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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3. 외서 번역 프로젝트 (3) (13/500)


013. 외서 번역 프로젝트 (3)
2021.03.01.


“그럼요. 학부 때 교양 수업 몇 번 같이 들은 적 있어요. 관심사가 비슷해서 과목이 겹쳤죠.”

“인문대 참 좁네.”

그때 슬쩍 다가온 수빈이 민우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그리고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빠 운도 좋다. 귀엽고 어린 친구랑 같이 일도 하고.”

“귀엽고 어린 게 일하고 뭔 상관이냐?”

“능률이라고 해야 하나. 사기? 뭐 그런 게 높아지지 않겠어요?”

분명한 질투심이 느껴졌다.

난처했던 민우는 진섭에게 도움을 청하려 했는데 그는 그 나름대로 진지한 상황이었다.

“남친 있대?”

“그걸 내가 어떻게 아냐.”

“물어봐. 당장. 롸잇 나우.”

피로감을 느낀 민우는 일단 두 사람을 올려보냈다. 물어보겠다는 조건을 달지 않았으면 진섭은 끝까지 버텼을 것이다.

‘진섭이는 그렇다 치고, 수빈이는 연주의 정체를 모르는 건가? 아니면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건가? 알 수가 없네.’

혼자 그런 생각을 하며 자리로 돌아온 민우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을 꺼냈다.

“미안하다. 좀 수다스러운 친구들이라서.”

“괜찮아요.”

“그 전에 말이다. 뭐 하나 물어봐도 돼?”

민우는 테이크아웃 컵을 만지작거리며 어렵사리 질문을 던졌다.

“너 남자친구 있어?”

연주는 깜짝 놀랐다.

곧 그녀의 볼이 빨갛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젠장. 민우는 속으로 진섭을 욕했다.

“아뇨…… 없어요.”

“그렇구나. 참, 오해는 하지 마. 아까 봤던 내 친구가 좀 물어봐달라고 해서. 미안! 이제 시작하자.”

연주는 회의 준비를 끝내 놓은 상황이었다. 원서와 프린트물이 테이블 위에 놓여 있다.

원서에 포스트잇 플래그가 잔뜩 붙어 있었는데, 꼼꼼한 성격을 보여주는 듯했다.

민우도 원서와 번역물을 꺼냈다. 연주에 비한다면 초라할 정도로 없어 보였다.

그래도 자신은 있었다. 안경과 만년필의 도움을 받아 번역했으니까.

“먼저 바꿔서 읽어볼까?”

“좋아요.”

민우는 기대감을 느끼며 연주의 작업물을 손에 쥐었다.

연주의 번역은 정석적이었다. 으레 번역된 이론서에 흔히 있는 번역투 문장이 좀 보였다.

그것 외에는 단점으로 지적할 만한 게 없었다.

특히 민우의 이목을 끈 것은 각주였는데, 꽤 꼼꼼하게 설명을 넣어 이해를 돕고 있었다.

민우는 감탄했다.

이게 정말 스물세 살의 번역이란 말인가?

‘어지간한 내공이 없이는 불가능한 기술법이야. 어린 나이에 대단하다.’

안경이 없었다면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실력이었다. 민우는 순간 초라해짐을 느꼈지만 마음을 다잡았다.

‘그런데 용어 부분에서 좀 다르게 해석한 부분이 많네. 통일하려면 애 좀 먹겠어.’

민우는 형광펜으로 충돌이 예상되는 부분을 체크했다. 원문도 다시 한번 읽어보았다.

일련의 과정을 끝낸 민우는 연주를 기다렸다. 그녀는 한 글자씩 머리에 새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집중해서 읽었다.

‘종이 뚫어질 정도로 꼼꼼히 읽네.’

그녀가 손에서 프린트를 내려놓은 것은 민우의 커피잔이 모두 빌 무렵이었다.

“어땠어?”

“……완벽해요.”

그 한마디를 하고 난 뒤 연주는 말을 잇지 못했다. 민우에게는 예상됐던 반응이었다.

“제가 번역한 게 부끄러울 정도예요. 문장도 매끄럽고 잘 읽히고 머릿속에 쏙쏙 들어오고…….”

“칭찬이 너무 과한데?”

“아뇨, 정말…… 정말 잘하셨어요.”

