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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6. 신념 (3) (16/500)


016. 신념 (3)
2021.03.08.


점심시간이 가까워질 무렵 박민아가 명인대에 나타났다. 역시나 그녀의 표정엔 노기가 가득했다.

민우는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

‘쉽지 않겠어!’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핸드백이 먼저 날아오지 않았던 것 정도.

“누구야?”

“누나. 진정해 일단. 아무 일도 없었어.”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

민아의 손이 움찔했다. 민우가 진정시키지 않았다면 손바닥이 날아왔을지도 몰랐다.

한차례 심호흡을 한 박민아는 동생의 얼굴을 빤히 노려보았다.

자세히 불어라.

대신 맞아도 책임은 지지 않는다. 뭐 그런 표정이었다.

“대학원 동기야. 아, 정말 쫌! 아무 일도 없었다니까? 그냥 2차로 집에 와서 맥주 좀 마신 것밖에 없다고.”

“아니, 다 큰 청춘남녀가 집에서 술 마시고 아무런 짓도 안 했다는 게 상식적으로 말이 돼?”

“돼.”

“너…… 고자니?”

그 한마디에 민우는 왠지 패배한 느낌이 들었다.

누나의 말이 맞다.

청소년도 아니고 알 거 다 아는 청춘남녀다. 술을 마시고 개인적인 공간에 단둘이 있었는데 아무 일도 없었다니.

민우가 한숨을 내쉬며 등을 돌리자, 민아도 미안한 마음이 들었는지 더 이상 잔소리를 하지 않았다.

“하긴, 너도 다 컸는데 집에 여자 끌어들이는 게 이상한 건 아니지. 여친 생긴 거야?”

“아니라니까! 그냥 동기야.”

“몇 살인데?”

“스물넷.”

“네 살 차이면 딱 좋네. 잘해 봐. 너 연애 한 번도 못 해봤잖아. 근데 누난 아직 조카 볼 준비는 안 돼 있어. 할 땐 하더라도 그건 확실히 해. 알았어?”

“뭐가 그거야? 됐거든!”

그건 확실히 하라는 대목에서, 수빈이와의 정사가 상상돼 민우는 얼굴이 빨개졌다.

‘이상한 생각은 그만두자. 수빈이 녀석한테 미안한 일이야.’

민우는 이 주제로 더 이상 이야기를 하는 것이 정신건강에 이롭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얌전히 누나를 도서관으로 안내했다.

“캠퍼스 구경 좀 할래? 꽃이 한창이라 볼만한 데가 좀 있는데.”

“됐다. 팔자 좋게 꽃구경은 무슨. 어서 공부하고 가야지. 너 시간도 별로 없잖아.”

“오전에 전화 받은 그 동생 덕에 시간을 좀 세이브했어. 입시 자료를 모아 줬거든.”

“그래?”

“일단 따라와. 들어올 때 이 학생증 대고.”

민우는 수빈에게 빌린 학생증을 누나에게 건넸다. 태그를 해야 출입이 가능한 시스템이라 학생증이 필요했다.

민우가 자판기 앞에 서서 동전을 꺼냈다.

“커피 괜찮지?”

“좋지.”

음료를 준비한 다음 민우는 도서관 휴게실에 자리를 잡았다.

민우는 먼저 이수빈에게 받은 입시 자료를 꺼냈다. 과연 국문과 수석답게 정리를 잘해 주었다. 보기가 무척 편했다.

자료를 쭉 훑어보던 민아가 한숨부터 내쉬었다.

“가람대면 인서울 아니야? 들어가기 어렵지 않을까.”

“애초에 입시가 쉬울 리가 없잖아. 그만큼 누나가 노력을 해야겠지. 괜찮아. 누나는 머리가 좋으니까 금방 따라잡을 수 있을 거야.”

“그래도.”

“왜 이래? 아까 나 잡아먹을 기세로 공부를 해 보라고. 그럼 가람대가 아니라 명인대도 들어갈 수 있을걸?”

민우는 누나의 잠재력을 믿었다. 그녀는 학창시절 공부를 굉장히 잘했다. 어쩌면 혼자 공부해도 성공할지 몰랐다.

일단 민우는 이수빈이 준비해 준 자료를 토대로 입시 전략을 세웠다.

