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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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9. 지음사 출판그룹 (1)
2021.03.15.


점심 식사를 마친 민우는 일행과 헤어지고 중앙도서관 정보열람실에 자리를 잡았다.

‘민식 선배 박사 논문 테마가 이청준 소설이었지?’

민우는 RISS에 접속해 최민식의 연구 기록을 훑었다. 석사 논문은 최인훈에 대해 썼지만, 이후의 연구는 모두 이청준에 대한 논문이었다.

‘이청준은 꽤 많이 연구가 된 작가일 텐데.’

민우는 학위 논문 검색 탭에 ‘이청준’을 입력했다. 결괏값을 보고는 입을 딱 벌렸다.

‘학위 논문만 326건이네. 하…… 이건 답이 없다. 요약은 불가능하겠어.’

민우는 턱을 괴며 고민했다.

보통 박사 논문을 쓰면 후배 두어 명이 달라붙어 자료를 찾아주는 등의 잔심부름을 한다. 혼자서는 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데 민식 선배는 혼자 논문을 준비하고 있지.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만약 그 짐을 조금이라도 덜어 준다면 그와 관계가 개선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민우는 민식에게 증명하고 싶었다.

중요한 건 학벌이 아니라 실력이라고. 3류대 출신도 할 수 있다는 것을 학문적인 방법으로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 외의 방법으로 그에게 인정을 받는 것은 불가능했다.

‘요약이 불가능하면 결국 연구방법론 쪽을 건드려 볼 수밖에 없다는 얘긴데.’

그렇다면 일이 좀 어려워졌다.

연구방법론.

연구의 절차와 방법에 대해 논하는 부분이다. 논문에 사용된 이론을 설명하는 부분이라 쉽게 접근하기가 어렵다.

게다가 민우는 이제 석사 1학기다.

아무리 공부를 열심히 해왔다고 해도 박사 논문에 쓰이는 이론을 소화할 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그래도 민우는 포기하지 않았다.

‘찾아보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거야. 분명히.’

민우는 얼마 전에 있었던 논문 프로포절을 떠올려 보았다. 당시 최민식은 교수들에게 집중적으로 공격을 당했었다.

‘잘 기억이 안 나네. 선배의 페이퍼가 어떤 거였는지. 핵심 이론이 뭐였지?’

민우는 집에 돌아가서 페이퍼를 찾아 읽기로 하고 일단 자리를 떴다. 그가 향한 곳은 강철훈 교수의 연구실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번역 프로젝트 2차 회합이 열리는 날이다. 주말 내내 번역물 검토를 마친 강철훈 교수가 코멘트를 하는 자리였다.

다들 완성도 있게 작업을 끝내 강 교수는 매우 만족해했다. 특히 그는 민우와 연주의 작업물을 극찬했다.

“아주 잘했어. 용어의 정의도 비교적 정확했고. 문장도 자연스러웠네. 내가 손을 댈 만한 부분은 보이지 않더군. 남은 부분도 지금처럼 열심히 해 주길 바라네.”

“감사합니다. 선생님.”

민우는 기분 좋게 웃었지만 연주는 표정이 별로 밝아 보이지 않았다. 뭔가 생각이 많아 보였다.

‘뭐 안 좋은 일이라도 있나?’

민우가 의아해할 무렵, 강철훈 교수가 민우에게 물었다.

“조금 까다로운 부분이라고 생각했는데, 작업 중에 특이사항은 없었나?”

“바르트의 개념어가 자주 쓰였는데 연주 덕에 한숨 돌렸습니다. 연주가 아니었다면 매끄럽게 번역하기 어려웠을 겁니다. 역시 전공자는 다르더라고요.”

“예? 아뇨, 그게…….”

연주는 살짝 놀랐다.

사실 이번 번역 과정에서 가장 크게 기여한 사람은 민우였다. 그런데 그는 본인을 내세우기보다 자신을 추켜세웠다.

스물세 살.

경험이 많지 않은 어린 그녀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이었다.

‘민우 오빠…….’

연주는 지금까지 몇몇 사람들과 팀을 짜서 일을 해봤지만 대개 자신의 실력을 내세우기에 바빴다.

