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17. 실력 발휘 (1) (17/500)


017. 실력 발휘 (1)
2021.03.11.


“뭐?”

민식의 표정이 구겨졌다.

이해할 수 없었다. 민우가 저자세로 나왔기 때문에 다른 답을 할 줄 알았는데.

“그럼 네가 사과한다고 뭐 달라지는 일은 없을 텐데?”

“달라지는 걸 바라고 이렇게 온 건 아닙니다. 한번 꺼낸 말은 주워 담을 수 없는 법이니까요.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제가 책임을 지겠습니다.”

침묵.

잠시 뜸을 들인 민우가 계속 말을 이었다.

“다만 제가 잘못한 부분이 있었고, 그 부분에 대해 선배님께 용서를 구하고 싶었습니다. 다른 의도는 없습니다. 진심입니다.”

“그러셔?”

하지만 최민식의 마음을 움직이는 건 역부족이었던 모양이다.

그는 아무런 대꾸 없이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버렸다.

한마디로 완전히 무시당한 것이다.

“선배님!”

그 후로 민우는 몇 번 더 대화를 시도하려 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민식은 들은 척도 안 하며 논문에 집중했다.

‘역시 안 되는 건가?’

민우가 포기하려던 그 순간이었다. 뒤에서 이재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민식아. 그만하고 담배나 한 대 피우러 가자.”

“예. 형.”

재환의 말은 고분고분 잘 듣는 민식이었다.

두 사람은 바로 연구실을 나섰는데, 나가기 전 재환이 민우를 보며 씨익 웃어 보였다.

무슨 의미일까.

민우는 왠지 모를 불안감에 연구실에서 한 발자국도 나서지 못했다.

* * *

“날씨 따뜻하고 좋네. 겨울이 엊그제였던 것 같은데. 세월 참 빨라.”

“그러게요.”

두 사람이 멈춘 곳은 인문관 밖에 딸려 있는 휴식 공간. 목제 벤치와 덩굴나무가 지붕을 감싸고 있어 느낌이 아늑하고 좋았다.

먼저 자리를 잡은 이재환이 자연스레 담배를 꺼냈다.

두 개를 꺼내 하나를 민식의 입에 물렸다. 불은 늘 민식의 몫이었다.

야간등에 비친 민식의 표정은 썩 좋지 않았다.

재환의 입에서 무슨 이야기가 나올지 대강 짐작한 눈치였다.

“민식아. 아무리 논문이 잘 안 풀린다고 해도 그렇지. 왜 엄한 애 잡고 그러냐?”

이재환이 타박하듯 한소리 했다.

그 말에 민식은 고개를 숙였다. 자신이 생각해도 조금 지나친 면이 있었다. 이성적인 행동은 아니었다.

“보기 안 좋잖습니까.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놈이 벌써부터 다른 전공 선생님 연구실 기웃거리고.”

“다른 전공 선생님 연구실?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 한다더니 지금 상황이 딱 그러네. 응?”

민식이 입을 꾹 다물었다.

정곡이었다. 스스로가 생각해도 앞뒤가 맞지 않았다.

“배 아파서 그러냐? 민우가 강 선생님 프로젝트에 들어가서.”

“그런 건 아니고요.”

사실 오래전 최민식도 강철훈 교수 연구팀에 들어가고 싶어 지원했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역량 부족으로 퇴짜를 맞고 말았는데, 이재환이 바로 그 점을 지적한 것이다.

“그럼 뭔데? 민우 걔 별명은 좀 그렇지만 열심히 하는 친구잖아. 도서관에서도 자주 봤고. 수빈이도 칭찬이 자자하던데.”

“그게…….”

“서자들 그만 잡어. 어차피 논문 쓰고 밖으로 나가면 다 똑같아진다. 적자라고 별거 있을 줄 알아?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교수 자리 하나 구하기 힘든 세상이야.”

이재환이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고뇌가 섞인 표정.

그도 박사학위를 받은 지 벌써 2년이 지났지만 마땅히 자리를 구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나마 학계에서 성과가 좋아 경기권 대학에서 강의교수직을 얻은 게 다였다.

강의교수는 다른 말로 초빙교수라고도 하는데, 보통 1년 혹은 2년간 계약하여 강의만 하는 계약직이다.

연구실도 공동으로 써야 하고 페이도 그리 세지 않다. 계약 기간이 끝나면 내쳐지는 것도 다반사다.

처우가 조금 좋아질 뿐, 시간강사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다.

“나를 봐. 아무리 아등바등해도 기껏해야 강의교수 자리 하나 얻는 걸로 끝났잖아. 걔네들은 더 힘들 텐데. 모난 말 한마디보다 힘이 되는 말 한마디가 더 좋지 않나? 어쨌든 같은 길을 걷는 동료잖아.”

“못 버틸 게 뻔히 보여서 그런 겁니다. 형도 알잖아요. 타대생들 빌빌거리다 석사도 못 마치고 튕겨 나가는 거.”

“그러니까 왜 악역을 니가 맡냐고. 어울리지도 않는 가면 쓰고 왜 쑈를 하냐고. 엉? 너 원래 그런 놈 아니잖아?”

답답했는지 재환이 손가락으로 민식의 가슴께를 쿡쿡 찔렀다.

자신의 앞가림만 해도 모자란 게 시간이다. 그런데 민식은 애써 민우와 다른 타대생들을 괴롭히고 있었다.

재환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아닌 애들은 알아서 지쳐서 떨어져 나가겠지. 버틸 애들은 뭘 해도 버틸 거고.”

“그러겠죠.”

“간만에 물건 하나 들어왔잖아. 좀 지켜봐 주자고.”

이재환은 다시 담배를 물었다. 그것을 마지막으로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한참 후 손에 들린 담배가 재를 모두 뱉었다.

