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5. 새로운 이론을 찾아서 (2)
(25/500)
025. 새로운 이론을 찾아서 (2)
(25/500)
025. 새로운 이론을 찾아서 (2)
2021.03.29.
다음 날, 민우는 마지막 챕터의 번역을 마무리했다. 평소보다 더욱 신경을 써서 용어를 다듬었고, 각주를 정리했다.
‘이걸로 충분한 걸까?’
연주는 든든한 조력자였다. 때로는 선생이기도 했다. 그런 그녀가 없으니 민우는 확신을 하기 어려웠다.
한참을 원고만 바라보던 민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만하자. 할 수 있는 데까지 했어.’
민우는 번역 원고를 강철훈 교수의 메일로 발송했다. 컴퓨터를 끄려다가 다시 인터넷 창을 켜고 메일 보내기를 클릭했다.
잠시 고민하던 민우는 키보드를 두드렸다.
받는 이에 메일 주소가 적혔는데, 그것은 연주의 것이었다. 중간에 프로젝트에서 빠지긴 했어도 최종본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민우는 메일의 내용을 채워 나갔다.
― 무슨 일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간 수고 많았다. 덕분에 많이 배웠어.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다. 하는 일 모두 잘 되기를 바란다.
민우는 마우스를 클릭해 최종 번역본을 첨부파일로 걸었다. 이어 발송 버튼을 누르고 컴퓨터를 종료했다.
‘이걸로 끝이야.’
한 달 동안 진행된 강철훈 교수의 번역 프로젝트가 종료되었다. 우연히 알게 된 연주와의 접점도 이것으로 완전히 사라졌다.
조금 아쉽긴 했지만 그것도 인연이라고 생각했다.
會者定離去者必返.
인연이 있다면 또 만날 기회가 있을 것이다.
‘그나저나 이번 달은 좀 넉넉하게 지낼 수 있겠네. 보고 싶었던 책들 좀 사놔야겠다.’
프로젝트가 완료되었으니 이번 달 말에 수고비가 입금된다. 번역서는 올해 말에 출간될 예정이다.
민우의 예상대로 프로젝트에 참가한 학생들은 역자 리스트에 올라가지 못했다. 출판사의 반대가 생각보다 심했기 때문이다.
대신 역자 서문에 감사의 인사말을 겸해 이름이 언급된다고 들었다.
그래도 학생들은 실망하지 않았다. 분명 이번 프로젝트는 지식적인 면에서 도움이 되었으니까.
특히 민우는 막연히 알고 있었던 서사학이라는 분야에 대한 이해가 깊어졌다.
< The Oxford Introduction to Narrative >는 이야기와 등장인물, 플롯 등 소설의 광범위한 지식을 담고 있는 책이었기 때문에 작품 분석 능력이 예전과는 확연히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성장했다는 게 바로 이런 느낌인가?’
이제 서사학이라면 자신이 있었다. 강의 청탁이 와도 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이랬다.
벽을 하나 넘은 느낌.
그 지적 충만감을 만끽하며 민우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시계를 확인하니 오후 2시가 좀 넘어있었다.
‘약속 시간까지는 4시간 정도 남았네. 그 틈에 신화학 이론을 좀 찾아보자.’
중앙도서관 정보열람실에서 나온 민우는 해외 저널 서가로 이동했다.
해외 저널 서가는 중앙도서관 12층에 위치하고 있었다.
여기는 해외에서 발간된 학술 서적을 모아놓은 곳이었다. 인문학, 사회학, 예술, 자연과학, 공학 등 분야별로 정리가 잘 되어 있었다.
명인대학교 해외 저널 서가는 전국적으로도 유명했는데, 모든 자료들이 전산화되어 그 세부 내용까지 열람할 수 있다는 게 특징이었다.
‘엘리아데의 전통을 잇는 신선한 이론. 그것만 찾으면 게임 끝이야.’
민우는 컴퓨터 앞에 앉아 대분류를 설정했다. 그리고 언어 설정에서 영어와 독일어, 프랑스어, 기타 유럽어를 모두 체크했다.
민우는 키워드를 입력했다.
― Mythology.
곧 수많은 결괏값들이 모니터에 출력되었다. 약 270여 개의 논문 및 저널들이 리스트에 나타났다.