잘난 척을 하는 사람도 있었고 은연중 깔보는 사람도 있었다. 심지어 여자라고 무시하는 사람들까지 있었다.

하지만 민우는 그들과 근본적으로 다른 게 하나 있었다.

욕심을 초월한 자세.

진짜 학문을 하는 사람의 모습이 이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민우의 모습을 담은 눈동자가 더욱 깊어졌다.

‘오빠랑 좀 더 같이 공부할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하지만 난…….’

연주는 씁쓸히 웃으며 미련을 버렸다. 세상엔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일이 너무나 많다고 생각하면서.

이윽고 강철훈 교수가 마무리했다.

“마지막 모임은 보름 뒤에 여는 걸로 하고 오늘 회합은 여기에서 마무리하지.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찾아오도록 하고. 다들 수고 많았네.”

“고생하셨습니다. 선생님.”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나 연구실을 빠져나갔다. 하지만 민우는 나가지 못했다. 강 교수가 그를 따로 부른 것이다.

민우는 긴장했다.

‘무슨 일이시지?’

하지만 살짝 기대감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실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뭔가 새로운 기회가 주어지는 게 순리일 터.

그러는 사이 강 교수는 직접 녹차를 준비해 민우 앞에 내려놓았다.

“감사히 마시겠습니다. 선생님.”

“긴장하지 말게. 궁금한 게 몇 가지 있어서 확인하려는 것일 뿐이니.”

“가벼운 긴장은 건강에 좋다고 들었습니다.”

“하하하. 자네 이제 농담을 할 정도로 적응을 했나 보구만. 응?”

강철훈 교수는 잘 웃지 않는 성미였다. 그런데도 민우 앞에서는 웃음을 감추지 않았다.

느낌이 좋다.

찻물을 한 모금 들이켠 강 교수가 입을 열었다.

“이제 우리 프로젝트도 마무리 단계야. 소감이 어떤가?”

“정말 좋은 기회였다고 생각합니다. 분야가 조금 다르긴 해도 지식을 쌓는 데 도움이 많이 되었습니다. 이런 기회가 있다면 또 참가하고 싶습니다.”

민우는 마지막 말을 강조했다.

강철훈 교수와의 인맥을 만들어 두는 것도 그의 입장에서는 결코 나쁜 일이 아니었으니까.

무엇보다도 학식도 쌓고 돈도 벌 수 있는 일석이조의 기회였다.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강철훈 교수는 흡족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래. 자네와 가능하면 오래도록 함께하고 싶군.”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강철훈 교수가 찻잔을 내려놓았다. 다리를 꼬고 깍지를 낀 손을 무릎에 올렸다.

“사실 저번 주에 작업물 메일을 받았을 때 말이야. 연주 양에게 이런 얘기를 들었어.”

연주가 메일을?

민우는 긴장했다. 순간 온갖 생각들이 민우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혹시나 실수하지 않았나 하는 것들이.

“이번 작업물은 온전히 자네의 작품이다. 자기는 몇 가지 용어만 정의한 것이 전부다…… 그런데 오히려 자네는 아까 연주 양을 추켜세우더군. 이유를 좀 물어도 되겠나?”

“별다른 건 없습니다. 그게 사실이니까요.”

강 교수가 흥미로운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긴장을 푼 민우가 편하게 대답했다.

“오히려 제가 배운 게 많았습니다. 배경 지식 부분에서는 연주를 따라갈 수 없었어요. 전공이 다르긴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제 공부가 부족한 탓이죠. 정석적인 번역으로 문장을 매끄럽게 하는 것이 제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습니다. 사실 그건 테크닉이지 번역의 본질은 아니잖습니까.”

“지나치게 솔직한데?”

“선생님. 학문은 모름지기 무지를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고 배웠습니다.”

강철훈 교수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 무릎을 '탁' 쳤다. 자신의 제자들에게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 이렇게 돌아올 줄은 몰랐다.

‘서지훈 선생이 제자 하난 잘 키웠어!’

강철훈 교수는 감탄했다.

