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1. 지음사 출판그룹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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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1. 지음사 출판그룹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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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1. 지음사 출판그룹 (3)
2021.03.19.
‘대학원 안 오고 바로 취업을 했다면 나도 비슷한 일을 하고 있었겠지?’
책이 좋아 출판인을 꿈꿨던 시절도 있었다. 그래서 그럴까. 장철호에게 은근한 친근감이 느껴졌다. 전공이 뭐냐고 묻고 싶어졌다.
“이쪽으로 들어오시죠.”
“네.”
장철호가 ID카드를 태그해 자동문을 열었다. 민우는 안으로 따라 들어갔다.
인문사회팀은 얼추 봐도 스무 명이 넘는, 꽤 큰 팀이었다.
사무실이 굉장히 크리에이티브한 느낌이다.
한쪽 구석에는 포켓볼이 세팅되어 있었고, 알록달록한 소파와 커피 머신이 자리하고 있었다. 업무 공간보다 휴식을 위한 공간이 훨씬 많았다.
자리를 지키고 일을 하는 직원들도 있었지만, 손에 음료를 쥐고 동료들과 대화를 나누거나 책을 읽는 직원들도 있었다.
자유로운 분위기에 민우는 감탄했다.
“이런 사무실은 처음 봐요. 신기하네요.”
“어떤 부분이 말씀입니까?”
“뭔가 직장이라기보다는 휴식 공간 같다고 해야 할까요. 복지가 굉장히 잘 되어 있는 거 같아요.”
장철호는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그의 얼굴에 자부심이 서렸다.
“그게 우리 인문사회팀의 자랑입니다. 여유 속에서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는 걸 중요하게 여기고 있죠.”
“그렇군요.”
복도를 걸으며 민우가 조용히 물었다.
“그런데 인문사회팀은 뭐 하는 곳입니까?”
“쉽게 말해 인문사회학 관련 서적을 개발하는 곳입니다. 인문학 관련 사업도 추진하고 있지요.”
“인문학 관련 사업이요?”
최근 민우는 동료들과 함께 인문학 장려 방안 공모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지음사에서 관련 사업을 추진한다고 하니 귀가 솔깃해졌다.
장철호는 친절한 직원이었다. 그는 답변에 적극적으로 임했다.
“아무래도 인문학하면 막연한 느낌이 있잖습니까. 약간 어렵게 느껴지기도 하고.”
“그렇죠.”
“그래서 강사를 섭외해서 대중에게 인문학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찾아가는 인문학 강좌’라는 제목으로요.”
“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말이 나와서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나중에 박 선생님께서도 시간을 좀 내주셨으면 좋겠네요.”
민우가 안내된 곳은 응접실이었다. 마실 것을 준비하러 나간 장철호가 들어오더니 난색을 표했다.
“박 선생님. 지금 팀장님이 긴급 미팅 중이십니다. 죄송한데 조금만 기다려 주실 수 있을까요?”
지나칠 정도로 공손해 민우는 좀 부담이 됐다.
“괜찮습니다. 저는 신경 쓰지 마시고 일 보셔도 돼요.”
“정말 죄송합니다.”
“아뇨. 정말 괜찮아요.”
장철호가 나가자 민우는 핸드폰을 꺼냈다. 역시나 수빈과 진섭에게 톡이 잔뜩 와 있었다.
― 지금 지음사 인문사회팀장하고 미팅 대기 중.
이수빈: 왜 갔냐니까!!!!!
한진섭: 와우. 빈이 이제 막 반말하네. 진즉에 말 놓으라니까.
이수빈: 오빤 쫌 ―_―
한진섭: ㅈㅅ
― 강 선생님 추천으로 이쪽 연구원으로 일하게 됨. 아직 결정한 건 아님.
거기까지 쓴 민우는 잽싸게 휴대폰을 집어넣었다. 문이 열리고 윤정민 팀장이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오래 기다렸지요? 미안합니다. 아, 이거 참. 갑자기 전무님이 내려오시는 바람에. 반갑습니다. 악수나 한번 하죠.”
“잘 부탁드립니다. 박민우입니다.”