이재환이 꽁초를 짓이기며 의미심장한 한마디를 꺼냈다.

“혹시 너, 아직 민희 잊지 못해서 그래?”

민식이 움찔했다.

민희라는 이름은 그의 역린과 다름이 없었다.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민식은 꽁초를 버리고 인문관 안으로 먼저 들어갔다. 아니, 재환의 눈에는 도망가는 사람처럼 보였다.

연구실에는 아직 민우가 기다리고 있었다.

“안 가고 있었냐?”

문을 닫은 민식은 한참이나 민우의 얼굴을 노려보기만 했다. 그러나 아까와는 달랐다. 이성이 감성을 철저히 지배하고 있었다.

“박민우.”

“예, 선배님.”

민식은 생각이 많아 보였다. 그 공백이 민우에게는 천추의 시간처럼 느껴졌다.

이재환이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한 걸까?

가장 좋은 것은 중간에서 중재를 해 주는 것. 하지만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말 그대로 그와는 일면식도 없었으니까.

그런 생각에 사로잡혀 있을 즈음 최민식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내가 경솔했던 것 같아. 막말해서 미안하다. 이번 일은 민 선생님께 따로 말씀드리지는 않으마.”

그의 진심이 느껴졌다.

민우는 긴장이 탁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설마 그가 사과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하지만 민식의 말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너를 인정했다는 건 아냐. 난 한번 눈 밖에 난 사람은 다신 안 보는 주의라서. 앞으로 조용히 다녀라.”

“다시 한번 사과 말씀드립니다. 선배님. 앞으로는 더욱 주의하겠습니다.”

“가라.”

민우는 허리를 꾸벅 숙여 보이고는 연구실을 나갔다.

한편 민식은 오래전 헤어진 연인의 얼굴을 머릿속에서 지우기 위해 논문을 열었다. 당연히 아무런 글자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눈을 지그시 누르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울리지도 않는 가면을 쓰고 쇼를 한다. 이재환이 정확히 지적했다. 요즘 들어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스스로가 한심했다.

논문 때문이라는 건 핑계였다. 언제쯤이면 이 가면을 벗을 수 있는 것일까. 언제쯤이면…….

“최민식.”

이재환은 그로부터 한참 뒤에 돌아왔다. 그런데 빈손이 아니었다.

“공부하는 척은 그만하고 한 잔 어때?”

그의 손에는 소주 몇 병과 마른안주가 들려 있었다. 민식이 쓴웃음을 지었다. 확실히 사람을 잊는 것엔 술만 한 게 없다.

* * *

최민식과의 일이 일단락된 이후 민우는 공부에 가속을 붙였다.

― Literature is a social institution, using as its medium language, a social creation. Such traditional literary devices as symbolism and metre are social in their very nature. They are conventions and norms which could have arisen only in society. But, furthermore, literature represents life.

그는 가리지 않고 해외 서적과 논문을 읽었다. 번역본은 아예 손도 대지 않았고, 원서만 읽으며 그 맛을 음미했다.

그러다 보니 민우의 영어 실력은 정말 크게 향상되었다. 이제 영어로 된 것은 안경을 쓰지 않아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그 와중에 민우는 블로그까지 운영했다.

닉네임은 별사탕.

민우는 자신이 읽은 해외 원서의 요약본을 하나씩 포스팅했다.

민우는 문학, 예술, 철학 등의 대분류를 설정하고, 나라별로 세부 카테고리를 만들어 내용을 하나씩 채워 넣기로 했다.

‘언젠가 분명 도움이 될 거야. 나한테도, 그리고 동료들한테도.’

실력이 늘어난 것은 독해뿐만이 아니었다. 영작도 마찬가지.

민우는 능력을 가만히 묵힐 정도로 아둔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적극적으로 움직이며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찾았다.

‘우선 학교에서 내 평판을 올릴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보자. 뭐가 있지?’

그때 생각 없이 논문집 페이지를 빠르게 넘기던 민우의 손이 뚝 멈췄다.

멈춘 페이지에 영문초록이 보였다.

동시에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민우의 뇌리를 스쳤다.

‘그래. 바로 이거야!’

민우는 즉시 이재환을 찾아갔다.

그날 민식과의 일을 계기로 민우는 진짜 선배를 하나 얻었다.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재환에게 도움을 받았던 것.

민우는 박사수료생 연구실을 조심스레 노크했다. 안으로 들어가니 마침 이재환만 있었다.

“요즘 자주 본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식사는 하셨어요?”

“대충 빵으로 때웠지. 또 사고 쳤어? 민식이는 오늘 안 나올 텐데.”

이재환의 농담에 민우가 미소로 화답했다.

“사고는 아니고 선배님께 좀 부탁드릴 게 있어서요.”

“나한테?”

이재환은 흥미를 보였다. 펜을 내려놓고 의자를 돌려 민우를 바라보았다.

“혹시 영문초록 작성이 필요한 선배님들 계시면 소개 좀 해 주실 수 있으세요?”

“영문초록을? 네가?”

“요즘은 학술지에 논문을 게재하려면 영문초록이 필수잖아요. 제가 공부도 할 겸 선배님들의 초록 작성에 도움이 되어 드리고 싶습니다.”

“너 영작 좀 하나? 아, 하긴. 강철훈 선생님 연구팀에 들어갈 정도면 실력은 어느 정도 있긴 하겠네.”

이재환은 흥미로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명인대학교에 적을 둔 지 벌써 18년이 지났다.

그런데 이렇게 불쑥 찾아와서는 일거리를 부탁하는 후배는 지금까지 단 한 명도 본 적이 없었다. 그것도 타 학교 출신의 석사 1학기생이.

16557824334626.jpg

16557824334631.jpg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