
“난 팝콘 사 올게. 카라멜하고 치즈 섞으면 되지?”
“콜라는 제로 칼로리로.”
“뺄 살이 어디 있다고.”
곧 다시 만난 민우와 수빈은 함께 상영관으로 들어갔다. 좌석은 맨 뒤쪽 가운데였다. 곧 광고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영화 참 오랜만이네.”
“언제가 마지막이었는데요?”
“글쎄. 매번 집에서 케이블로 보다 보니 올 일이 별로 없지. 한 2년은 된 거 같은데.”
잠시 후 광고가 끝나고 영화가 시작되었다.
강력한 회복 능력을 가진 B급 히어로 이야기였는데, 조금 잔인하긴 했지만 재미있었다.
그간 공부로 쌓였던 스트레스가 확 날아가는 느낌.
영화가 상영되는 내내 수빈은 민우의 옆모습을 슬쩍 바라보았지만, 한 번도 눈이 마주친 적은 없었다.
그렇게 영화가 끝났다.
“어땠어요?”
“재밌네. 시간 내서 보길 잘했다. 기대했던 것 이상이야.”
민우는 통로를 걸으며 시원하게 기지개를 켰다.
‘가끔은 이런 것도 좋구나.’
굉장히 오랜만에 보는 영화였다. 중간중간 생각할 거리도 있었고, 무엇보다도 기분 전환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두 사람이 밖으로 나왔다.
밤공기가 시원했다. 어느덧 해가 완전히 저물어 사방이 불빛으로 가득했다.
“아직 시간이 좀 남았네. 30분 정도.”
“오빠 오빠! 나 저거 해보고 싶어요.”
민우는 수빈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시선을 옮겼다. 사격 게임장이었다. 일정 점수를 넘기면 인형을 주는 곳이었다.
한 게임당 2500원이었다. 민우는 현금을 내고 수빈을 사로에 서게 했다.
“해본 적 있어?”
“아뇨. 이런 기회 아니면 못 해볼 거 같아서요.”
“총은 이렇게 잡으면 돼. 이걸 이렇게 견착하고. 옳지. 왼손으로 이쪽을 받쳐 봐.”
“이렇게요?”
“그래. 이 손가락으로 방아쇠를 당기면 돼. 과녁 잘 보고 쏴.”
민우는 한 손으로 허리를 잡아주었다. 자세가 이상해서 옆으로 쓰러질 것 같았다.
잠시 후 사격이 끝났다.
“이야. 어떻게 한 발도 못 맞추냐? 이것도 재능이라면 재능이네. 역시 명인대생은 뭘 해도 달라.”
“처음 하는 거니까 그렇지! 오빠도 해 봐요. 얼마나 잘하나 보자.”
“얼마든지.”
이번엔 수빈이 게임비를 계산했다. 씨익 웃은 민우는 사로에 섰고, 방아쇠를 거침없이 당기기 시작했다.
툭툭툭툭.
총알이 나갈 때마다 과녁이 순서대로 쓰러졌다. 수빈이 입을 벌리며 감탄하는 사이 사격이 모두 끝났다.
만발이었다.
“어때? 대한민국 예비군의 실력이. 총은 이렇게 쏘는 거야.”
“치이, 운이 좋았던 거겠지!”
어깨를 으쓱한 민우는 인형이 놓인 선반에 서서 수빈을 불렀다. 핸드폰 고리로 쓸 만한 인형들이 종류별로 걸려 있었다.
“경품 받아가야지. 마음에 드는 거 하나 골라.”
수빈은 검지를 입술에 대며 인형을 쭉 살펴보았다. 눈길을 끄는 걸 집었다. 흰색 토끼 인형 고리였다.
수빈은 핸드폰 커버를 벗기고 고리를 연결하려고 했다. 생각보다 쉽지 않아 민우가 중간에 도와줬다.
“예쁘다. 그쵸?”
“가보로 모셔라.”
수빈은 생긋 웃었다.
민우가 준 인형을 손에 꼭 쥐었다. 과녁을 하나도 맞추지 못했지만, 그 이상의 것을 얻은 느낌이었다.
“오빠.”
“왜?”
“이러고 있으니 우리 꼭 데이트하는 거 같지 않아요?”
정작 그렇게 말한 이수빈 본인이 어색하게 웃었다. 부끄러운 속마음을 들키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건 민우도 마찬가지였다.
왠지 사이가 서먹해졌다. 민우는 그게 싫었다. 아직은 자연스러운 게 좋았다.