편입을 위해서는 영어 실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니, 결과적으로는 어떻게든 영어 실력을 향상시키는 방향으로 결론이 났다.

“하지만 당장 급한 건 누나의 이직이지. 그렇지?”

“맞아.”

이직하기 위해서는 영어 성적이 필요하다. 민아가 처음 입사할 때와는 사회의 요구치가 많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민우가 생각한 시험은 TEPM.

TEPM은 Test of English Proficiency developed by Myungin University의 약자로, 명인대에서 개발한 실전영어능력평가다. 대학 입시는 물론 주요 기업의 서류전형에서 자주 언급되는 시험이었다.

“그럼 TEPM을 먼저 준비하자. 대학원 입시 준비하면서 속성 공부법을 터득했으니까 점수 만들기는 어렵지 않아.”

“그걸로 이직이 잘 될지 모르겠다만.”

“누나는 경력이 있잖아. 실력만 받쳐준다면 승산이 있어. 할 수 있다는 걸 우리가 보여주자고.”

“알았으니까 오바하지 마. 다음은?”

“편입. 학점은행제 등록은 했어?”

“그때 너랑 얘기하고 바로 했다.”

전문학사 취득까지는 길어야 1년 반. 어쨌든 시간이 걸리는 부분이라 천천히 준비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대강 이야기가 끝났다. 민아는 입시 자료를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이 자료 말이다. 아까 그 전화 받은 여자애가 구해다 준 거라고 했지?”

“어. 걔네 아버지가 가람대 교수야.”

“언제 시간 좀 내달라고 해. 저녁 한 끼 대접한다고. 이런 귀한 자료를 받았는데 맨입으로 넘어가는 건 좀 글타.”

과연 누나다운 생각이다.

민아는 신세를 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다. 그래서 동생의 도움도 어떻게든 받지 않으려고 한 것이다.

“생각해 볼게.”

“왜 생각을 해? 나쁜 일도 아닌데.”

“누나가 걔 앞에서 무슨 말을 할지 모르니까. 또 고자 소리 하면 쪽팔리잖아.”

퍽.

결국, 민우는 한 대 맞고 말았다.

* * *

‘아, 누나는 또 뭘 이런 걸 다 주고 그래.’

민우는 씁쓸한 표정으로 봉투를 만지작거렸다.

첫 과외가 끝난 직후, 민아는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에 오르기 전에 용돈이 담긴 봉투를 건넸다.

당연히 민우는 봉투를 받지 않으려고 했다.

가뜩이나 월세 신세도 지고 있는데 용돈까지 받는 건 너무 미안했기 때문이다.

― 존말 할 때 받아. 알지? 그냥 주는 거 아니라는 거. 투자다.

살기가 섞인 그 한마디에 민우는 봉투를 냉큼 받을 수밖에 없었다.

민우는 봉투를 슬쩍 열어보았다. 오만 원권 지폐가 두 장 들어 있었다.

객관적으로 큰돈은 아니다.

하지만 누나가 피땀 흘려 모은 돈이라고 생각하니 그 어떤 돈보다도 크고 값지게 느껴졌다.

‘고마워 누나. 잘 쓸게.’

민우는 천천히 캠퍼스를 걸으며 인문관으로 향했다. 도서관으로 돌아가지 않은 이유는 마음에 걸리는 일이 하나 있어서였다.

‘민식 선배. 아직도 화가 많이 나 있겠지?’

민우는 어떻게든 그에게 사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괜히 늦추거나 덮을 만한 일은 아니다.

내용은 잘못된 게 없었지만, 그 방식에서 조금 문제가 있었다. 아무리 그가 폭언했다고 해서 반항이 정당화되진 않는다.

‘한창 논문 쓰고 있으니 연구실에 계실지도 모르겠다. 가보는 게 좋겠어.’

민우는 박사수료생들이 공동으로 사용하는 연구실 문 앞에 섰다.

낡은 목재 문엔 함부로 범접할 수 없는 어떤 위엄이 서려 있었다.

수료생들은 보통 시간강사를 겸하며 논문을 쓰는 일이 많아 이곳엔 고학번 선배들이 대거 포진해 있다. 자대생이라고 해도 함부로 들어갈 수 없는 그런 공간인 것이다.

