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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4. 신념 (1) (14/500)


014. 신념 (1)
2021.03.04.


너무 놀란 민우는 왜 그러냐고 되묻지 못했다.

벙어리처럼 가만히 서 있는 민우를 향해 민식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어깨를 꽉 잡혔다. 으스러질 것 같이 아팠다.

“너 강철훈 선생님 프로젝트에 들어갔다는 소문이 있던데 사실이냐?”

“네?”

민우는 그제야 속으로 아차 싶었다.

최민식이 왜 화가 났는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맞습니다.”

“왜 그랬어?”

“그게…….”

변명을 하려던 민우는 머릿속에서 수빈의 이름을 완벽히 지웠다. 지금은 그녀를 끌어들일 때가 아니다.

“우연히 번역 프로젝트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좋은 공부가 될 것 같아서 테스트를 봤고, 운 좋게 들어가게 됐습니다.”

“운이 좋아? 구구절절하구만. 너 이 새끼, 번역 좀 한다는 소리 들으니 우쭐한 마음에 여기저기 찔러보고 다닌 거냐?”

“아닙니다.”

“아니긴 뭐가 아냐?”

민식이 멱살을 움켜쥐었다. 헉 하는 신음이 민우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민 선생님 일은 도와드리지 못할망정 다른 전공 선생님한테 가서 빌빌대고 알바비나 벌고 있냐? 국문과 존심도 없어?”

“다른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비교문학도 제 공부에 도움이 되는…….”

“지금 그런 걸 따지려고 하는 게 아니잖아? 아직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엉? 석사 나부랭이가, 학생증에 잉크도 안 마른 놈이 왜 다른 전공 선생한테 가서 비비적대는 거냐고. 이 미친 새끼야.”

미친 새끼?

도를 넘어선 언행에 민우의 눈이 차갑게 식었다. 죄송합니다, 한마디를 준비하던 그의 입이 굳게 닫혔다.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인데 왜 욕을 먹어야 해?’

근본적인 의문이 들었다.

그래서일까. 가만히 물러날 수가 없게 되어 버렸다.

“일단 이거 놓으시죠.”

탁.

민우는 힘으로 손을 뿌리쳤다. 반항할 줄 몰랐던 것인지 민식은 당황했다.

“허, 이놈 봐라? 너 지금 반항한 거냐?”

“반항이 아니라 놓고 말씀하시라는 겁니다.”

민우는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바로 했다. 주눅 들지 않고, 그의 앞에 당당히 섰다.

“하나 여쭙겠습니다. 강철훈 선생님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게 왜 미친 짓입니까?”

“그걸 말이라고 물어? 넌 국문과고 민 선생님 지도 학생이야. 언제나 준비된 자세로 기다리고 있어야 하는 게 지도 학생의 도리 아니냐?”

“그 준비, 충분히 했어요.”

“뭐라고?”

냉소.

민우가 차갑게 웃었다.

“오히려 도중에 기회를 빼앗아 간 건 선배들이지 않습니까? 타 대학 출신이라 BK21에서 짤린 거 제가 모를 줄 알았습니까? 돌대가리라도 그 정도 눈치는 있습니다.”

Brain Korea 21.

정부 차원에서 진행되는 학문 육성 프로젝트의 총칭이다.

명인대 국문과도 BK21 지원 사업에 선정되어 몇몇 프로젝트가 진행 중이다.

선정된 프로젝트에 연구원으로 이름을 올리게 되면 석사급은 50만 원, 박사급은 90만 원을 매달 지원받는다.

사실 과외를 하나 하는 게 더 이익일 정도로 금액은 적지만, 전공과 관련된 연구 과제를 수행하면서 지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경쟁이 치열하다.

“그건 당연히 감수해야 하는 거지. 세상이 불공평한 거 모를 나이는 아니잖아?”

“그래서 제 갈 길 알아서 찾겠다는 겁니다. 떨어지지도 않을 먹이 먹으려고 입 벌리고 앉아 있을 필요 없잖아요.”

“할 말은 그걸로 끝이냐.”

“더 있습니다. 전에 술집 앞에서 저한테 그러신 적 있죠?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라고. 빨리 대학원 정리하는 게 나을 수도 있다고.”

민식은 잘 기억나지 않는 듯한 눈치였다. 민우가 논문 프로포절 때라는 말을 덧붙이자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랬었지. 그래서?”

“전 그 말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중간에 말 끊고 도망간 거였군.”

민우는 바닥에 떨어진 가방을 들어 먼지를 털었다. 민식은 분노를 넘어 싸늘하게 식은 눈으로 민우를 노려보고 있다.

상황은, 이미 갈 데까지 치닫고야 말았다.

