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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5. 신념 (2) (15/500)


015. 신념 (2)
2021.03.05.


“자고로 선배라면 후배의 학문적인 신념을 지켜줄 줄 알아야 하는데 민식 선배는 그러지 못한 거고요. 오히려 민식 선배가 민 선생님한테 일러바친다고 한 거랑 다를 바 없잖아요. 다 큰 남자가 쪼잔하게 그게 뭐예요?”

속이 다 시원한 한마디였다.

그런데 수빈이 돌연 고개를 숙였다. 사과하는 포즈였다.

“아무튼, 미안해요. 괜히 제가 강 선생님 프로젝트 얘길 꺼내서 오빠가 난처해졌네요. 말하지 말걸…….”

“아니, 네가 미안할 건 없지. 오히려 나한테는 좋은 기회가 됐으니까.”

“그래도요. 결과가 좋지는 않잖아요.”

민우는 감동했다.

사실, 이 얘기를 꺼냈을 때 그녀가 최민식의 편을 들 줄 알았다. 학부 때부터 선배였으니까.

그런데 객관적인 입장에서 아무런 연고도 없는 자신의 편을 들어주니 마음이 북받쳐 올랐다.

“오빠.”

수빈이 손을 뻗어 민우의 손을 잡았다.

보드랍다.

“너무 신경 쓰지 마요. 민식 선배도 말만 그렇게 하지 오빠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떠들고 다닐 여유 없을 거예요. 논문 심사 얼마 안 남아서 예민해져서 그런 걸지도 모르고요.”

그 말도 일리가 있었다.

최민식은 무서울 땐 무섭지만, 대체로 과묵한 편에 속했다. 수빈의 말대로 논문 심사 탓에 예민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도 내가 좀 심하긴 했어. 대들었다는 사실엔 변함이 없으니. 내가 민식 선배 입장이어도 불쾌했을 거야.”

“그건 나중에 따로 사과를 하면 되는 거고요. 일단 지금은 오빠가 열심히 하는 게 중요한 거잖아요? 실력으로 인정받겠다. 이게 오빠가 입버릇처럼 말하던 거잖아요.”

“그렇지.”

수빈은 잠시 입을 다물고 민우를 마주 보았다.

그런 민우의 모습이 멋있고 좋았다. 마음속으로만 그렇게 고백하며 그녀는 잔을 들었다.

“그럼 이 술 한 잔에 다 털어버리고 내일부터 다시 열심히 하는 거예요. 알았죠?”

“이 작은 술잔에 다 담을 수 있을까.”

“오빠라면 할 수 있어요.”

수빈에게 이렇게 다정한 면모가 있을 줄은 몰랐다.

착하고 다정하고 사려가 깊은 사람.

문득 민우는 나중에 수빈이 좋은 교수가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학생들의 입장에서 함께 고민해줄 수 있는 몇 안 되는 진짜 교수가.

민우는 웃으며 잔을 들었다.

“고맙다.”

진심을 담아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 진심은 그대로 마음속에 전달되었다. 수빈은 예쁘게 웃었다.

“고마우면 술값은 오빠가 내는 걸로.”

“왠지 낚인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건 왜지?”

두 사람이 동시에 웃었다. 뜻밖으로 유쾌해진 술자리는 그날 새벽까지 계속되었다.

* * *

타는 듯한 갈증을 느낀 민우가 눈을 떴다.

‘어디지?’

자취방이었다. 새벽 네 시 반. 곳곳에 맥주 캔이 널려있고, 먹다 남은 안주가 뒹굴고 있었다.

‘으윽. 머리야. 대체 얼마나 마신 거야.’

깨질 것 같은 두통에 이마를 부여잡은 민우가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옆에 뭔가 물컹한 것이 느껴졌다.

왠지 여자의 가슴이라면 이런 감촉이 들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가슴?’

무심결에 돌아본 민우는 화들짝 놀랐다.

“이수빈!”

그녀가 이불 속에서 잠들어 있었다.

민우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도대체 무슨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머리를 싸매며 전날 밤의 일을 복기해 보았다.

민식 선배와 언쟁을 벌이고 난 다음 수빈이와 술집에 가서 소주를 마셨다. 둘이 합쳐 다섯 병정도 마신 것 같았다.

거기까진 기억이 어렴풋이 남아 있는데, 술집에서 나간 이후의 기억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편의점에 들른 것과 집에 들어온 기억이 다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자신과 수빈이 옷을 입고 있었다는 사실.

