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4. 새로운 이론을 찾아서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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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4. 새로운 이론을 찾아서 (1)
2021.03.26.
민우와 수빈은 수업을 마치고 인문관을 나섰다. 바람은 따뜻했고, 간간이 꽃잎이 흩날려 운치를 만들었다.
“본가에서 잘 쉬고 왔나 봐요? 얼굴이 좀 폈네.”
“그래?”
석사 논문계획서가 이면지함으로 들어간 이후로 민우는 주눅이 들어 있었다. 그런데 주말 사이에 얼굴이 몰라보게 달라졌다.
누구보다도 민우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는 수빈이었기에 한눈에 알아본 것이다.
“보기 좋아요. 늘 이랬으면 좋겠다.”
“정확히 어떻길래?”
“오빠가 딱 명인대에 입학했을 때 그 모습 같아요. 눈빛도 그렇고.”
민우는 그녀가 정확히 봤다고 생각했다.
지금 마음 상태가 딱 그랬다.
모두가 서지훈 교수 덕분이었다. 그의 한마디 한마디가 자신에게 큰 힘이 되었다. 그 신뢰에 보답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칭찬한다고 뭐 안 나온다. 적당히 해.”
“맞다!”
수빈이 갑자기 손뼉을 치자 민우가 깜짝 놀랐다.
“뭐야? 갑자기.”
“본가 하니까 생각난 건데, 전에 영화 보기로 했었잖아요. 언제 볼 거예요?”
“영화? 뭔 소리야?”
“이 사람 봐라. 예전에 오빠 짝사랑녀한테 차였을 때 보기로 약속했잖아요. 그때 본가에 내려간다고 다음에 보자고 했으면서.”
“아.”
그제야 기억이 떠올랐다. 일에 치이다 보니 새카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일전에 강효진이 명인대에 찾아왔을 때였다. 그녀와 다투고 난 뒤 위로를 받을 때 수빈과 영화를 보기로 했었다.
민우는 이번 주 스케줄을 머릿속에 펼쳐 보았다.
“그럼 내일모레 가든가.”
“내일은 안 돼요?”
“내일은 번역 프로젝트 마무리 작업해야 돼.”
“그래요 그럼. 내일모레!”
수빈은 기분이 좋은지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섭이한테는 네가 얘기해라. 내일모레 시간 비워 두라고.”
꽃처럼 환하게 피어 있던 수빈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이 사람은 왜 이렇게 눈치가 없나. 마음이 답답해졌다.
“왜 섭이 오빠한테 얘기해요? 우리 둘이 봐야죠. 둘이 약속한 건데.”
“알았어.”
곧 두 사람은 갈림길에서 헤어졌다. 수빈은 토라진 표정으로 돌아섰는데, 민우는 끝까지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할 일이 남았던 민우는 도서관으로 향했다.
엘리베이터에 올라 7층 버튼을 눌렀다. 곧 문이 닫혔다.
‘영화는 되게 오랜만이네.’
그 시간에 논문을 하나라도 더 보는 게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이 든 것도 사실이다. 그래도 민우는 가끔 기분전환을 할 필요가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엘리베이터가 7층에서 멈췄다.
열람실에 들어온 민우가 잠시 멈칫했다. 맞은편에서 익숙한 사내의 모습을 발견했던 것이다.
‘민식 선배.’
그는 피곤에 찌든 표정으로 논문을 뒤적거리고 있었다. 때때로 한숨까지 쉬었다. 아직도 마땅한 해결책을 찾지 못한 모양이었다.
‘박사 논문. 잘 풀렸으면 좋겠는데.’
이제 그에 대한 원망은 희미해져 있었다. 그에게도 말 못 할 사정이 있다는 것을 이재환 선배에게 모두 들었기 때문이다.
민우는 손에 쥔 따뜻한 캔커피를 만지작거리며 그에게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선배.”
민식은 조금 놀란 눈치였다. 민우는 캔커피를 책상에 내려놓았다.
“피곤하시죠. 좀 드세요. 지금 막 뽑아서 따뜻합니다.”
“너…….”
민우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 자리를 떠났다. 민식이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그리고 캔커피를 어떻게 했는지는 별로 알고 싶지 않았다.
늘 앉던 곳에 자리를 잡고 노트북과 번역 원서를 꺼냈다. 주변은 쥐죽은 듯 조용했다.