“전 꼭 성공할 겁니다. 이곳에서 박사학위까지 받을 거고요. 낙제생, 천덕꾸러기, 3류대 출신…… 이 불명예스러운 별명들이 없어질 때까지 피땀 흘려 노력할 거라고요. 도와달라고는 하지 않겠습니다. 저도 염치란 게 있으니까요. 하지만 제발, 부탁인데 절 좀 가만히 내버려 둬 주세요.”

침묵이 흘렀다.

민식은 팔짱을 낀 채 민우를 노려보고 있었다. 분노로 가득했던 눈빛은 어느덧 차가운 냉기를 품었다.

민우도 지지 않았다.

민식이 냉정히 바라보고 있다면, 민우는 반항하듯 뜨거운 눈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박민우.”

“네, 선배님.”

“하나 확실히 하자. 방금 너 분명 네 길 알아서 찾겠다고 했지?”

“예.”

“그래. 자알 알았다. 민 선생님께 그렇게 전해주도록 하마. 많이 안타까워하실 거야. 제자가 품에서 떠나 혼자 길을 가겠다고 하니까.”

조롱이 섞인 어조였다. 민우는 말이 통하지 않을 상황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먼저 가보겠습니다.”

민우는 꾸벅 인사를 하고 세미나실을 나섰다. 문이 닫히자마자 콰당, 책상과 의자가 구르는 소리가 안에서 들렸다.

그 소리가 방아쇠가 되어 민우는 이성을 되찾았다.

‘큰일 났다.’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일을 크게 만들어버렸다. 그냥 그 상황에서 죄송하다, 앞으로 그러지 않겠다고 하면 끝났을지도 모를 일인데.

‘아니. 과연 그걸로 끝날 문제였을까?’

민우는 이를 꽉 깨물었다. 곧 답을 얻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프로젝트 당장 그만두라고 명령했겠지. 강 선생님은 앞으로 부딪힐 일 별로 없는 사람이니까. 버려도 된다는 식의 논리로…….’

사실 중요도로 따지면 민 교수가 압도적으로 우위에 있다. 민우의 미래를 좌우하는 것은 민 교수다. 민식은 그의 오른팔이고.

‘민식 선배의 말도 어느 정도는 일리가 있어. 하지만.’

민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공부를 하러 대학원에 온 거야. 라인을 타서 교수가 되려고 온 게 아니라고!’

그러나 그 마음속 외침은 공허해졌다.

현실은 그리 만만하지 않다는 걸 민우도 잘 알고 있었던 탓이다.

교수가 되지 못하면, 적어도 연구교수라도 되지 못하면 학계 활동하기가 어려운 것이 현실이었다.

아니, 학계 활동 전에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워진다.

대한민국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학문을 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교수 직함이 필요하다. 특히 인문학 분야는 텃새도 심하다.

그렇다면 교수가 되려면 어떤 것이 필요할까. 박사학위? 아니다. 그 외적인 것들이 더 많이 필요하다. 인맥, 재산, 출신.

‘민 선생님의 도움을 받아도 모자란 판에 내가 내 길을 가겠다고 공언을 해 버렸으니…….’

이번 일은 위기다.

민식이 중간에서 어떻게 이야기를 부풀릴지는 모르겠지만, 여차하면 민 교수의 추천서가 송두리째 날아갈 상황인 것이다.

일이 커지면 박사과정 입학 자체가 물거품으로 돌아갈 수도 있다. 민 교수가 거부권을 행사하면 입학이 불가능하게 된다.

민우는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어떻게 해결해야 하지? 아니,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이긴 한 거야?’

문득 서지훈 교수의 얼굴이 떠올랐다.

고개를 가로젓는 민우.

이런 일로 전화해서 폐를 끼치고 싶지는 않았다. 명인대 입학을 위해 서 교수의 추천서를 받은 것만으로도 이미 큰 폐를 끼친 상황이다.

이럴 때 학교에 선배들이 있다면 마음 터놓고 상담을 할 터인데, 타 대학 출신인 민우에게 선배 노릇을 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결국, 떠오르는 얼굴은 하나뿐.

‘진섭이 불러서 술이나 까야 하나.’

그런 고민을 하며 계단을 내려갈 때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빠.”

명인대학교에서 민우를 오빠라고 부르는 사람은 몇 없다. 몸을 돌린 민우의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이수빈이었다.

“아직도 집에 안 가고 있었어?”

“보다시피 일이 좀 남아서요. 연주는요?”

“아까 집에 갔지.”

“일찍 헤어졌네요. 술 한잔할 줄 알았는데. 근데 표정이 왜 그래요? 나라 잃은 사람 같네.”

나라 잃은 사람 맞아.

하지만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아무 일도 아냐.”