“그나저나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곧 약속 시간이다. 미리 가 있는 게 좋겠어. 경험상 1분이라도 늦으면 목숨이 위험할 거야.”
두 사람은 어색한 공기를 억누르며 약속장소로 이동했다.
박민아는 3번 출구에서 기다리는 중이었다. 피곤에 찌든 모습이 10년 차 직장인의 위엄을 여과 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누나!”
민아가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와 마주친 수빈은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언니. 처음 뵙겠습니다.”
“네가 수빈이니?”
수빈을 바라보는 민아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순간 찾아온 정적. 민우는 침을 꿀꺽 삼켰다.
* * *
“정말요?”
“진짜라니까. 얘 일곱 살 때까지 잘 때 이불에 오줌 싸고 그랬어. 어마어마했다고.”
“어머머머!”
첫 만남의 긴장감은 눈 녹듯 사라졌다. 생각보다 두 여자는 죽이 정말 잘 맞았다. 오랜 친구처럼 허물없이 대화를 나눴다.
물론 그 중간에 껴 있는 민우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예상하지 못했던 건 아니지만…….’
민아가 꺼내는 대부분의 말들이 민우와 관련이 있었고, 부끄럽거나 숨기고 싶은 과거였다. 민우는 혼자 술잔을 연거푸 들이켰다.
“그럼 막 소금 얻으러 다니고 그랬어요? 시골에서는 그랬다던데.”
“응. 우리도 그랬지. 대전이긴 해도 변두리였으니까. 그때마다 가기 싫어서 울고불고 난리를 쳤는데 동네에서는 아주 유명했어. 다 큰 오줌싸개로.”
보다 못한 그가 한소리 했다.
“거 옛날얘기는 그만 좀 하지? 당사자 앞에 놓고 뭐하는 짓이야.”
“왜 그래? 재미있잖아.”
말이 통하지 않는다.
민우는 고개를 홱 돌려 수빈을 바라보았다.
“재미있냐?”
“네!”
“아, 나 진짜.”
두 눈이 초롱초롱한 것을 보니, 이수빈은 진심으로 즐거워하고 있었다.
타개책을 찾지 못한 민우는 바람이나 쐴 겸 화장실로 몸을 피했다. 그런데 그가 자리를 비우자 분위기가 갑자기 진지해졌다.
수빈을 빤히 바라보던 민아가 툭 한마디를 던졌다.
“너 민우 좋아하지?”
수빈은 심장이 내려앉는 줄 알았다. 하지만 곧 평온을 되찾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줄 알았어. 민우를 바라보는 눈에 아주 하트가 뿅뿅하던데. 동생의 어디가 좋아?”
“솔직히 말씀드리면…… 외모나 이런 건 제 취향하고 거리가 멀거든요.”
“그런데?”
“우연히 도서관에서 오빠가 공부하는 모습을 봤는데, 그 모습이 너무 멋있는 거예요. 열심히 뭔가에 몰두하는 모습이…….”
고개를 살짝 든 수빈이 생각에 잠겼다. 아마 그때를 상상하고 있는 것이리라.
“그것뿐만이 아녜요! 오빠는 뭘 해도 당당해요. 자신감도 넘치구요. 공부 외적으로 배울 게 정말 많은 사람인 것 같아요. 실제로도 많이 의지하고 있어요.”
어느새 수빈은 엘리트 대학원생에서 귀여운 소녀로 변해 있었다.
그 모습을 보던 민아는 왠지 자신의 옛 모습을 보는 것 같아 흐뭇했다.
한편으로는 부럽기도 했다.
자신도 수빈의 나이 때는 사랑하던 사람이 있었다. 하지만 사회적인 성공을 위해, 집안을 위해 그 마음을 표현하지 못하고 감췄었다.
그래서 자신의 마음에 솔직한 수빈이, 그리고 그녀의 젊음이 조금 질투가 났다.
“완전히 빠져 있네.”
“그런가……요?”
“그런데 어쩌지? 민우 걔 둔해서 네 마음 잘 모를 텐데. 공부밖에 모르는 애라서. 평생 연애 한 번 못해본 거 보면 답이 나오잖아. 이성 문제엔 유독 서투른 애야.”
맞는 말이었다.
매번 연락을 먼저 하는 것도 자신이었고, 술김에 큰맘 먹고 자취방에서 하룻밤 자보기도 했지만 민우에겐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너도 고생이 많겠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민아는 생각이 많았다.
응원해 주고 싶은 관계다.
하지만 여러 가지 걸리는 것들이 많다. 집안의 차이라든지, 뭐 그런 세속적인 것들이.
