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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8. 실력 발휘 (2) (18/500)


018. 실력 발휘 (2)
2021.03.12.


“아무나 소개를 해 줄 수는 없고. 내 것부터 먼저 시험 삼아 부탁을 해볼까.”

“주시면 감사하죠.”

“좋아.”

이재환은 즉시 한글초록 하나를 프린트해 민우에게 주었다.

제목은 ‘1970년대 여성 문학의 정치성에 대한 연구’였다. 간단히 살펴보니 1970년대의 한국문학을 개괄하고 정신분석학적 관점에서 여성성의 문제를 사유한 논문이었다.

그 중심에는 오정희가 있었다. 그녀의 <중국인 거리>는 민우의 머릿속에 오래도록 각인되어있는 소설이었다.

‘이거 재밌겠다!’

민우는 초록을 읽어보는 것만으로도 깊은 흥미를 느꼈다. 당장에라도 도서관으로 돌아가 논문을 정독하고 싶었다.

“다음 달에 한국문학연구학회에 보낼 페이퍼 초록이다. 중요한 거긴 하지만 너 믿고 한번 부탁해 본다. 어디 잘하나 지켜보겠어.”

“이따 저녁에 메일로 보내드릴게요.”

이재환은 살짝 놀랐다.

“저녁에? 바로 가능하겠어?”

“문제없습니다. 그런데 선배. 혹시 논문 전체를 먼저 볼 수 있을까요?”

“그건 왜?”

“초록은 요약이잖아요. 전체를 읽지 않고 요약본에 손을 댄다는 게 좀 뭐랄까…… 꺼림칙해서요. 기왕 할 거면 완벽하게 하고 싶습니다.”

“좋은 생각이네. 잠시만 기다려라.”

민우는 논문 인쇄본과 메일 주소를 받아들고 바로 도서관으로 돌아왔다. 한 시간을 들여 논문을 꼼꼼히 읽고, 컴퓨터에 앉아 초록 작성에 들어갔다.

결과부터 말하자면 매우 성공적이었다.

민우가 작성한 논문초록을 확인한 이재환은 걱정을 싹 지운 표정이었다. 칭찬도 아끼지 않았다.

“야 너 정말 물건이다! 어디 있다 이제야 나타난 거야? 중간에 용어 잘못 쓴 것도 교정을 했구나.”

만약 민우가 논문 전체를 읽지 않았더라면 실수가 그대로 나갈 뻔했다. 초록뿐만 아니라 전체적인 교정도 들어간 것이다.

“좋아. 마음에 든다. 내가 주선을 해 줄 테니까 기다리고만 있어.”

“감사합니다!”

이재환은 고학번인 만큼 인맥이 넓었다. 곧 민우 앞으로 국문초록이 속속 들어오기 시작했다.

결국, 민우는 박사급 선배들의 영문초록 작성을 전담하게 되었다. 이재환이 몇 명을 주선해 주었는데, 그네들이 다시 입소문을 낸 것이다.

사실 선배들이 실력이 없어서 영문초록을 쓰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약간의 귀찮음과 거기에 들일 시간이 부족했던 것이고, 그 간지러웠던 부분을 민우가 나타나 제때 긁어준 것이다.

그 과정에서 민우는 몇몇 고학번 선배들과 친분을 쌓을 수 있었다.

기댈 만한 선배가 단 한 명도 없었던 그에겐 새로운 길이 열린 셈이다.

“박민우!”

지금 민우를 부른 사람은 03학번 김용철이었다. 현대 시를 전공하는데 머리가 좀 벗겨지긴 했어도 차분한 인품이 돋보이는 사람이었다.

민우가 꾸벅 인사했다. 최민식과의 일 이후로 민우는 인사에 더욱 신경을 썼다.

“보내드린 건 잘 받으셨어요?”

“정말 고마워! 너 낙제생이라는 이야기가 있던데 이거 다 헛소문이었네. 역시 사람은 겪어봐야 안다는 소리가 맞다니까?”

“아직 부족합니다. 많이 가르쳐 주세요.”

“짜식. 겸손하기까지 하네.”

선배들의 칭찬이 계속되자 민우에 대한 평판도 조금씩 달라졌다.

듣기 싫은 별명으로 불리는 것보다 이름으로 불리는 일이 훨씬 많아졌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선배들의 인상에 남았던 것은 민우가 수고비를 받지 않으려 했던 점이다. 이번에도 김용철은 흰 봉투를 건넸지만 민우는 받지 않았다.