‘생각보다 많다. 일주일 가지고는 택도 없겠어. 우선순위를 정해야겠는데?’
민우는 A&HCI와 SSCI 저널을 순차적으로 정렬했다.
Arts and Humanities Citation Index.
Social Science Citation Index.
두 등급은 흔히 말하는 ‘SCI급 저널’이다. A&HCI는 예술 및 인문학 관련 분야를, SSCI는 사회과학분야를 중점적으로 다룬다.
국제적인 권위 때문에 좋은 이론이 소개될 확률이 그만큼 높다고 판단한 것이다.
‘A&HCI급 저널은 32개. SSCI급 저널은 7개. 이 정도면 해볼 만하겠어.’
민우는 먼저 A&HCI급 저널에 소개된 신화학 관련 페이퍼를 모조리 인쇄했다. 그리고 열람실에 돌아와 정독을 시작했다.
안경을 쓰니 완전히 새로운 세계가 펼쳐졌다.
국내 학술지와는 또 다른 느낌.
논문이라는 형식에 구애받지 않으면서도 굵직한 논지를 전개하는 논문들이 굉장히 많았다. 문화의 차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컸다.
‘세계적 수준의 논문들은 이렇게 쓰는 거구나.’
민우는 마치 망망대해 앞에 선 듯한 느낌을 받았다. 저 멀리 보일 듯 말 듯 한 목표를 향해 노를 젓기 시작했다.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갔다.
저널에 빠져 있던 민우가 정신을 차렸다. 진동 알람이 울렸던 것이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다고?’
민우는 서둘러 인쇄물을 정리하고는 가방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목적지는 인문관. 오늘은 이수빈과 영화를 보러 가는 날이었다.
약속 시간은 6시 반.
시간이 되자 이수빈이 또각거리는 소리를 내며 계단으로 내려왔다.
그녀의 모습을 본 민우는 깜짝 놀랐다.
‘세상에.’
하얀 블라우스와 연분홍빛 치마. 거기에 굽이 높은 구두까지 신었다. 이렇게 예쁘게 꾸민 모습은 민우도 처음이었다.
“왜 그렇게 봐요. 뭐 묻었어요?”
“아.”
그제야 민우가 정신을 차렸다.
“아니. 그게 아니고. 매번 바지에 운동화만 신고 다니더니 대체 무슨 바람이 분 거야? 소개팅 복장인데? 완전.”
“그냥. 오늘 좀 그럴 일이 있었어요.”
“발표라도 있었어?”
눈치가 없어도 이렇게 없을 줄이야. 쭈뼛하던 수빈이 버럭 짜증을 냈다.
“뭘 그렇게 꼬치꼬치 캐물어요? 빨리 가기나 해요. 이러다 늦겠네!”
“왜 승질이야. 가면 될걸.”
영화관은 명인대입구역 근처에 있었다. 버스를 타고 15분여 정도를 나가야 했다. 민우와 수빈은 버스에 올라 자리에 앉았다.
마침 뒷자리가 비어 있어 가면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섭이는?”
“오늘 친구들이랑 술판 벌인다고 일찍 가더라고요.”
“좋겠네. 친구들이 다 서울에 있어서.”
민우는 대전 출신이다. 그곳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다. 친하게 지내는 친구들은 대부분 대전에 있었다.
“뭘 부러워해요. 이렇게 같이 영화 봐 주는 사람도 있는데.”
“네가 봐 주는 거였냐? 내가 너랑 봐 주는 게 아니라?”
가만히 민우를 바라보던 수빈이 그의 이마를 짚었다. 그리곤 고개를 갸웃했다.
“열은 없는데 이상한 말씀을 하시네. 저랑 영화 같이 보자고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줄 알아요? 영광인 줄 알아야지.”
민우는 혀를 찼다. 확실히 수빈의 주변에는 남자가 많다. 이 테마로는 더는 논박할 수 없었다.
“그나저나 뭐 하고 있었어요? 오늘 수업 일찍 끝난 거 같던데.”
“신화학 자료 좀 찾고 있었어.”
“신화학이요? 석사 논문 테마 그쪽으로 잡은 거예요?”
“아니. 민식 선배한테 자료 좀 찾아 주려고.”