침을 꿀꺽 삼킨 민우는 살짝 노크했다.

“실례합니다.”

안으로 들어가니 처음 보는 남자 하나가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었다. 최민식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민우는 남자를 주목했다.

하얀 피부에 가르마를 탄 머리. 그리고 무테안경을 썼는데 굉장히 엘리트다운 느낌이 들었다.

“누구?”

“안녕하세요. 석사 1학기 박민웁니다.”

“신입생 후배님이 여기엔 무슨 일? 아, 내 소개를 안 했구나. 내 이름은 이재환이다. 98학번이야.”

98학번.

쉽게 와닿지 않는 학번이라 민우는 잠시 생각에 잠겨야 했다.

‘내가 08학번이니 딱 열 학번 차이가 나네.’

재수하지 않았다면 나이는 아마 서른여덟일 것이다.

이재환은 학번만큼 나이가 든 얼굴이었지만, 주름에서 오랜 경험이 느껴졌다. 교수라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느낌.

“처음 뵙겠습니다. 선배님. 잘 부탁드립니다. 그런데 제가 갑자기 찾아와서 방해를 한 건 아닌지 걱정되네요.”

“아니, 전혀. 괜찮아. 뭐 여기에 손님이 오는 건 굉장히 드문 일이긴 하지. 후배들은 무슨 여기가 마수들의 소굴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절대 그렇지 않아. 오는 녀석들은 반갑게 맞아 준다.”

확실히 재환의 표정은 밝았다. 오랜만에 휴식을 취한다는 그런 느낌이다.

실제로 박사수료생들은 강의와 논문 저술에 쫓기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다. 한참 어린 후배의 방문은 활력소가 될 만한 일이었다.

“그런데 후배님? 내 질문에 대답을 아직 안 했는데.”

“예?”

“무슨 일로 왔냐고. 여기.”

“아, 그게…… 민식 선배님 뵈러 왔는데요. 오늘 안 나오셨나요?”

“민식이? 아까 잠깐 나갔는데, 논문이 안 풀려서 바람이라도 쐬고 오려는 모양이지. 앉아서 기다리고 있어라.”

이재환은 직접 의자를 끌어다 주는 성의를 보였다. 그리고 냉장고에서 음료수도 하나 꺼내 주었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근데 이름이 박민우라고 했나?”

“예. 맞습니다.”

“낙제생 별명 가진 그 박민우 맞지?”

“……네.”

소문이 여기까지 퍼진 건가.

턱을 괴고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던 이재환이 훗 하고 웃었다.

‘뭐지?’

민우는 그가 왜 웃는지 궁금했지만, 캐물을 수가 없었다. 격 없이 묻기엔 학번의 차이가 너무 컸다.

그때 문이 벌컥 열렸다.

최민식이었다. 피로에 찌든 얼굴은 물론 머리카락이 부스스했고 떡까지 져 있다.

“뭐야. 박민우. 석사 나부랭이가 뭐 한다고 여길 기어들어 와?”

민우가 벌떡 일어섰다.

“불쑥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선배님께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어서요. 괜찮으시다면 잠시 시간 좀 내주세요.”

“할 말은 그때 다 한 거 아니었냐?”

“선배님. 잠시 밖으로…….”

“내가 왜?”

자리를 옮겨 조용히 용서를 구하려고 했는데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이재환이 있긴 하지만 이 자리에서 끝내기로 했다.

일단 민우는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했습니다. 그때 제가 무례하게 굴었던 건 사과드리겠습니다.”

“아주 뚫린 입이라고 할 말 다 하드만. 사람 밀치기까지 하고. 명인대도 끝장이야. 이런 놈이 신입생이라니.”

“죄송합니다. 앞으로는 조심하겠습니다.”

민우의 흐트러짐 없는 태도를 봐서일까. 민식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 그는 의자를 끌어다 놓고 앉아 거만하게 다리를 꼬았다.

“하지만 사과를 한다고 끝날 문제는 아닌 거 알지?”

“예.”

“강 선생님 프로젝트는 어쩔 거냐?”

기다리던 질문이 나왔다.

심호흡한 민우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대꾸했다.

“계속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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