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20. 지음사 출판그룹 (2) (20/500)


020. 지음사 출판그룹 (2)
2021.03.18.


“아직 안 가고 있었어?”

연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게 다였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은데 머뭇거리고 있었다.

“시간 괜찮으시면…… 커피라도 한잔해요.”

“커피?”

민우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연주는 지극히 내성적인 사람이었다. 가끔 보면 답답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수동적이다.

그랬던 그녀가 지금 자신에게 먼저 커피를 마시자고 제안을 한 것이다. 놀랄 수밖에 없었다.

“어, 그래. 잠깐만.”

민우는 시계를 확인했다. 약속 시간까지는 아직 여유가 좀 있었다. 커피 한 잔 정도는 충분히 마실 수 있었다.

“저녁에 약속이 있어서 오래 있진 못해. 일단 가자.”

두 사람은 인문관 지하에 있는 카페로 내려갔다. 오늘따라 유달리 사람이 없어서 조용히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근데 왜 기다리고 있었어?”

“아, 저, 그게…….”

연주는 시선을 슬쩍 피했다. 뭔가 말하기 곤란한 게 있는 모양이다. 민우는 그 이유를 나름대로 유추해 보았다.

“내가 따로 남은 것 때문에 신경 쓰여서 그러나 본데. 나 강 선생님한테 혼난 거 아니야. 오히려 좋은 제안을 받았어. 지음사에서 연구원으로 일할 기회가 생길지도 모르겠다.”

“지음사에서요? 잘됐네요…….”

“미안해. 얘기 안 하려고 했는데 나만 뭔가 이득을 챙긴 것 같아서 마음이 불편했어.”

“아녜요. 말씀해 주셔서 오히려 고마워요. 지음사 쪽 제안은…… 예전에 저도 받은 적이 있어요. 거절했지만요.”

“그랬어?”

연주는 진심으로 기뻐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그게 다였다. 이상하게 오늘은 그녀와 대화를 쉽게 이어나갈 수가 없었다.

말없이 가만히 있는 것조차 불편했다. 다른 때였다면 서로 신경 쓰지 않고 편안히 있었을 텐데.

“이상하네, 오늘. 혹시 내가 뭐 너한테 실수라도 한 거 있어?”

“아뇨. 그게 아니라.”

“그럼?”

민우는 고개를 갸웃했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그녀를 다시 바라보았지만, 여전히 생각을 읽을 수가 없었다.

연주는 가만히 테이크아웃 컵만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누가 봐도 분명 뭔 일이 있다.

하지만 민우는 거기까지 캐물을 수가 없었다. 수빈이라면 모를까, 연주와는 아직 그렇게 사이가 가깝지 않았으니까.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민우는 시계를 확인하고는 자리를 정리했다.

“슬슬 일어날까?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저녁은 다음에 같이 먹자.”

“저기, 오빠.”

“응?”

“오빠는 왜 공부를 하게 되셨어요?”

가방을 챙기고 일어서려던 민우가 다시 자리에 앉았다.

왜 공부를 하게 됐냐니?

다소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하지만 연주의 표정이 너무나도 진지해서, 쉽게 생각할 수가 없었다.

“꽤 시시한 이유인데 솔직하게 말해도 돼?”

연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민우는 팔짱을 끼며 과거로 돌아갔다. 대학원 입학을 결심했던 그 순간으로.

“학부 2학년 때였나. 지도교수님 연구실에 놀러 갔었던 적이 있었는데 그때 우연히 루카치의 <소설의 이론>을 읽게 됐어. 내용은 잘 이해를 못 했지만, 뭔가에 홀린 기분이었지.”

<소설의 이론>은 학부생이 읽기 좀 난해한 책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책이 주는 특유의 분위기는 잊을 수가 없었다.

민우가 이어 말했다.

“왜 그 유명한 서두 있잖아.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그리고 별빛이 그 길을 훤히 밝혀 주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이런 시대에 있어서 모든 것은 새로우면서도 친숙하며, 또 모험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도 결국은 자신의 소유로 되는 것이다.”

연주가 다음 구절을 막힘없이 읽었다.

민우는 깜짝 놀랐다. 관심을 가지고 읽지 않으면 기억하기 어려운 구절이었으니까.

“대단한데? 그걸 외우고 있었네.”

“실은 저도 그 부분 감동적으로 읽었어요. 좋아하는 구절이기도 하고.”

왠지 마음이 통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전공은 다르지만 같은 길을 걸어간다는 것이 바로 이런 느낌일까?

“나도 그런 책을 쓰고 싶어서 대학원 진학을 결심했지. 돌이켜보면 좀 답이 없는 선택이긴 해. 딱히 뭐가 되고 싶다기보다는 공부가 하고 싶었거든.”

멍하니 민우를 바라보던 연주가 갑자기 풋 하고 웃었다.

“정말 별거 아닌 일로 대학원에 오신 거네요.”

“얘기했잖아. 시시한 이유라고.”

“혹시…… 후회는 한 적 없으세요?”

“후회?”

연주와 눈이 마주쳤다.

진지한 눈빛.

아무래도 그녀가 진짜 묻고 싶었던 것은 바로 이것일지도 모른다는 직감이 들었다.

민우는 답을 꺼내기 전에 생각했다.

‘왜 이런 질문을 하는 거지?’

순간 많은 추측들이 머릿속에 전개되었다. 혹시 연주는 대학원 진학을 후회하고 있는 걸까? 아니면 집안의 반대?

‘정보가 너무 없다.’

연주가 처한 상황을 알 수가 없으니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갈피가 서지 않았다. 때문에 민우는 정공법을 택했다.

“후회. 그런 거 없어. 한 번도 한 적 없고, 앞으로도 할 일 없을 거야.”