문득 민식의 뒷모습이 떠올라 민우는 잠시 손을 멈췄다.
‘민식 선배 논문 보조. 슬슬 시작해야 하는데.’
시간이 좀 지나긴 했지만 민우는 그에게 인정을 받겠다는 생각을 바꾸지 않았다.
그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이제는 조금 다른 꿈을 꾸고 있었다.
‘내가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한계를 시험해 보고 싶어졌어.’
민우는 예전 논문 프로포절 때 최민식이 발표한 페이퍼를 세 번이나 정독했다.
그뿐이 아니다. 그가 지금까지 발표한 소논문과 기타 학술논문 등을 빠짐없이 읽었다. 이제 그의 학문 세계에 들어갈 준비를 마친 것이다.
민우는 민식의 박사 논문 초안을 떠올렸다.
‘엘리아데의 이론으로 이청준 소설에 나타난 신화적 모티프를 분석한 논문이었지. 이론이 너무 낡았다는 지적을 받았고. 민식 선배도 그 부분에서 고민하고 있는 게 분명해.’
민우는 신화학에 정통한 학자들의 이름을 떠올려 보았다.
비교신화학의 거장 조르주 뒤메질(Georges Dumézil).
구조주의와 인류학의 거목 클로드 레비스트로스(Claude Lévi―Strauss).
마지막으로, 신화학의 상징인 미르체아 엘리아데(Mircea Eliade).
신화학을 공부한다면 당연히 한 번쯤은 거쳐 가야 하는 인물들이었다.
하지만 민우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뭔가 전혀 다른 게 필요하다.’
이미 이들의 이론은 널리 알려져 있고, 많은 사람들이 논문에서 소모했다. 젊은 학자의 입장에서는 뭔가 신선한 게 필요했다.
박사학위 논문은 석사 논문과는 격이 다르다.
석사 논문이 예선이라면 박사 논문은 본선이라 할 수 있다.
게다가 명인대 국문과에서 발표되는 박사 논문은 대개 단행본으로 출간될 정도로 수준이 높다.
때문에 민식에게 필요한 것은 기존 학자들이 남긴 연구실적을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뭔가 한 발자국 나갈 수 있는 신선함이었다.
그렇다면 방법은 딱 하나.
‘새로운 이론!’
아직 민우는 학문적으로 여물지 않았다. 새로운 이론을 만들어 내기엔 한참이나 부족했다.
하지만 그에겐 그것을 대신할 만한 능력이 있었다.
바로 해외 서적을 빠르게 읽을 수 있는 능력.
‘이주일…… 아니, 일주일 정도면 민식 선배에게 필요한 이론을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몰라.’
물론 그것은 일이 잘 풀렸을 때의 이야기다.
반대로 아무런 성과도 없이 일주일을 허비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아니, 허비는 아니다.
최신의 해외 학술서를 읽으며 지식을 쌓을 수 있으니 밑져야 본전인 일이다.
‘내일부터 시작해볼까? 오늘 번역만 끝내면 내일부터는 짬이 좀 나니까.’
결정을 내린 민우는 프로젝트 원서인
를 펼쳤다.
우연한 기회로 참여하게 된 번역 프로젝트가 내일 마무리된다고 생각하니 감회가 새로웠다.
책장을 넘기다 문득 연주 생각이 났다.
‘연주 녀석 요즘 통 연락이 없었지. 답장도 없었고. 무슨 일 있는 건가? 학교에도 안 나오는 거 같던데.’
민우는 예전에 대한그룹 비서실장 유진태에게 명함을 받은 기억을 떠올리고는 가방을 뒤졌다. 다행히 명함이 그대로 있었다.
연락해볼까 했지만, 오지랖인 것 같아 그만두었다.
‘어린 애도 아니고. 무슨 이유가 있겠지.’
민우는 명함을 도로 가방에 넣고 다시 키보드에 손가락을 올렸다.
타닥타닥.
번역은 별거 없었다. 그저 보이는 대로 치면 그만이었다. 다른 생각을 해도 지식은 고스란히 머릿속으로 흡수되었다.
그때 잘 나가던 민우의 손가락이 뚝 멈췄다. 다시금 연주 생각이 난 것이다.
‘아무래도 그때 일이 마음에 걸린단 말야.’
얼마 전 강 교수에게 명함을 받고 나와 카페에서 시간을 보냈던 일이 생생히 떠올랐다. 그때 연주는 분명 무슨 일이 있어 보였다.