“너희 부모님 두 분 모두 교수라고 했지? 예전에 민우한테 들었어.”
“예.”
“아는지 모르겠지만 우리 집. 그리 넉넉하지 않아. 아버지도 일찍 돌아가셨고. 어머니도 시장에서 장사하셔.”
“알고 있어요. 하지만.”
민아가 손을 뻗어 그녀의 말을 막았다.
“알아. 네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시작도 하기 전부터 찬물을 끼얹을 생각은 없는데 신중히 생각하는 것도 필요하긴 하다는 거야.”
수빈은 고개를 숙였다. 막연하게 고민하고 있던 것들이 민아의 입에서 나오자 할 말을 잃었다.
집안의 차이.
분명 자신의 부모는 민우와의 교제를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민우는 아직 석사 1학기이고, 스스로 이룩해 놓은 게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잠시 후 수빈이 고개를 들었다.
“언니는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요? 솔직하게 말씀해 주세요.”
“그건 너희들이 결정할 문제지. 성인이잖아. 내가 끼어들 문제는 아닌 것 같아.”
“그래도요.”
“그래도 한마디 해 준다면…….”
민아는 뜸을 들였다. 한편 수빈은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잘 어울려. 둘이. 잘됐으면 좋겠다.”
“정말 고마워요. 고맙습니다.”
“하지만 그 전에 민우의 마음을 사로잡는 게 우선이겠지? 열심히 해 봐. 쉽진 않겠지만.”
“네!”
수빈은 우울한 표정을 떨쳐내고 환하게 웃었다. 뜻밖에 조력자를 얻은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때마침 민우가 돌아왔다.
“무슨 얘기 하고 있었어?”
“니 흉.”
“질리지도 않냐 진짜.”
두 여자는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민아는 계속 민우의 어렸을 적 부끄러운 모습을 이야기했고, 수빈은 손뼉을 치며 즐거워했다.
하지만 모든 만남에는 끝이 있는 법이다.
열한 시가 넘자 술자리가 끝났다. 민우는 해방감을 만끽하며 술집을 나섰다.
“누나는 바로 집에 가지?”
“글쎄. 집으로 가기가 좀 애매해졌네. 오늘 너희 집에서 신세 좀 지자.”
“그래 그럼. 수빈이 넌?”
“전 여기에서 지하철 타고 가면 돼요.”
“조심히 가라.”
민우가 손을 들어 보였다.
수빈은 하고 싶은 말이 있었지만 선뜻 꺼내지 못했다. 같은 여자였던 민아만이 그 마음을 눈치챘다.
“동생아. 열쇠 줘.”
“응?”
민아가 동생의 어깨를 툭 밀쳤다. 민우는 휘청이며 수빈의 옆에 섰다.
“어여쁜 동생이 술에 취했는데 혼자 집에 보낼 생각이야? 개념은 어따가 팔아먹고 다니는 거야. 가서 데려다주고 와!”
민아는 민우에게 열쇠를 빼앗아 들고 버스에 몸을 실었다. 어쩔 수 없이 민우는 수빈을 데려다주기로 했다.
“집이 어디였지?”
“반포동이요.”
“가자.”
두 사람이 지하철역 계단을 내려갔다. 수빈이 술김에 살짝 휘청거리자, 민우가 팔을 잡아주었다.
“괜찮아? 잠시 쉬었다 갈까?”
“변태.”
수빈이 정색하자 민우가 깜짝 놀랐다.
“농담이에요. 갑자기 술이 올라오네. 헤헤.”
“그러게 작작 좀 마시지.”
지하철에 타서 자리에 앉자 기다렸다는 듯 수빈은 민우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곧 수빈의 팔이 축 늘어지더니 민우의 허벅지에 닿았다. 어느새 그녀는 꿈나라를 헤매고 있었다.
그때, 수빈이 했던 한마디가 생생하게 떠올랐다.
― 이러고 있으니 우리 꼭 데이트하는 거 같지 않아요?
민우는 허전하게 놓인 수빈의 손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곧 헛웃음이 나왔다.
‘세상에 잘난 남자들이 얼마나 많은데 하필 나를 좋아하냐. 이 헛똑똑아.’
민우는 화장실에서 돌아오는 도중에 두 여자의 이야기를 모두 들었다. 엿들을 생각은 없었지만,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
처음에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당황스러웠다. 착하고 예쁜 동생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어느새 여자가 되어 버린 것이다.
민우는 수빈을 향한 자신의 마음이 어떤지 확인했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아직은 아니야. 하지만 언젠가는…….’
민우는 슬며시 수빈의 손을 잡아주었다. 작고 따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