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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2. 힐링 캠프 (1) (22/500)


022. 힐링 캠프 (1)
2021.03.22.


“선생님. 박민우입니다.”

“들어와.”

민우가 안으로 들어갔지만 민영환 교수는 모니터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모교의 서지훈 교수와는 너무나 비교되는 태도였다.

서지훈 교수는 학생들이 찾아오면 늘 일어나서 맞았다. 연구실에는 늘 맛있는 커피가 준비되어 있었고,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민우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상념을 떨쳐냈다.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말자. 추억팔이할 때가 아냐. 내가 여기서 인정받으면 그만인 거잖아.’

명인대는 명인대고 상아대는 상아대다.

민우는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학교와 구성원이 다른 만큼 문화도 다른 법이니까.

드디어 민영환 교수가 안경을 벗고 소파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민우가 뽑아 온 캔커피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최 조교한테 얘기는 들었지? 내일모레 학회가 잡혀서 면담을 당겼다.”

“예, 들었습니다.”

“연구계획서는?”

민우는 인쇄한 연구계획서를 공손히 전했지만 민영환 교수는 그것을 읽지도 않고 한쪽으로 치워 버렸다.

“공부는 할 만하고?”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조금 성과가 보이는 것 같기도 합니다.”

“성과? 니가 뭔 성과를 냈는데.”

민우는 할 말을 잃었다. 보통 이런 말을 하면 격려를 해 주는 게 순리가 아닌가?

“자만 떨지 마라. 공부는 끝이 없는 법이니까. 알았어?”

“죄송합니다.”

민영환 교수는 별 관심 없는 표정으로 계속 물었다.

“그런데 요즘 선배들 영문초록 써 주고 있다면서?”

“예. 공부도 할 겸 도와드리고 있습니다.”

“그걸로 공부가 되나? 초록은 말 그대로 가이드라인인데. 본문을 읽어야 도움이 된다는 생각은 해보지 못했나?”

“물론 본문도 읽고 있습니다.”

“……그랬다면 다행이군.”

민영환 교수는 못마땅했다.

자신의 계획대로라면 민우는 지금쯤 도태되어야 정상이었다.

자대생들의 수준을 따라잡지 못하고 스스로 자퇴서를 써야 하는 시나리오로 가야 하는데, 민우는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보란 듯이 학문적 성취를 보여주고 있었다.

수업에서 보여준 민우의 활약은 대단했다. 과제를 완벽히 해낸 것은 물론, 소논문 초안도 제법 그럴싸하게 써 왔다.

‘내가 너무 과소평가하고 있었던 건가?’

그런 생각이 민영환 교수의 머릿속에 떠올랐을 정도였다.

강철훈 교수의 연구실을 제집 드나들 듯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이후로 민 교수는 민우에게 더욱 신경이 쓰였다.

강 교수가 아무나 사람을 점찍는 스타일이 아닌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민영환 교수의 심정은 딱 이랬다.

‘갖고 싶지는 않은데 남 주기는 아깝단 말이야.’

민우가 들으면 서운해할 만한 말이지만, 그래도 낙제생 시절을 생각한다면 장족의 발전이었다.

“기왕 하는 거 실수하지 말고 잘 도와줘라. 괜히 오역하면 선배들만 뒤집어쓰니까 정신 똑바로 차리고. 알았어?”

“명심하겠습니다. 선생님.”

그제야 민영환 교수는 민우가 제출한 연구계획서를 넘겨보기 시작했다.

“50년대 소설?”

“50년대에 발표된 소설을 연구하려고 합니다. 실존주의 문학의 번역과 수용을 테마로 해서요.”

번역과 수용이라는 표현에 민 교수의 손이 뚝 멈췄다.

“수용사를 다루려는 특별한 이유가 있나?”

“특별한 이유는 없고, 공부를 하다 보니 그쪽에 관심이 갔습니다.”

“흐음.”