민우를 바라보는 연주의 눈빛이 바뀌었다. 처음에는 약간의 경계심이 섞여 있었는데, 지금은 그것이 사라진 느낌이었다.

약간이긴 하지만 호감도 보였다.

‘맞아. 안경.’

그제야 민우는 자신이 안경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안경을 끼면 상대방의 눈빛을 어느 정도 읽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나 지금 연주한테 인정을 받은 거지?’

민우는 흡족한 기분을 만끽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 그는 곧 평정심을 되찾고 펜과 프린트를 들었다.

“용어 부분에서 좀 많이 갈리는 거 같은데 하나하나 차근히 풀어보자. 일단 여기 recounting과 telling부분. 롤랑 바르트의 용어지? 이탤릭이 되어 있으니.”

“맞아요. Introduction to the Structural Analysis of Narratives라는 페이퍼에 언급이 된 용어인데요, 표면적인 의미로 해석을 할 수는 없어서 ‘재진술’과 ‘전달’로 번역을 했어요.”

민우는 잠시 고민했다.

롤랑 바르트는 프랑스의 구조주의 비평가인만큼 그의 용어를 이해하는 것은 전공자인 연주가 훨씬 나을 거라는 판단이 들었다.

배경 지식이 부족한 탓에 딱히 더 좋은 용어가 생각이 나지 않았던 탓도 있고.

민우가 결정했다.

“그럼 그걸로 가자.”

“그래도…… 괜찮아요? 너무 쉽게 결정을 하시는 건. 오빠가 쓴 용어도 나쁘지 않은데요.”

“어쨌든 그 부분은 나보다 네가 더 잘 이해하고 있잖아. 문제가 있다면 강 선생님이 조정을 해 주실 테니 걱정하지 말고.”

“…….”

연주는 살짝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부족한 부분을 솔직히 인정하면서도 상대방을 존중하는 그 모습에 감명을 받았다.

그렇게 민우와 연주는 두 시간 정도를 할애하여 용어를 통일했다.

“고생하셨어요.”

“너도.”

“완성본은…… 제가 작업해서 내일 강 교수님 메일로 보내 놓을게요.”

“땡큐.”

두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마침 폐점 시간이라 주변에는 청소하는 점원 외에 사람이 없었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흘렀나.’

민우가 물었다.

“집으로 바로 가지?”

“예. 오빠는요?”

“도서관 가서 공부 좀 더 하다 가려고. 그럼 조심해서 들어가라. 오늘 수고 많았어.”

“저기…….”

연주가 뜸을 들였다. 돌아서려던 민우는 뭘까 하고 다음 이야기를 기다렸다.

“오늘 많이 배웠어요. 오빠 덕분에…….”

“나 덕분에? 뭐를?”

“저는 지금까지 문장이나 어투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오빠의 번역을 보니 뭐랄까…… 읽는 사람을 편안하게 해 준다는 걸 느꼈어요. 그래서 그것도 중요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요.”

“국문과 출신이 글 하나 쉽게 못 쓰면 쪽팔리잖아. 오히려 내가 더 많이 배웠어. 이론적인 부분은 네가 더 단단하잖아.”

“그게…… 그냥 제 관심사가 마침 그쪽으로 겹친 거라서. 운이에요.”

“운도 실력이다.”

연주는 입을 가리며 작게 웃었다. 다른 남자들과는 이야기를 오래 하기가 불편한데, 이상하게 민우와의 대화는 편했다.

그래서 그럴까. 뭔가 아쉬움이 들기도 했다. 그와 동시에 다음 만남이 기다려지기도 했다.

연주는 두 손으로 가방을 쥐고 허리를 꾸벅 숙였다.

“그럼 먼저 들어갈게요.”

“그래. 조심해서 가라.”

연주와 헤어진 민우는 도서관으로 걸어가며 진섭에게 톡을 하나 보냈다.

― 연주 남친 없댄다

한진섭: ㅇㅋ 번호

― 잠이나 자

진섭에게 바로 전화가 왔다. 민우는 가볍게 무시하고 도서관 안으로 들어갔다.

‘그냥 재벌 3세라고 얘기해 버릴까? 그럼 쉽게 포기할 텐데. 아니지. 그건 연주가 바라지 않는 일이니까 얘기하면 안 되겠다.’