‘다행히 선은 안 넘었구나. 그냥 2차로 우리 집에서 마신 건가? 나도 취하긴 취했나 보네. 겁도 없이 여자를 집에 끌어들이고.’

민우의 집은 금녀의 공간이었다.

진섭이가 몇 번 와서 신세를 진 적은 있어도, 가족을 제외한 다른 여자가 들어온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한숨을 내쉰 민우.

그때 이수빈이 몸을 뒤척이며 이불을 발로 걷어냈다. 깊게 파인 셔츠 너머로 새하얀 가슴 라인이 드러났다.

가슴뿐만 아니라 허리에서 엉덩이로 이어지는 라인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꿀꺽.

민우는 절로 침을 삼켰다. 수면보조등의 불빛을 받아 수빈의 몸이 무척 고혹적으로 보였다.

‘나도 그렇지만 너도 참 대책이 없다. 다 큰 여자가 이렇게 무방비로 뻗어도 돼?’

민우는 머릿속을 헤집고 들어오는 음란한 생각을 떨쳐버리고 이불을 어깨까지 끌어올려 주었다.

수빈은 자신을 믿기 때문에 자취방에서 술을 마시자고 한 것이리라. 그렇게 생각하니 남자의 본능을 억누를 수 있었다.

‘물이나 마셔야지.’

민우는 냉장고를 열고 물을 양껏 마셨다. 이제야 갈증이 좀 가시는 듯한 느낌이다.

‘그나저나 이제 어디서 잔다…….’

바닥은 수빈이가 차지하고 있으니, 그곳에서 다시 잠을 청하는 건 좀 그랬다. 허름한 2인 소파에서 새우잠을 자는 방법밖에 없었다.

그렇게 민우는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다시 눈을 뜬 건 아침 햇살이 한창일 무렵이었다. 뭔가 얼큰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해장하기 딱 좋은 그런 냄새였다.

“오빠, 그만 일어나요. 슬슬 아침 먹어야죠.”

게슴츠레 눈을 뜬 민우는 목소리가 들리는 쪽을 바라보았다. 앞치마를 두른 이수빈이 생글 웃고 있었다.

“너…… 아직 안 가고 있었냐?”

“오빠 해장은 시켜주고 가야죠. 어제 술도 실컷 얻어먹었는데 그 정도는 해야지. 앞에 슈퍼에서 콩나물 좀 사 와서 찌개 끓이는 중이에요. 거의 다 됐어요.”

“고맙긴 한데 부모님이 걱정하시잖아. 어서 가 봐.”

“집에 얘기는 다 해 놨어요. 그리고 나도 해장은 해야 할 거 아녜요. 사람 참 매정하네?”

그때 뭔가가 생각났는지 수빈이 국자를 휘휘 저으며 말했다.

“맞다. 아까 오빠네 누나한테서 전화 왔었어요. 급한 일인지 계속 울리더라고요.”

“그래?”

민우는 휴대폰을 확인했다. 그런데 부재중 전화는 찍혀있지 않고, 통화 내역만 남아 있었다.

통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야! 너 설마 전화 받은 거야?”

“뭔가 급한 일 같아서 일단 받았어요. 오빠 자고 있다고 얘기했는데. 왜요?”

“아.”

민우는 눈앞이 컴컴해졌다. 누나가 무슨 잔소리를 할지 생각하니 벌써부터 소름이 돋았다.

“아침상 차리고 있을 테니까 한번 전화해 보세요. 무슨 일인지는 말씀 안 하시더라고요. 당황하시는 거 같아서.”

“……알았어.”

잠시 뚫어져라 핸드폰을 노려본 민우가 용기를 내어 통화버튼을 눌렀다.

― 너 당장 방 빼! 공부 열심히 하라고 학교 근처에 방 잡아 줬더니 여자를 끌어들여? 도대체 둘이 술 마시고 무슨 짓을 한 거야?

“누나. 잠깐만. 내 말 좀 들어봐.”

― 됐고 이따 명인대에서 보자.

툭.

전화가 끊겼다.

절망감에 휩싸인 민우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오늘은 과외고 뭐고 누나에게 신나게 털릴 일만 남았네.’

한편 국자로 국을 젓던 수빈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전화를 받은 것은 고의였다.

민우를 난처하게 만들기 위해 그런 것이 아니었다. 단지 그의 누나에게 자신의 존재를 어필하려고 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조금 더 쉽게 민우에게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

“준비 끝. 밥 먹어요.”