민영환 교수의 표정이 불편해졌다.

실존주의 문학에 대한 연구까지는 좋다. 하지만 번역과 수용을 다룬다는 것은 엄밀히 따지면 비교문학의 영역이다.

쉽게 말해 민 교수의 전공과는 거리가 있었다.

“혹시 강철훈 선생님의 추천이 있었나?”

“아뇨. 그런 건 없었습니다. 강 선생님과 논문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습니다.”

“의외인데? 도움 좀 받으려고 강아지처럼 매달릴 줄 알았는데 말이야. 껄껄껄.”

민우는 농담이라고 생각하고 애써 웃었다. 민영환 교수는 최민식 선배와는 급이 다르다. 표정 관리를 할 필요가 있었다.

민영환 교수는 거만하게 다리를 꼬며 대꾸했다.

“석사 논문은 욕심을 내지 않는 게 좋아. 실존주의 문학의 수용, 좋지. 하지만 비교문학이라는 분야 자체가 자료를 모으기 힘든 데다가 원서를 읽어야 하는 부담감이 있어. 그러니 쉬운 길을 택하는 게 낫다.”

“원서 독해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러니까 그 시간에 다른 걸 보라는 거지. 원서를 읽는 것보다는 한국어로 된 걸 읽는 게 더 빠르잖아.”

입을 다문 민우가 한참 뒤 조심스레 물었다.

“저 선생님. 이 계획대로는 안 되는 겁니까?”

민 교수는 씩 웃었다. 그는 대답 대신 연구계획서를 테이블 옆 이면지통에 집어넣었다.

“다른 방향으로 검토해 봐.”

기운이 빠졌다. 일주일 동안 들였던 공이 한꺼번에 무너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열심히 썼는데.’

무의미한 말들이 몇 번 더 오가고 면담이 끝났다.

민우는 한참동안 복도에 서서 창밖을 바라보았다. 비흡연자이지만 담배가 절로 생각났다.

‘허무하다.’

일주일이 송두리째 날아갔다.

절로 술 생각이나 핸드폰을 들었다. 전화번호부를 뒤적이며 친한 친구들의 이름을 하나씩 살펴보았다.

하지만 그들에게 전화할 수는 없었다.

오히려 그들은 민우를 부러워했다. 명문대에서 마음 편히 공부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사람들에게 하소연이 통하진 않을 테니까.

‘선생님.’

서지훈 교수의 연락처에서 스크롤이 멈췄다.

오늘따라 자주 생각나는 사람이었다.

누를까 말까.

한참을 고민하던 민우가 결국 엄지로 꾹 눌렀다.

“선생님. 박민우입니다. 오랜만에 연락드립니다. 바쁘세요?”

― 어 그래. 오랜만이다. 근데 너 목소리가 왜 그래? 뭔 일 있었냐?

옆집 형처럼 친근한 목소리에 민우는 마음이 울컥했다.

문득 고향에 돌아온 느낌이 들었다.

* * *

5월이 시작되는 주말, 민우는 연락도 없이 대전 본가에 내려갔다. 손에는 카네이션 꽃바구니가 들려 있었다.

“엄마. 나 왔어요.”

“응?”

마침 집에서 일을 보던 민우의 어머니는 깜짝 놀랐다.

“아니, 연락도 없이 무슨 일이니? 미리 전화 좀 주지! 그럼 맛있는 것 좀 해놨을 텐데.”

“그냥 생각나서 왔어. 모레 어버이날이기도 하고.”

민우는 꽃바구니를 안방 화장대에 놓았다. 아버지의 흑백 사진이 놓여 있는 곳이었다. 칙칙했던 방이 조금은 화사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뭘 이런 걸 다 사 왔니. 서울은 꽃도 비싸다드만. 응?”

“일 시작해서 이제 좀 여유 생겼어.”

“또 무슨 일을?”

“지음사라고, 유명한 출판사가 있는데 교수님 추천으로 거기 연구원으로 들어가게 됐어.”

