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3. 힐링 캠프 (2)
(23/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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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3. 힐링 캠프 (2)
2021.03.25.
‘동방에 사람 좀 있으려나?’
민우는 서지훈 교수 연구실을 찾기 전에 동아리방에 들르기로 했다. 혹시나 후배들이 남아 있을까 하는 마음에서.
민우는 반년 전까지만 해도 ‘상아문학회’의 열성 회원이었다. 회장까지 역임할 정도로 문학에 대한 열정을 불태웠었다.
동아리방에 도착한 민우는 벽면에 걸려있는 대자보를 주목했다.
‘녀석들. 신입생 모으느라 고생이 많구나.’
민우는 노크 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의자에 반쯤 누운 채 만화책을 보던 남학생이 민우를 보고는 화들짝 몸을 일으켰다.
“민우 형!”
“잘 지냈냐?”
민우의 뒤를 이어 상아문학회 회장을 맡게 된 최철호였다. 10학번. 민우보다 두 살 아래였다. 친동생처럼 잘 따랐다.
“형! 와 대박. 진짜 깜짝 놀랐네요. 저야 여친 없는 거 빼곤 잘 지냈죠. 근데 학교엔 어쩐 일이세요?”
“서지훈 선생님 뵈러 왔다. 너희들 생각나서 잠깐 들렀어. 일단 이거 받아. 합평할 때 나눠 먹어라.”
민우는 미리 편의점에서 구입한 과자와 음료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두 봉지나 될 정도로 양이 많았다.
“뭘 이런 걸 다 사 오셨어요. 잠깐만 기다리세요. 애들 부를게요. 다들 반가워할 겁니다!”
최철호는 여기저기에 톡을 보내고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잠시 후 문이 열리며 후배들이 하나씩 뛰어 들어왔다.
“너희들 껀수 잘 잡았다? 수업 도중에 몰래 도망도 나오고.”
“선배도 그랬었잖아요!”
“못된 것만 배워가지고는.”
민우는 웃기만 할 뿐 뭐라 하지 못했다.
학부 시절, 낮술이 당겨 출석만 체크하고 잔디밭으로 나가 소주를 깐 적도 있었다. 그것이 대학 생활의 낭만이라고 생각했었다.
지금도 큰 틀이 변한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교수 쪽으로 방향을 잡고 나니 걱정이 들었다.
한편 12학번 주예린은 오랜만에 본 민우를 보고 신이 났다. 그녀는 최철호와 함께 학부 시절 친하게 지내던 후배였다.
“오빠 대학원 생활은 어때요? 응? 명인대 아무나 못 가잖아요.”
“죽을 거 같아.”
“에이, 엄살은. 오빠 잘하고 있다고 서 교수님이 매일 칭찬하던걸요.”
“그런 말씀을 하셨어?”
“수업 시간에 가끔 하세요. 그래서 그런지 대학원 준비하는 애들이 많이 늘었어요. 오빠처럼 공부하고 싶다는 애들도 좀 있고요.”
“인생은 한 번뿐이야. 잘 뜯어말려라.”
민우는 반쯤 농담으로 말했다. 이제 석사 1학기가 지나고 있다. 대학원은 이렇다고 말할 만한 위치가 못됐다.
민우는 한참 동안 후배들과 환담을 나눴다. 잠시나마 공부를 잊고 편하게 시간을 보냈다.
“그럼 난 이만 가야겠다. 열심히들 해.”
“형. 다음 달에 창립제 있는 데 오실 거죠?”
“시간 되면 꼭 올게. 그 전에 연락 한번 줘라.”
“꼭 양손 무겁게 오셔야 합니다!”
민우는 아쉬움을 뒤로한 채 인문대 건물로 방향을 잡았다.
서지훈 교수의 연구실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마그네틱이 ‘재실’에 걸려있었다. 명인대 입학 이후 처음 서지훈 교수를 찾아온 거라 그런지 가슴이 벅차올랐다.
민우는 가볍게 노크를 했고, 안에서 들어오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어, 왔어?”
서지훈 교수는 여전했다. 학생들에게 잔소리를 들을 정도로 갈색 스웨터를 즐겨 입었는데, 오늘도 입고 있었다.
왠지 그 모습을 보니 마음이 뭉클했다.
“얼굴 살이 좀 빠졌구나. 고생 많이 했나 보다.”
“잠을 많이 못 잤어요. 공부하느라.”