고민.
정확히 말하자면 어떤 갈림길에서 고민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내일 만나기로 했으니 어떻게든 답이 나오겠지. 일단 작업에 집중하자.’
민우는 작업 속도를 올렸다.
그 와중에 민우를 지켜보는 시선 하나가 있었다. 최민식이었다. 그는 한참 동안 민우의 모습을 지켜보다가 자리를 떴다.
그는 민우가 건넨 캔커피를 손에 쥐고 있었다.
* * *
띠링―
아침 일찍 도착한 문자 하나에 민우는 심각해졌다. 그 자리에 굳어 한참이나 핸드폰을 바라볼 정도로.
“뭔데 그래?”
“아니, 아무것도.”
민우는 진섭을 뒤로 한 채 307호에서 나왔다.
그리고 다시 핸드폰을 열었다.
― 죄송해요. 당분간 학교에 나가지 못할 거 같아요. 번역 마무리 잘 부탁드려요.
연주에게서 온 문자였다.
문자를 받자마자 민우는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연결되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일이야?’
민우는 그 마음을 담아 문자를 보냈다.
한참이 지나도 답이 없자 답답한 마음이 들어 다시 전화를 걸었다. 이번에도 끝내 연주의 목소리를 듣지는 못했다.
‘프로젝트는 어떻게 하지? 마무리를 지어야 하는데.’
민우는 한참을 생각했다.
전체적인 번역은 쉽게 할 수 있지만, 용어나 각주 처리 문제가 남아 있었다. 이건 안경이 대신해 줄 수 없는 부분이었다.
‘만년필을 사용한다고 해도 한계가 있고.’
한참을 고민하던 민우는 결국 강철훈 교수 연구실을 찾았다.
“선생님. 박민우입니다.”
“들어오게.”
소파에 마주 앉은 강철훈 교수가 안경을 벗으며 말문을 텄다.
“연주 양 때문에 왔지?”
“알고 계셨습니까?”
“나도 오전에 연락을 받았네. 당분간 학교를 쉬게 됐다고 하는군.”
짐작되는 장면이 있었다.
얼마 전 인문관 앞에 나타난 고급 세단. 그리고 내렸던 비서실장 유진태. 그가 말했다. 회장님이 급히 찾는다고.
‘혹시 집안의 반대로 더 이상 공부를 할 수 없게 된 건가?’
충분히 설득력 있는 가설이었다.
그 가설로 퍼즐을 맞춰보니 아귀가 맞았다. 카페에서 연주는 왜 공부를 하게 됐냐고 물었다. 그리고 후회하지 않냐고 물었다.
민우는 보다 확실한 대답을 얻기 위해 강철훈 교수를 선택했다. 왠지 그라면 전후 사정을 다 알고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연주가 왜 학교를 쉬게 됐는지 이유를 알고 계십니까?”
“그건 말하기 곤란해.”
“연주가 대한그룹 회장 손녀딸이라는 사실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 얼마 전 유진태 비서실장님께 명함을 받았었습니다.”
“알고 있었나? 아는 사람은 굉장히 드문데.”
그제야 민우는 알 수 있었다. 연주가 자신의 정체를 숨기려 했다고. 아마 이수빈도 그녀의 신분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을 것이다.
강 교수는 잠시 고민하더니 이윽고 입을 열었다.
“집안에서 더 이상 허락을 해주지 않았던 모양이야. 학교를 그만두고 가업을 승계할 준비를 한다고 들었네. 정 회장님의 건강이 많이 안 좋아졌다고 하더군.”
“가업을 승계하면서도 공부는 할 수 있는 거 아닙니까?”
“따져야 할 상대를 잘못 찾은 것 같은데.”
“아, 죄송합니다.”
강철훈 교수가 천장을 바라보았다. 허탈한 눈빛. 그도 연주의 부재를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선생님.”
그제야 강철훈 교수가 고개를 내렸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럼 프로젝트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마무리 단계입니다.”
“지금으로서는 딱히 좋은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군. 마무리는 자네에게 일임하지. 모쪼록 연주 양의 노력이 헛되지 않게 신경 써 줘.”
“알겠습니다.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민우는 아쉬움을 뒤로한 채 연구실을 나섰다.
하지만 그는 한참이나 그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곧 연주가 나타나 오빠 하며 자신을 부를 것 같았기 때문이다.
물론, 아무리 기다려도 그녀의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