“세상에! 잘됐구나!”

한 달에 100만 원이긴 하지만 민우에게는 큰돈이었다. 그 돈이면 월세와 용돈을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었으니까.

오는 길에 민우는 누나 민아에게 전화해 사정을 모두 얘기했다. 이제 월세와 용돈은 더 이상 보내주지 않아도 된다고.

민아는 공부 시간을 뺏기는 게 아닌가 걱정되어 잔소리를 쏟아냈지만, 속으로는 동생의 배려에 감동했다.

민우도 오해는 하지 않았다.

그게 누나만의 애정 표현이라는 것을 이제 알만한 나이가 됐으니까.

“점심은 먹었니?”

“터미널에서 먹었어. 어? 엄마. 손이 왜 그래?”

어머니는 붕대를 매고 있었다. 깁스는 아니고, 뭔가 조악하게 대충 감아놓은 것 같은 느낌이다.

“그게…… 어제 물 끓이다가 좀 데었다.”

“데었다고? 병원은?”

“괜찮아. 약 발랐으니 나을 거야.”

민우는 믿지 않았다. 괜찮지 않은데 늘 괜찮다고 말하는 것은 어머니의 입버릇이었다.

“어디 좀 봐요.”

민우는 억지로 붕대를 풀어 상처를 살폈다. 새빨갛게 부은 것이, 단순히 자연치유로 끝날 만한 화상이 아니었다.

“안 돼 이거. 병원 가자.”

“괜찮대도.”

민우는 억지로 어머니를 끌고 동네 병원을 찾았다. 다행히 상처는 깊지 않았고, 며칠 간격으로 드레싱을 받으면 낫는다고 했다.

집으로 돌아온 민우는 어머니를 앉히고 안마를 시작했다.

“어휴, 근육 좀 굳은 거 봐. 일 좀 쉬엄쉬엄해. 이러다 몸 축나.”

“엄마는 괜찮아.”

“괜찮긴 뭐가 괜찮아. 아무튼, 내가 빨리 성공해서 엄마 편하게 해 줄게. 이 반지하 집에서 탈출도 하고!”

민우의 꿈은 소박했다.

정원이 딸린 단독주택에서 가족이 모두 모여 행복하게 사는 것.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민우는 꼭 그 꿈을 이루고 말겠다고 생각했다.

어머니는 등에 걸친 민우의 손을 어루만졌다. 굳은살이 가득 박여 투박한 손길.

“엄마는 신경 쓰지 마. 너희들끼리 잘살면 돼. 너희들 다 잘 키웠으니까 엄마는 이제 여한이 없어.”

“뭘 여한이 없어? 손자도 보고 손자며느리도 봐야지.”

“그럴 날이 올까? 여자친구는 있니?”

“조금만 기다려요. 참한 색시 데려올 테니까.”

子欲養而親不待.

자식이 효도하려 하나 부모는 기다려 주지 않는다.

민우는 늘 이 말을 마음에 새겼다.

“엄마. 나 잠깐 학교에 좀 다녀올게. 지도교수님 뵙기로 해서.”

“그래? 저녁은 들어와서 먹을 거지?”

“어떻게 될지 모르겠어. 이따 전화할게요.”

민우는 가방을 메고 버스에 올랐다. 상아대는 대전 시내에 있었기 때문에 한참을 버스에서 보내야 했다.

꽃이 한창인 봄길을 지나가며 민우는 옛날 생각에 잠겼다.

― 이번 정류장은 상아대앞. 상아대앞입니다. 다음 정류장은…….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눈을 뜬 민우는 벨을 누르고 버스에서 내렸다. 버스가 지나가니 상아대학교 정문과 건물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못 본 사이에 건물이 하나 올라가 있었지만, 전체적으로는 옛날의 고즈넉한 분위기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학생들이 정문을 오가며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민우도 그 무리에 휩쓸려 정문 안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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