“괜찮습니다. 이거 받으려고 한 일 아닙니다.”

“정말 안 줘도 돼?”

“나중에 술이나 한잔 사 주세요.”

“이번 건 외국 학회에 보내야 하는 페이퍼라 영작 양이 좀 많았잖아. 업체에 맡겨도 돈 십만 원 이상은 깨졌을 건데.”

“정말 괜찮아요! 술자리로 충분합니다. 선배님께 좋은 말씀 들을 수 있는 자리가 될 텐데요. 돈으로도 바꿀 수 없죠!”

이렇게 입바른 소리까지 하면서 점수를 착실히 따냈다.

실제로 민우는 전혀 서운한 것이 없었다.

지금 베푼 모든 것들이 나중에 고스란히 자신에게 그대로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럼 다음에 술 한잔하자고. 내 번호 알지? 빈말 아니니까 꼭 연락해라.”

“예 선배님. 들어가십쇼.”

김용철 선배와 헤어진 민우는 다시 도서관으로 돌아왔다.

‘영어는 이제 마스터했다. 다음은 독일어를 파볼까?’

민우는 세계적인 명저와 논문 리스트를 먼저 준비했다. 아무나 막 읽는 것은 시간 낭비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독일은 철학의 중심지였다. 민우는 리스트로 뽑은 저서 중 철학과 관련된 것들을 우선적으로 뽑아 읽어 나갔다.

헤겔, 칸트, 니체, 쇼펜하우어, 하이데거.

‘문제없어!’

마치 마른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 독일의 거장들이 남긴 철학적 유산이 민우의 머릿속으로 소용돌이쳐 흡수되기 시작했다.

온몸에 짜릿한 쾌감이 돌았다. 논문을 담은 그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박민우 씨.”

하지만 독서삼매경에 빠진 민우는 수빈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수빈은 어깨를 툭툭 쳤다. 그제야 민우가 손에서 책을 놓았다.

“언제 왔어?”

“아까요. 뭔데 그렇게 집중해서 보고 있는 거예요? 사람이 불러도 대답도 않고.”

“그냥 논문.”

수빈은 고개를 내밀어 책을 훑어보았다. 민우가 하는 일이라면 사소한 거라도 관심이 가는 그녀였다.

“이거 독일어잖아요? 오빠 독일어도 할 줄 알았어요? 와, 이건 진짜 반칙인데.”

수빈은 정말 놀란 기색이었다. 영어 원서를 읽는 건 대단한 일이 아니지만, 독일어로 된 원서를 읽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그냥 훑어보는 거야. 독어 공부도 할 겸. 근데 무슨 일?”

“점심 같이 먹자고요. 톡을 몇 번이나 했는데 씹혀서. 핸드폰을 대체 어디다 놔둔 거예요? 섭이 오빠도 밖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민우는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벌써 12시가 넘어있었다.

“쏘리.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나?”

“빨랑빨랑 움직여요. 어서! 배고파 죽겠네.”

“알았으니까 재촉하지 좀 마라.”

두 사람은 도서관을 나와 밖에서 진섭과 합류했다. 4월의 마지막 주. 날씨는 화창했고 꽃향기가 어지러울 정도로 풍성한 날이었다.

민우 일행은 늘 그렇듯 학식으로 이동했다. 각자의 취향에 맞는 식단을 고르고 자리를 잡았다.

“요즘 선배들 사이에서 오빠 평판 좋은 거 같던데, 일 잘 풀리고 있나 봐요.”

“재환 선배가 많이 도와주셨어. 너희들도 영문초록 쓸 일 있으면 나한테 맡겨라.”

“다행이에요. 민식 선배랑도 잘 풀어서.”

“솔직히 말하면 잘 푼 건지 더 심해진 건지 확신이 안 서. 재환 선배 아니었으면 어떻게 됐으려나 모르겠다.”

실제로 그날 이후 민식을 만나지는 못했지만, 다시 만난다고 해도 좋은 말은 듣지 못할 것 같았다. 한번 눈 밖에 난 사람은 다시는 안 본다는 말까지 했으니.

그래도 민우는 주눅 들지 않았다. 열심히 한다면 언젠가 인정을 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민 선생님한테 얘기 안 한다고 한 게 어디예요. 감사한 줄 알아야지.”