“어떻게 하면 그렇게 장담할 수 있어요?”

“확신이 있으면 할 수 있지.”

연주는 확신이라는 단어를 곱씹어 보았다. 쉽게 소화가 되지 않았다.

“내가 명인대에 들어올 수 있었던 것도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어. 나는 할 수 있다. 할 수 없을 리가 없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준비를 했거든.”

연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보다는 표정이 많이 밝아져 있었다.

“이제 궁금증은 좀 풀렸어?”

“예, 조금요.”

민우를 뚫어져라 바라보던 연주. 눈을 깜빡이는 것조차 잊은 걸까. 말없이 민우만을 응시하고 있다. 고요한 시간이 흘렀다.

“오빠는 참…… 이상한 사람 같아요.”

“이상한 사람?”

“이런 사람이 세상에 또 있을까 싶은…….”

좋은 의미인지 나쁜 의미인지 확 와닿지 않았다.

판단이 서기도 전에 연주가 가방을 들고 일어섰다. 곧 그녀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바쁘신데 시간 내주셔서 고마웠어요. 저, 먼저 가 볼게요. 약속…… 있으셨죠?”

“어. 그래.”

뭔가 갑작스러웠지만, 일단 두 사람은 헤어졌다. 민우는 멍하니 카페에 앉아 있다가 인문관 1층으로 올라왔다.

연주의 애잔한 표정이 마음에 남았다. 마치 이별을 준비하는 그런 모습이었다.

‘윤 팀장님하고 약속만 없었으면 술이라도 한잔 사줬을 텐데.’

카페에서 있었던 연주와의 대화를 복기해 보았지만 마땅한 답을 얻지는 못했다. 그렇게 민우는 인문관을 나섰다.

* * *

지음사는 서울 강남에 자리해 있었다. 민우는 핸드폰으로 지도를 검색해 동선을 확인했다.

‘지금 출발하면 아슬아슬하게 도착하겠네. 좀 서둘러야겠다.’

버스에 몸을 싣고 명인대입구역에서 내려 지하철로 환승했다. 그리고 약 30여 분을 더 가니 강남역에 도착했다.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

수빈에게 온 톡이었다.

이수빈: 오빠~ 저녁저녁! 지금 우리 도서관 앞. 5분 내로 톡 확인 안 하면 올라가서 때려줄 거예요^^

― 저녁은 패스. 나 지음사에 왔어.

이수빈: 엥? 지음사에는 무슨 일로???

― 나중에 얘기해 줄게. 사연이 길다.

민우는 지음사 사옥 앞에 서서 고개를 들었다. 자연스레 전경이 눈에 들어왔다.

국내 최대 규모의 출판사답게 화려했다. 벽면이 글라스로 되어 있어 고급스러우면서도 현대적인 외관을 자랑했다.

하지만 민우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파주가 아니라 강남에 있어서 다행이네. 왔다 갔다 하기는 편하겠다.’

민우는 로비로 들어갔다.

1층에는 문화시설이 들어서 있었다. 지음사에서 출간한 책은 물론, 캐릭터 상품 등 2차 저작물까지 전시 및 판매되고 있었다.

‘아직 좀 여유가 있지?’

약간 시간이 남아 민우는 상점에 들어가 상품을 구경했다.

눈에 끄는 책갈피가 있어 세 개 구매했다. 하나는 자신의 몫, 나머지는 수빈과 진섭의 몫이었다.

특히 민우의 눈길을 사로잡았던 것은 북카페였다. 50여 평 규모의 카페에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런데도 조용했다. 커피를 마시며 조용히 책을 읽기에 매우 적합한 곳 같았다.

‘다음에 섭이랑 수빈이 데려오면 좋아하겠네. 그런데 사무실 입구는 어디야?’

민우는 안내판을 찾다가 포기하고, 결국 지나가던 사람에게 길을 물었다. 직원용 출입구는 구석에 위치해 있었다.

‘이런. 막혀 있네.’

과연 출판그룹이라는 타이틀이 붙을 만했다. 보안 장치가 되어 있어 아무나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던 것. 출판사라기보다는 대기업이라는 느낌이 강했다.

“실례합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건장한 보안실 남자 직원이 다가왔다. 민우는 방문 목적을 밝혔다.

“이쪽으로 오시죠.”

민우는 보안 데스크로 안내를 받았다. 거기엔 여직원 두 명이 업무를 보고 있었다.

“오늘 인문사회팀 윤정민 팀장님 만나 뵙기로 했는데요. 명인대에서 온 박민우입니다.”

“안녕하십니까. 박민우 씨라고 하셨죠?”

“네.”

여직원이 컴퓨터를 조작해 스케줄을 확인했다. 여직원이 살짝 놀랐다. 윤 팀장이 직접 남긴 메모에 VIP라고 적혀 있었던 것.

곧 그녀는 옆에 있던 상사에게 뭔가를 얘기하더니 데스크 앞으로 걸어 나왔다.

“박 선생님. 이쪽으로 오십시오.”

호칭이 선생님으로 바뀌었다. 민우는 살짝 당황했다.

“아, 그냥 입구만 열어주셔도 되는데.”

“아닙니다.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얼떨결에 민우는 여직원을 따라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여직원은 14층을 누르더니, 민우를 보며 싱긋 웃었다.

‘강 선생님 파워가 장난이 아닌가 보다. 대우가 다르네.’

14층에서 내리자 미리 나와 있던 젊은 남자 직원이 민우를 맞았다. 민우의 또래 정도로 보였는데, 짧은 머리를 세워 깔끔한 인상이었다.

“반갑습니다. 저는 인문사회팀 장철호입니다.”

“안녕하세요. 박민우입니다.”

두 사람은 가볍게 악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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