“그게 학문하는 사람들의 숙명이지. 다크서클은 훈장 같은 거고.”
서지훈 교수는 직접 걸어와 민우와 악수했다. 민우는 미리 준비한 캔커피를 서 교수에게 건넸다.
“마침 생각났는데 고맙다. 네가 졸업한 이후로 이 캔커피를 사 오는 친구들이 없어져서 아쉬웠던 참이야.”
“제가 후배들 교육을 잘못시킨 모양입니다.”
“하하하. 그러게 잘하지 그랬어. 점심은 먹었고?”
“먹고 왔어요.”
서 교수는 소파에 앉았고 민우는 감회가 어린 표정으로 연구실 서고를 둘러보았다.
‘그대로구나.’
거의 6년 동안 매일 드나들었던 곳이라 어디에 어떤 책이 있는지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물론 새로 들어온 책들도 꽤 많았다.
서지훈 교수는 젊은 만큼 트렌드에 민감한 사람이었다. 신간은 물론 최근에 발표된 연구물들이 보기 좋게 정리되어 있었다.
‘여전히 부지런하시네.’
교수 직함을 달았다면 조금 나태해질 만도 한데, 서지훈 교수는 그렇지 않았다. 민우의 부지런함은 그에게 영향을 받은 게 컸다.
민우가 돌아와 자리에 앉았다.
“그나저나 잘 계셨죠? 죄송해요. 연락도 자주 못 드려서.”
“말도 마라. 일주일 전에 답사 갔다가 술병 나서 아주 죽다 살아났어. 요즘 애들은 왜 그렇게 술을 잘 마시는지 모르겠다니까.”
서지훈 교수가 엄살을 부리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민우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후배들은 어때요?”
“별다를 거 뭐 있겠어? 다들 취업 안 돼서 마음고생 하고 있지.”
“요즘은 어딜 가나 다 힘든가 봐요.”
“이번 연도 우리 과 졸업생 취업률이 30퍼센트를 못 넘었어. 정말 큰 일이다.”
서지훈 교수는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상아대는 대전 시내에서는 유명했지만 전국에서는 그저 그런 지방 대학이었다. 취업이 힘든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편법을 조금 써보긴 했는데 회복하기가 어려워. 이대로라면 정원도 줄 거고.”
최근 대학들은 정부로부터 정원 감축 압박을 받고 있다. 그저 그런 대학이었던 상아대는 그 압박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민우가 처음 입학했을 때는 국문과 입학 정원이 40명이었지만, 지금은 32명으로 줄어 있었다. 내년엔 더 줄어들지도 몰랐다.
“요즘은 국문과도 통폐합을 시키는 분위기던데. 우리 학교는 괜찮아요?”
“후배들한테 못 들었나 보네. 안 그래도 이사회에서 말 나오고 있다. 문창과랑 합친다는 게 중론이야. 것 때문에 골치가 아프다.”
“큰일이네요.”
길게 담배 연기를 내뿜은 서지훈 교수가 쓴웃음을 지었다.
“이런, 내가 너무 멀리 나갔네. 한창 공부하는 제자 앞에서 우울한 얘기만 했군. 어때? 대학원은 다닐 만하냐?”
“생각보다 힘들어요. 공부는 안 힘든 데 외적인 거에 너무 스트레스를 받아서요.”
“그래도 힘내야지.”
남이 들으면 무책임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민우는 그렇지 않았다.
사실 민우는 명인대 대학원에 입학할 생각이 없었다. 처음부터 자대인 상아대 대학원 진학을 목표하고 있었다.
그런데 명인대 진학으로 노선을 바꾼 것은 지도교수인 서지훈 교수 때문이었다.
그는 말했다.
상아대는 우물 안이라고.
우물에서 나가 좀 더 넓은 세상에서 공부할 필요가 있다고.
처음에는 서지훈 교수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명인대에 입학하자 그 뜻을 이해하게 되었다.
‘만약 상아대에서 공부했다면 편한 분위기에 안주했을 거야. 누구 하나 쓴소리 해주는 사람이 없을 테니까.’
아이러니하게도 명인대의 배타적인 분위기가 민우의 공부욕을 더욱 자극한 것이다.
천덕꾸러기. 낙제생. 3류대 출신.
결과론적이긴 해도 이런 별명들이 민우의 열정을 불태웠고, 그를 학문적으로 한층 더 성장하게 만들어 주었다.