시대가 바뀌면서 개인적인 성향의 학생들이 많이 늘었다.

전체를 위한 학문이 아니라, 개인적인 영달의 도구로 삼는 사람들이 많아진 것.

그런 와중에 민우의 존재는 돋보였다. 그는 자신에게 무엇이 부족한지 알았고, 그것을 채우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아직 세공되지 않았지만, 원석으로서의 가치는 충분해 보였다.

‘한번 키워볼까?’

강철훈 교수는 얼마 전 서지훈 교수와 통화했던 내용을 떠올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짧은 시간 강 교수는 민우라는 원석을 어떻게 세공할까를 고민했고, 곧 결론이 나왔다.

“민우 군. 이번 프로젝트가 끝나면 뭘 할 생각이지?”

“최근 독일어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원서를 자연스럽게 읽는 것이 목표인데요. 가능하면 관련 분야의 논문도 써 보고 싶고요.”

강철훈 교수가 턱을 쓸어 만졌다.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한 태도다.

“쉽지 않은 길을 가려고 하는군. 확실히 영미 문학이나 프랑스 문학에 비해 독일 문학의 국내 수용사는 제대로 다뤄지지 못하고 있지.”

“맞습니다. 아쉬운 부분이기도 하고요.”

“자네가 열심히 공부한다면 그 분야의 선두주자가 될 수 있겠어.”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테스트가 모두 끝났다. 흡족한 미소를 지은 강철훈 교수는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이걸 받게.”

강철훈 교수의 명함이었다. 민우는 이 명함의 용도를 도통 알 수 없었다.

“지음사, 알고 있지?”

“우리나라 최고의 출판그룹 아닙니까?”

“내 명함을 들고 거기 윤정민 팀장을 찾아가 보게. 석사급 연구원을 구하고 있는데 자네가 적임일 듯싶어.”

“예?”

민우는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기회를 준 것은 기쁜 일이다.

하지만 프로젝트에 참여한 지 채 한 달도 지나지 않았는데 이런 식으로 추천을 받아도 되는 것인지 의문이 들었던 것이다.

‘수년간 같이 일한 학생들도 많을 텐데. 왜 하필 나를?’

강철훈 교수는 마치 민우의 속마음을 꿰뚫어 보고 있는 듯 말을 이었다.

“나는 자네의 실력을 보고 기회를 주려는 게 아니야. 가능성을 보고 기회를 주려는 거지. 일종의 투자라고 할까?”

“선생님…….”

“부담 갖지 말고 찾아가 봐. 내가 이야기는 잘 해두지.”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참, 오늘 윤정민 팀장이 한가하다고 했었던가? 자네, 오늘 저녁에 약속이 있나?”

있어도 취소해야 할 판국이다. 민우는 허리를 꼿꼿이 펴고 대답했다.

“아뇨! 없습니다.”

“그래. 그럼 지금 바로 전화를 넣어 볼까. 잠시만 기다리게. 윤 팀장 번호가…… 여깄군. 어, 그래. 윤 팀장. 날세.”

조금 갑작스럽긴 했지만 약속은 오후 5시로 잡혔다. 민우가 지음사 본사로 찾아가기로 했다.

민우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연구실 밖으로 나왔다.

지음사.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그런 출판사다. 열 개가 넘는 계열사를 거느리고 있는 국내 굴지의 출판그룹.

‘출판사 연구원. 정확히 어떤 일을 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강 교수의 추천이라면 분명 비중 있는 일을 하게 될 것이다. 외서 번역이 아니라 본인의 저술을 낼 기회가 생길지도 몰랐다.

‘하긴, 나도 한때 작가의 길을 꿈꿨을 때가 있었지.’

민우는 강 교수의 명함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생각이 깊어졌다.

민우는 기다렸다. 감정이 식어가기를. 곧 기대로 들떴던 그의 눈이 다시 차분한 이성으로 채워졌다.

‘나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지 확실히 판단하자. 나무만 보지 말고 숲을 봐야 해.’

그때 누군가가 팔을 붙잡았다.

민우가 깜짝 놀라 돌아서니 연주가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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