“거짓말하지 마요. 나 큰일 났다. 이렇게 얼굴에 다 써 있는데 뭘.”

민우는 피식 웃었다.

“돗자리 깔아도 되겠다 너.”

“민 선생님한테 혼났어요? 아니면 연애 고민? 아, 오빠 모쏠이라고 했지. 미안해요. 내가 너무 나갔네. 아무튼, 괜찮으면 내가 들어줄게요.”

민우는 핸드폰을 도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오늘은 진섭이가 필요 없을 것 같았다.

“일 많은 건 아니고?”

“복사물만 연구실에 놔두면 퇴근이에요. 오히려 바쁜 건 오빠잖아요.”

“가볍게 쐬주나 한 잔 걸칠까?”

“1층에서 기다려요. 금방 다녀올게요.”

“그래.”

민우는 계단을 내려가는 수빈의 뒷모습을 은근히 바라보았다.

이렇게 신경을 써 주는 건 고마운 일이긴 하지만, 그 속내를 잘 알 수가 없을 때가 종종 있다.

왜 이렇게 잘 챙겨주는 걸까?

내세울 것 하나 없는 평범한 사람에 불과한데.

처음에는 경계했지만 민우는 그것이 의미 없음을 알았다. 그녀는 순수했고, 천성이 착해 누군가를 이용할 사람은 아니었던 것이다.

‘오히려 그 반대라면 모를까.’

그런 생각을 할 무렵 가방을 든 수빈이 1층으로 내려왔다.

두 사람은 정문을 나서 단골 포차에 들어갔다.

민우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학생들이 많아 소란스러웠던 것이다. 다들 거나하게 취해 게임을 하거나 소리를 치고 있었다.

“날을 잘못 잡았나? 왜 이렇게 애들이 많아.”

“시험 끝났잖아요. 그러니까 술 마셔야지.”

“중간고사 끝났으면 기말고사 준비를 해야지 술을 마시면 쓰나.”

“농담 좀 그렇게 진지하게 하지 마요. 아재 같아.”

입학 전, 민우는 명인대생들은 술도 안 마시고 공부만 할 줄 알았다. 그런데 전혀 아니었다. 오히려 진짜 놀 줄 아는 학생들이 많았다.

지금도 그랬다. 명인대 근처엔 특히 술집이 많은데, 지금은 어딜 가도 학생들로 붐빌 것 같았다.

수빈이 민우의 팔을 은근히 붙잡았다.

“그냥 다른 데로 옮길까요? 오빠 소란스러운 거 안 좋아하잖아.”

“됐어. 귀찮아. 일단 앉자.”

민우와 수빈은 구석에 난 자리를 잡고 앉았다. 소주 두 병과 골뱅이 안주를 시켰다.

주변에 앉아 있던 남학생들이 수빈을 힐끔거리며 쳐다봤다. 객관적으로 봐도 수빈은 예쁜 편에 속했다. 한때 국문과 여신이라 불리기도 했다.

민우가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애들이 네 번호 따갈 기세인데?”

“걱정할 거 없어요. 흔한 일이고, 저 그렇게 쉬운 여자 아니니까.”

“뭐래. 걱정 한 개도 안 하는데.”

“치이.”

수빈은 입술을 툭 내밀었다. 그 사이 술과 기본안주가 나왔다. 민우는 바로 술병을 열고 잔을 채웠다.

수빈이 술로 가득 찬 술잔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둘이 술 마시는 건 되게 오랜만이네요. 아니, 아예 처음인 것 같은데. 그쵸?”

“어? 그랬나?”

“늘 섭이 오빠랑 셋이 마시니까요. 이런 것도 색다르고 좋네. 자. 짠해요.”

두 사람은 가볍게 잔을 부딪치고 술잔을 비웠다. 이번에는 수빈이 민우의 잔을 가득 채워 주었다.

“그래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요?”

“그냥…… 민식 선배랑 좀 말다툼했어.”

“민식 선배랑? 무슨 일로요?”

민우는 조금 전에 있었던 일을 솔직히 말했다. 내일이면 학과 내에 파다하게 소문이 날 일이라 굳이 감출 필요도 없었다.

잠시 후 얘기가 모두 끝났다.

민우는 수빈이 한심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볼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그녀는 해맑게 웃고 있었다.

“잘했어요. 역시 오빠답네!”

민우는 잘못 들었나 싶었다. 주변이 워낙 시끄러웠으니까.

“잘했다고?”

“네. 잘했어요. 정말.”

“나 민 선생님한테 완전히 찍히게 생겼는데도?”

“그래도 옳은 말을 한 건 오빠잖아요.”

옳은 말을 한 건 오빠다.

그 한마디가 묵직하게 마음에 와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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