나이스 중년이란 단어가 절로 떠오르는 외모다. 호방하면서도 날카로운, 팀장에 어울리는 그런 정석적인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초면에 실례가 될지 모르겠지만 이거 정말 기대가 큽니다.”
“아닙니다. 전 아직 석사 1학기라서.”
“아뇨.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실은 말인데요. 강 교수님께서 사람을 추천해 주신 게 거의 2년 만입니다. 2년.”
“2년 만이라고요?”
민우는 묵직한 부담감을 느꼈다. 으레 교수들이 그렇듯 여러 학생을 추천할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닌 모양이다.
“혹시 2년 전에 추천받은 학생이 정연주였나요? 불문학 전공하는.”
“아, 맞아요. 생긴 것과는 달리 무척 고집이 셌던 학생으로 기억합니다. 보기 좋게 거절당했죠. 지금은 석사과정 밟고 있겠네요.”
고집이 셌었나?
민우는 고개를 갸웃했다. 같이 작업을 하면서 딱히 고집이 세다는 느낌은 받지 못했다.
“아무튼, 박민우 선생님이라고 하셨죠. 실례지만 전공이?”
“국문학입니다. 세부 전공은 현대소설이고요.”
“현대소설…… 음, 좋습니다. 좋아요. 그런데 강 교수님께 듣기로 외국어 능력도 출중하다고 들었는데 어떤 언어에 능하십니까?”
세상에 있는 모든 언어를 다 해독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자신 있게 대답하고 싶었지만, 현실성 없는 얘기로 윤정민 팀장을 혼란에 빠트릴 생각은 없었다.
“영어, 독일어, 일어, 중국어, 프랑스어 정도를 합니다. 회화는 아직 어렵고 원서는 읽는 수준입니다.”
윤정민 팀장이 입을 떡 벌렸다.
“아니, 잠깐. 잠깐만요. 6개 국어를 하신다는 말씀입니까?”
“그 정도는 아니고요. 그냥 자연스럽게 읽는 정도로요.”
윤정민의 눈빛이 완전히 달라졌다.
이거 물건이다.
민우를 보는 시선이 딱 그것이었다.
* * *
인문관 307호에는 아무도 없었다. 시계를 보니 오전 8시 40분. 너무 일찍 온 탓이다.
‘아우, 어제 너무 달렸나?’
윤 팀장은 술고래였다.
미팅을 끝내고 횟집에서 저녁을 먹었는데, 거기서만 소주를 네 병이나 깠다.
거기까지는 좋았다. 민우도 술이라면 지지 않으니까.
그런데 2차가 문제였다.
강남 고급 바에 자리를 잡고 18년산 맥캘란 두 병을 나눠 마셨다. 새벽 네 시쯤 나온 거 같은데 어떻게 집에 들어왔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얼떨결에 접대 문화를 제대로 배우고 온 민우였다.
그러다 보니 예전에 수빈이가 끓여 준 콩나물김칫국이 떠올랐다. 지금 먹으면 딱 좋을 것 같은데.
‘그나저나 어떻게 한다?’
민우는 가방에서 서류뭉치를 꺼냈다. 어제 윤정민 팀장이 검토해 보라고 한 근로계약서였다.
‘조건은 나쁘지 않은데…….’
1년 계약에 월 100만 원. 재택근무 가능. 거기에 도서 구입비 지원.
하는 일은 간단했다. 지음사 부설 인문사회연구소에서 인문사회학 관련 연구를 수행하게 된다.
BK21 석사 연구생이 월 50만 원을 받는 것을 비교해 본다면 분명 파격적인 조건이긴 했다.
특히 민우의 이목을 끈 것은 도서 구입비 지원 항목이었다.
연 200만 원 한도 내에서 필요한 도서를 모두 구입할 수 있다고 하니 귀가 솔깃해질 만했다. 인문대 대학원생이 밥값보다 책값을 많이 쓴다는 건 우스갯소리가 아니다.
‘어떻게 하지?’
민우는 고민했다.
고민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공부만 해도 시간이 부족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영문초록 일을 시작으로 선배들이 사적으로 뭔가를 부탁하는 빈도가 늘었다. 반가운 일이었지만, 그만큼 시간을 할애해야 했다.