수빈은 두 눈을 깜빡였다. 이해할 수 없는 표정으로 민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빠 민식 선배한테 악감정 있는 거 아니었어요?”
“감정이 없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뭐 다 끝난 일이잖아. 대강 사정도 알게 됐는데 괜히 꿍해 있을 필요 있나. 하루 이틀 볼 사이도 아니고.”
“보살이네. 오빠 한화 팬이죠?”
민우는 피식 웃으며 말을 돌렸다.
“참, 연주 학교 쉰다더라.”
“응? 왜요?”
“집에 일이 좀 생겼나 봐. 나도 자세한 건 몰라. 프로젝트도 중간에 빠져서 나 혼자 했어.”
“무슨 일일까요? 그렇게 책임감 없는 애는 아닌데. 걱정이네요.”
민우는 그 이유를 알지만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
“인연이 닿으면 또 볼 일이 있겠지.”
버스는 어느새 캠퍼스를 빠져나가 대로에 접어들었다. 퇴근 시간이라 그런지 차가 많이 막혔다. 시간이 조금 아슬아슬할 것 같았다.
창밖을 바라보던 민우가 뭔가를 떠올리고는 수빈에게 말했다.
“우리 누나가 너보고 시간 좀 내달라고 했었다.”
“언제가 좋을까요?”
민우는 당황했다. 괜찮다며 사양할 타이밍인데 이 당돌한 태도는 대체 뭐란 말인가.
“그 전에 왜냐고 묻는 게 정상 아니냐?”
“자료 구해준 거 답례로 밥 사 주시려는 거 아녜요? 전에 오빠한테 얘기했잖아요. 언니가 부르면 꼭 알려달라고. 좀 늦게 알려준 거 같은데. 솔직히 말해 봐요. 까먹고 있었죠?”
맞아. 그랬었지.
수빈이와 자취방에서 새벽까지 술을 마시고 난 다음 날, 자료집을 가방에 넣어주며 그런 이야기를 했었다.
‘정말 새까맣게 잊고 있었네.’
민우는 미안한 마음으로 수빈을 바라보았다. 다행히 그녀는 추궁하는 것에 관심이 없어 보였다.
“밥 말고 술은 안 되려나. 오늘 영화 보고 나서 만나면 딱 좋을 거 같은데.”
“오늘? 너무 갑작스럽지 않아?”
“우리가 이렇게 여유 부리는 것도 오랜만이잖아요. 또 같이 시간 맞추려면 어려울 거고.”
“하긴.”
그것도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민우는 고민했다.
이후에 일정이 있는 건 아니지만, 과연 누나가 시간을 내줄지 알 수 없었다.
“일단 톡 보내볼게.”
민우는 오늘 시간이 괜찮냐는 문자를 보냈다.
곧 답장이 왔다. 오케이였다.
세 사람은 명인대역 3번 출구에서 만나기로 했다.
뭔가 일이 급 진전되는 것 같은 느낌에 민우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누나가 무슨 말을 할지 예측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미리 말하지만 우리 누나 보통이 아냐. 난처해질 수도 있어. 일단 이따 약국에 가서 청심환 하나 사 먹자.”
“괜찮아요. 언젠간 해야 하는 일인데요 뭐.”
“그게 무슨 소리야? 언젠가 해야 하는 일이라니.”
“몰라도 돼요. 오빠는.”
이수빈은 승부욕을 불태웠다. 이번 기회에 민우의 누나에게 좋은 점수를 받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그렇게 두 사람은 영화관에 도착했다.
영화관 로비로 들어가니 손을 잡거나 팔짱을 낀 사람들이 눈에 쉽게 띄었다.
“커플이 참 많네요.”
“그러게.”
“부럽다. 우리도 대학원 안 왔으면 직장 다니면서 연애도 하고 그랬겠죠?”
민우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연애는 둘째 치고 취업이라도 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힘들었겠지. 이번 상아대 국문과 취업률이 30퍼센트도 안 됐다고 하니까.’
한편 커플들을 빤히 바라보던 수빈이 민우에게 조금 더 가까이 붙었다.
손만 잡지 않았을 뿐이지, 남들이 보기엔 두 사람도 커플이나 다름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