시험 기간이 끝났음에도 도서관 안은 여전히 복작거렸다. 상아대는 이렇지 않았는데, 역시 명인대는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민우는 우선 자판기 커피 한잔을 뽑아 늘 앉던 자리로 갔다.

‘누나가 내일 온다고 했던가? 준비를 좀 해놔야겠네.’

커리큘럼은 이미 짜 놓았기 때문에 특별히 준비할 것은 없었다. 누나는 기본기가 있어서 가르치는 데 크게 어렵지 않을 것이다.

영어 관련 책을 자리에 하나씩 쌓는 민우. 문득 그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일을 너무 많이 벌이는 것 같은 느낌이 드네.’

일단 누나의 일이 떠올랐다. 과외에 편입까지 도와줘야 하니 제법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래도 누나 일인데 힘닿는 데까지 도와줘야지. 누나가 아니었으면 이렇게 편하게 공부 못했지.’

다행스러운 건 이수빈이 가람대 입시 관련 자료를 모아 준 것. 그녀의 아버지가 국제통상학과 교수니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사실 누나의 일은 그리 난도가 높지 않다. 시간만 투자하면 되는 문제였으니까.

하지만 강철훈 교수의 프로젝트는 비중이 좀 다르다. 게임으로 치자면 메인 퀘스트. 약 한 달 정도는 주말을 반납해야 할 것이다.

게다가, 최근 새로운 일 하나가 더해졌다.

공모전.

학문의 깊이에 도움이 될 만한 이벤트는 아니지만, 관련 분야의 논문을 학우들과 함께 쓴다는 것은 분명 색다른 경험이었다.

‘정신없긴 해도 뭔가 이 녀석들을 만난 이후로 일이 잘 풀리고 있는 느낌이야.’

민우는 미소를 지으며 안경을 고쳐 쓰고 만년필을 한 바퀴 돌렸다. 믿을 수 없는 능력이 눈앞에 펼쳐졌다. 자신감이 충만했다.

마치 지금까지 노력한 것에 대해 하늘이 보답이라도 해 준 느낌.

‘이대로라면 금방 성장할 수 있겠어.’

민우는 10년 뒤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마이크를 들고 강단에 서서 학생들에게 지식을 나눠주는 모습이 제일 먼저 떠올랐다.

또한, 수많은 논문과 저술을 집필해 각종 상을 휩쓸어 저명한 학자가 되는 모습도 그려졌다.

이어 세계 각국을 돌아다니며 학회와 세미나에 참석해 여러 학자와 교류를 하는 모습도.

마지막으로 모두의 심금을 울리는 명저를 남겨 노벨문학상을 타는 상상을 하기에 이르렀다.

대한민국 최초의 노벨문학상 수상자.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지만, 꿈꾸는 것만으로도 민우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그려졌다.

‘갈 길이 멀긴 하지만 오늘도 힘내봐야지. 노력은 스스로를 배신하지 않으니까.’

드르르르.

그때 진동이 한 번 울렸다. 진섭이 또 귀찮게 하는가 아닌가 싶어 인상을 찌푸렸는데, 이름을 보곤 흠칫 놀랐다. 최민식 선배에게서 톡이 온 것이다.

‘이 시간에? 뭔가 불길하다.’

아니나 다를까.

― 지금 당장 대학원 세미나실로 와.

민우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대체 무슨 일이지?’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미루어 볼 때, 그가 좋은 일로 자신을 부른 적은 없었다. 이번에도 그럴 가능성이 컸다.

대학원에 행사가 있는 날도 아니었다. 전체 소집이라면 이렇게 개인 톡으로 메시지를 남기지도 않았을 터.

― 지금 바로 가겠습니다.

일단 민우는 바로 답장을 한 다음 자리에서 일어섰다.

처음엔 걸어갔지만, 왠지 모를 불안감 때문에 뛰기 시작했다. 채 5분도 되지 않아 민우는 인문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지체 없이 대학원 세미나실 문을 열었다. 안에는 최민식이 팔짱을 끼며 인상을 쓰고 있었다.

‘느낌이 안 좋은데?’

누가 봐도 화가 나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민식은 민우가 들어오자마자 소리를 꽥 질렀다.

“야 이 새끼야! 너 제정신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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