“그건 그렇지.”

수빈의 말이 맞았다. 민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밥을 한술 떴다.

민식에게 사과한 이후로 2주일이 지났다.

그간 별다른 소문이 나거나 하지 않았고, 또 민영환 교수가 따로 부르는 일이 없었으니 약속은 지켜졌다고 봐도 됐다.

옆에 있던 진섭이 끼어들었다.

“그런데 그 양반은 왜 그렇게 타 학교 출신을 싫어해? 가끔 보면 병적이라는 느낌이 들 때가 있어. 다른 선배들은 우릴 그렇게 노골적으로 싫어하진 않잖아.”

“그게…….”

수빈은 뭔가를 말하려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맞은편에서 밥숟갈을 푸던 두 남자의 손이 뚝 멈췄다.

“뭔가 알고 있냐?”

“아뇨. 그건 아니고. 얼핏 들은 얘기가 있는데 확실치 않아서요. 확실하지도 않은데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건 좀 아니잖아요.”

진섭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지만 민우는 그렇지 않아 보였다.

“확실하지 않은 거 가지고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게 우리 인문학도들의 특기잖아. 빼지 말고 말해 봐. 우리 입 무거운 거 잘 알면서.”

“그렇지. 민우가 핵심을 잘 짚었네. 게다가 우리도 당사자야. 석사 신입생들 중 타대생은 우리뿐이잖아. 타대생 선배들은 학교 쉬거나 다 그만둬 버렸고.”

진섭까지 거들자 이수빈은 한참을 고민했다. 하지만 결국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제가 입학하기 전의 일인데요. 민식 선배가 되게 좋아하던 여자 선배가 있었는데, 그분이 대학원을 그만두신 이후로 저렇게 변했다고 들었어요. 원래는 조용하고 성격 좋은 분이었대요.”

그 말을 들은 두 남자의 반응은 똑같았다.

왜?

“그 여자분도 타 학교 출신이었대요. 대학원 그만두고 나서 바로 헤어지셨다고. 여자분이 학교에 적응을 잘 못 하셨다고 하더라고요.”

“뭐야. 치정 문제였어? 여자 하나 때문에 타 학교 출신들이 줄줄이 까이고 있었던 거야?”

진섭이 경멸 어린 표정을 짓자 민우가 팔꿈치로 그의 허리를 툭 쳤다.

“여자 하나라니. 말조심해라.”

“어, 미안.”

이수빈의 말은 빙산의 일각이다. 뭔가 더 깊은 사정이 있을 가능성이 있으니 함부로 재단해서는 안 될 일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민우도 놀라긴 했다.

최민식의 뒤에 그런 이야기가 있을 줄은 예상도 못 했다.

‘어쩐지 좀 이상하다 했어. 이유 없이 사람을 그렇게 괴롭히는 게 쉽지가 않지.’

그런다고 지금까지 받았던 수모가 풀리는 것은 아니었지만, 민우는 한결 마음을 편하게 먹을 수 있었다.

오히려 한 단계를 더 나아가 생각했다.

민우에게는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능력이 있었다.

‘어쩌면…….’

차별의 원인이 다른 것에 있다면 최민식에게 인정을 받는 날이 올 수도 있지 않을까?

민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바닥은 굉장히 좁아. 한 다리만 건너도 모두 알 수 있을 정도로. 미래를 위해서는 최대한 적을 많이 만들지 않는 게 좋지.’

바꿔 말하면 아군을 최대한 많이 확보해야 한다는 말이다.

특히 민식은 학문적 역량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게다가 세부 전공도 같다. 대학에서나 학회에서나 앞으로 부딪칠 일이 많을 것이다.

관계가 불편한 채로 굳어진다면 향후 받게 될 불이익은 상상 이상일 것이다.

‘쉽진 않겠지만 한번 해볼까? 최근 박사 논문 때문에 고생하고 계신 거 같은데.’

민우의 입가에 절로 미소가 그려졌다. 몇 가지 계획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고, 오랜만에 도전의식이 불타올랐다.

“뭐야 이 오빠. 갑자기 왜 웃지? 무섭게.”

“밥이나 먹자.”

민우는 시간이 있을 때 최민식의 연구물을 검색해 보기로 했다.

민식의 세부 전공은 현대소설.

그와의 접점을 만드는 것은 바로 그 지점에서부터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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