“먹어서 뭐하겠냐. 곧 죽을 목숨인데.”

“먹고 죽은 귀신이 때깔도 좋대요.”

어쩔 수 없이 민우는 식탁에 앉았다. 식탁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찌개는 물론 밑반찬도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비주얼이 괜찮았다. 한두 번 만들어 본 솜씨는 아니었다.

“반찬도 했어?”

“오랜만에 실력 좀 발휘해 봤죠. 냉장고를 보니 답이 없어서요. 참, 오빠 블루치즈 케이크도 먹어요? 취향 독특하네.”

식탁 한쪽을 보니 푸른색 코팅이 올라간 케이크 한 조각이 보였다. 민우는 멍하니 그걸 보더니 피식 웃었다.

“아 그거, 곰팡이 핀 거야. 그냥 치즈 케이크야.”

“꺅!”

수빈은 벌떡 일어나더니 식탁에 놓인 케이크를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 모습을 보며 민우는 낄낄대고 웃는다.

“웃지 마요! 세상에! 냉장고 정리 좀 하고 살아요. 보니까 청소도 잘 안 돼 있는 거 같은데. 겉은 멀쩡한데 왜 그래요?”

“어차피 나 혼자 사는 집인데 뭐 어때. 대충 치우면 그만이지.”

“아무튼. 이따가 청소도 좀 해야겠어요.”

“청소까지 해 주려고?”

“집안 꼴이 말이 아닌데 어떻게 그냥 가요? 온 김에 해 줄게요.”

겉으로 보기엔 공부만 할 줄 알게 생겼는데 집안일도 잘하는 모양이었다.

“빨리 탈출하는 게 좋을걸. 우리 누나 지금 장난 아니야. 화 머리끝까지 났어. 당장에라도 달려올 기세였다고.”

“괜찮아요. 죄진 것도 아닌데. 그리고 학교에서 보기로 했다면서요.”

“아, 그렇지 참.”

약간은 안도하며 국을 한술 떴다. 시큼한 김치의 맛과 시원한 콩나물의 맛이 잘 어우러져 있었다. 해장으로는 딱이다.

반찬도 급하게 만든 것 치고 맛이 있었다. 이 정도라면 매일 먹어도 질리지 않을 정도다.

“솜씨 좋은데?”

“부모님이 바쁘시니까 혼자서 해 먹어야 할 일이 많았거든요. 요리도 은근히 재미있어요. 재료를 구하고 섞어 넣는 게 논문 쓰는 거랑 좀 비슷하다고 할까. 성취감이 제법이에요.”

“인간적으로 밥 먹는데 공부 얘기는 좀 하지 말자.”

수빈은 입술을 삐죽거렸다.

“참, 입시 자료 오빠 가방에 넣어놨어요. 이따 언니 만나면 드리세요.”

“땡큐.”

“언니가 나중에 밥 한 끼 사겠다고 하면 꼭 불러 주시고요.”

민우는 수상한 눈빛으로 수빈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곧 그만두었다. 일단 지금은 누나의 화를 어떻게 푸느냐가 관건이었다.

잠시 후 민우가 수저를 내려놓았다. 밥과 국 공기를 깨끗이 비웠다.

“잘 먹었다.”

“맛있었죠? 종종 해 줄까요?”

“됐어. 인스턴트가 편해.”

수빈은 좀 아쉬웠지만 이걸로도 만족했다. 민우와 조금, 아니 굉장히 가까워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식사를 마치고 간단히 청소한 다음 집을 나섰다. 수빈은 머리를 감는 대신 민우의 모자를 빌려 썼다.

“바로 집으로 가. 아무리 그래도 외박은 좀 그렇잖아. 부모님이 걱정하실 거야.”

“부모님은 그런 거 별로 신경 안 써요. 학교에서 밤 샌 적이 되게 많다 보니.”

“의외네. 보수적일 거 같은 집안인데.”

“부모님도 공부를 오래 하셔서 잘 아시는 거죠. 때론 밤 샐 정도로 힘들다는 걸요.”

민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수빈은 바로 집으로 돌아갔고, 민우는 명인대학교로 이동했다. 버스에 몸을 실은 내내 민우는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기만 했다.

‘뭔가 많은 일이 있었던 하루였어.’

민우는 한마디로 정리할 단어가 있는지 찾아보았다.

그래.

꿈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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