게다가 개인적인 공부도 해야 했다. 독일어를 마스터하는 것은 물론, 각국의 서적을 탐독하며 외국어 능력을 길러야 할 때였다.
몸은 하나다. 일만 이것저것 늘리다가는 어느 것도 제대로 해내지 못할까 걱정이 들었던 것이다.
그때 307호의 문이 열렸다.
“얼굴이 왜 그 모양이야? 술 마셨어?”
“어.”
진섭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도 어제 술을 마셨는지 삭은 얼굴에서 얼근한 숙취를 느낄 수 있었다.
“나도 오랜만에 친구들 좀 만나서 달렸더니 속이 쓰리네. 점심에 중국집 가면 되겠다. 짬뽕 콜?”
“수빈이 잘 꼬셔 봐. 걔 기름진 거 별로 안 좋아하잖아.”
“오빠들이 가자고 하면 가야지 어딜 감히! 근데 어제 미팅은 어땠냐?”
“결과적으로는 나쁘지 않았지.”
“일하기로 한 거?”
“고민 중이야. 일은 많은데 몸뚱이는 한 개뿐이라. 뭔가 공부에 방해가 될 것 같은 기분이고. 그래서 말인데 너라면 어떨 거 같아?”
진섭은 조금도 고민하지 않고 답했다.
“당연히 해야지.”
“이유는?”
“니가 일을 시작해야 우리가 월급날마다 얻어먹을 거 아냐.”
민우는 피식 웃었다.
“넌 어쩜 사람이 그렇게 한결같냐?”
“것보다 일 시작하면 좀 부담감이 주니까 좋지 않나? 너 월세 얻어 쓴다고 누나한테 매번 미안해했잖아.”
그렇게 말해놓고 진섭은 아차 싶었다. 민우의 입장에서는 민감한 문제일 수도 있으니까.
“아, 미안. 그런 의도로 한 말은 아니고…….”
“아니.”
진섭의 말에 민우는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거기까지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마치 버릇처럼, 지금까지 누나에게 도움을 받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너무 이기적으로 생각했어. 누나도 이제 편입하고 시집까지 가려면 돈을 모아야 하는데…….’
그런 생각을 하니 민우의 마음이 계약서 서명 쪽으로 급격히 기울었다.
결국.
‘하는 게 좋겠다.’
결심은 빨랐다.
민우는 바로 윤 팀장에게 계약하겠다고 문자를 넣었고, 서명한 계약서를 들고 지음사로 찾아가기로 했다.
드르르르.
그때 전화가 한 통 걸려왔다. 번호를 보니 국문과 조교실이었다.
민영환 교수와 이틀 후에 석사 논문 계획에 대해 면담을 하기로 했는데, 그걸 오늘 오전으로 옮길 수 있냐고 묻는 전화였다.
마침 시간이 비어있었다. 민우는 바로 가겠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연구계획서 미리 써놓길 잘했네. 큰일 날 뻔했다. 역시 사람은 부지런해야 돼.’
복사실에서 연구계획서를 출력한 민우는 바로 민영환 교수를 찾아갔다.
10장짜리 연구계획서를 쓰는 데 꼬박 일주일이 걸렸다. 논문 개요는 물론 참고문헌까지 모두 기입해야 되기 때문에 시간이 오래 걸렸다.
보통은 입시 때 제출하는 연구계획서를 수정·보완하는 게 일반적이지만 민우는 아예 처음부터 새롭게 썼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성장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다른 일은 하나도 못 했지. 제발 민 선생님이 잘 봐주셔야 할 텐데.’
빈손으로 가기 뭐해서 자판기에서 커피를 하나 뽑아 들었다. 그때 옆에서 누군가가 알은 척을 했다. 이재환 선배였다.
“어디 가냐?”
“민 선생님께 석사 논문계획서 보여드리러 가는 길입니다.”
“이야, 큰일이네. 들어가기 전에 마음 단단히 먹어. 연구계획서가 얼굴로 날아오지 않으면 선방한 거라고 생각해라.”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은 이재환은 민우의 어깨를 다독이고는 갈 길을 갔다.
‘설마 그러시기야 하겠어?’
그렇게 생각하며 민우는 민영환 교수 연구실 문을 두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