무엇보다도 서지훈 교수는 믿고 있었다.
그런 어려운 환경에서도 민우가 잘 견뎌낼 거라고. 모든 것을 이겨내고 훌륭한 학자로 성장할 수 있을 거라고.
“그런데 무슨 일 있었던 거냐? 전에 전화했을 때 목소리 안 좋았잖아.”
“아 그게…… 민 선생님께 연구계획서 보여드렸는데 그대로 이면지통으로 직행했어요.”
“하하하, 그 양반 버릇은 여전하구만.”
서지훈 교수가 시원하게 웃으며 재떨이에 담배를 비볐다. 민우는 왠지 서 교수가 미웠다.
“옛날엔 더 심했다. 나 다닐 때는 재떨이에 맞아서 머리가 찢어진 친구도 있었지. 프로포절 때는 쌍욕 듣기 일쑤였어. 이런 냄새나는 쓰레기를 들고 왔냐는 소리 들으면서. 그래도 지금은 많이 나아지긴 했지.”
옛날엔 더 심했다는 말로 위로가 되지는 않았다.
그래도 민우는 이해했다.
서지훈 교수도 명인대에서 학사, 석사, 박사를 모두 마친 사람이었다. 그곳이 어떤 곳인지 자신보다 더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명문대라고 사람들이 고고하게 보는 경향이 있는데 실제는 그렇지 않지. 사람 사는 곳은 다 똑같거든. 그런데 뭐에 대해서 썼는데? 사본 가지고 있어?”
민우는 가방에서 연구계획서를 꺼냈다. 그것을 받아든 서지훈 교수는 누구와는 다르게 그 자리에서 10페이지를 모두 읽었다.
“이야. 너 많이 성장했구나!”
그 한마디에 민우는 모든 것을 보상받은 느낌이었다. 정말로 듣고 싶었던 말이었다.
“그런데 민 선생님이 안 된다고 했다고?”
“네. 다른 방향으로 생각해 보라고 하시더라고요. 원서 읽기가 벅차지 않겠냐면서. 독해는 자신 있다고 말씀드렸는데 안 통했어요.”
“그럼 어쩔 수 없지. 다른 방법을 생각해 보는 수밖에.”
냉정할 정도로 딱 잘라서 말하는 서지훈 교수. 민우는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서 교수는 그런 민우의 표정을 정확히 읽었다.
“왜, 내가 다른 얘기 해줄 줄 알았어?”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래요.”
“나도 너 듣기 좋은 얘기만 해주고 싶지만 현실이 그렇지가 않아서 말이다. 결과적으로 그게 너한테 도움이 되지도 않을 거고.”
서 교수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연구계획서를 다시 민우에게 돌려주었다.
“이건 네가 잘 가지고 있다가 스스로의 힘으로 뭔가를 할 수 있을 때 진행해 봐. 분명 좋은 논문이 나올 거다.”
“선생님.”
“알아 인마.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민우는 고개를 숙였다. 힘없는 제자의 모습을 보는 서 교수도 마음이 편치는 않았지만, 그는 조금 다르게 생각했다.
성장에는 고통이 필요한 법이라고.
“학위논문에 너무 의미를 두지 마. 민 선생님도 쉽게 가는 방법이 있으니 그렇게 말씀해 주신 거라고 생각 해버려.”
“왜 그래야 합니까?”
약간 항의가 섞였다. 하지만 서 교수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민우를 바라보았다.
“바꿔서 물어보자. 너라면 고작 두 달 정도 본 학생, 그것도 다른 곳에서 공부하다 온 학생의 능력을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 같아?”
“그건…… 어렵죠.”
“민 선생님을 두둔하려고 하는 말은 아니야. 그냥 현실을 얘기해 주고 싶었을 뿐이다. 너는 외지인이고, 약간은 모자라게 보이는 학생이야. 아직까지는.”
아팠다. 서 교수가 너무나도 정확히 현실을 꼬집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아직까지는’이라는 말에 방점을 넣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잠시 생각에 잠기던 민우가 물었다.
“선생님이 만약 대학원 지도교수셨다면 제 연구계획을 승인해 주셨을까요?”
“당연히.”
서지훈 교수가 확신에 찬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단 한 마디뿐이었다.
하지만 민우는 그것만으로도 마음의 짐을 모두 비울 수 있었다.
아직은 모자라지만 내일은 다를 거라고 생각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