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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2. 외서 번역 프로젝트 (2) (12/500)


012. 외서 번역 프로젝트 (2)
2021.02.26.


컴퓨터 앞에 앉은 민우는 안경을 썼다. 그 옆에는 < The Oxford Introduction to Narrative >가 펼쳐져 있다.

민우는 눈에 보이는 그대로 활자를 컴퓨터에 옮겨 담았다.

말 그대로 기적과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타닥타닥―

명인대 중앙도서관의 정보열람실에는 민우의 타이핑 소리가 끊임없이 울렸다.

한 챕터를 번역하는 것엔 일주일 이상의 시간이 필요하다. 부지런하게 한다면 약 사흘 정도. 그런데 민우는 그것을 단 한 시간 만에 해치우고 있는 것이다.

‘다 됐다.’

민우는 완성된 서론 번역본을 저장해 메일로 보냈다. 이어 인쇄를 걸어놓고 기지개를 쭉 켰다.

단순히 번역만 끝난 게 아니었다.

민우는 지적 충만감에 사로잡혔다. 그의 머릿속에 방금 번역한 원서의 지식이 고스란히 옮겨 담긴 것이다.

‘곧 저녁 시간이네. 수빈이한테 잔소리 듣기 전에 서둘러야겠다!’

민우는 도서관에서 나와 인문관 307호로 들어갔다.

마침 수빈과 진섭의 모습이 보였다.

그런데 두 사람은 모니터를 뚫어지라 쳐다보며 뭔가를 수군거리고 있었다.

“뭐 좋은 거라도 떴냐?”

“아, 오빠. 마침 잘 왔어요.”

민우는 가방을 내려놓고 두 사람이 앉아있는 뒤편으로 돌아갔다.

모니터 안에 포스터가 하나 띄워져 있었다. 진섭이 마우스를 움직여 민우가 첫 페이지를 볼 수 있게 했다.

“논문 현상 공모?”

“인문학 장려 방안에 대한 논문을 공모한다는 내용이야. 전국 규모고 주최기관은 한국연구재단이다. 지원 자격은 학부 재학생 이상. 팀 참가 가능. 마감은 6월 30일까지. 약 두 달 남은 셈이지.”

진섭이 가뿐히 요약했다. 민우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흥미로운 주제였던 것.

진섭이 기지개를 켜며 의문을 표했다.

“공모전 열어서 장려 방안 모으면 뭔가 세상이 달라지려나? 인문학은 입문학이 된 지 오랜데.”

“그럴듯한 힐링 철학을 내세워야 책이 팔리는 시대니까. 교수 타이틀을 얻지 않는 이상 입에 풀칠도 어려울 거야.”

“그러게 말이다. 죽은 자식 고추 만진다고 어떻게 되는 것도 아닐 텐데.”

진섭의 마지막 농담에 이수빈이 인상을 찌푸렸다.

“오빠들! 인문학 하는 사람들이 그런 재수 없는 소리 해도 되는 거예요?”

“너는 어째 똑똑한 애가 농담 진담 구분을 못 하냐.”

민우가 구박하자 꼬리를 내리는 수빈. 이상하게 그녀는 민우에게 약했다.

“아무튼 빨리 정해요. 팀 짜야 하니까.”

“팀? 너 혼자 해도 상 탈 수 있으면서 뭘 그래. 명인대 최고의 브레인인데. 굳이 같이 해서 상금 나눌 필요 있어? 오히려 논문의 정밀도만 떨어질 것 같은데.”

민우의 일침에 수빈이 움찔했다. 하지만 그녀는 굴하지 않고 민우를 포섭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어떻게 보면, 논문 공모에 참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민우와 얽히는 게 목적인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논문 현상 공모는 아이디어 싸움이라고요. 물론 오빠 말처럼 한 사람이 쓰는 논문이 일관성은 더 있겠지만, 방안에 대한 연구라면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중요할 거고.”

“그러니까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아무나 쉽게 낼 수 있는 거냐고.”

“어…… 그건.”

“뭔가 달달한 걸 먹으면 떠오르려나? 이수빈. 거 비싼 거 혼자 먹지 말고 좀 나눠 먹자.”

민우의 능글맞은 한마디에 수빈은 한숨을 내쉬며 초콜릿을 가방에서 꺼냈다. 아까 민우에게 자랑한 게 화근이었다.

초콜릿을 한입에 털어 넣으며 민우가 물었다.

“섭. 상금은?”

“1등 5백만 원. 2등 3백만 원. 3등 백만 원. 장려상 50만 원.”

“5백을 어떻게 나눈다. 내가 250만 원 먹으면 되냐?”

“아니 무슨 오빠가 5할씩이나 먹어요?”

민우는 웃으며 엄지를 들어 자신의 가슴께를 가리켰다.

“내가 리더니까.”

두 사람은 입을 꾹 다물었다.

맞는 말이었다. 서로 알게 된 지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늘 셋이 모일 때마다 민우가 리더 역할을 했었으니까.

“아무튼, 그건 상을 탄 다음에 고민해도 늦지 않으니 팀 이름이나 정하죠.”

“아니. 분배율은 미리 정해야 해. 공증 안 받으면 돈 가지고 싸운다. 백 퍼센트.”

“솔직히 말하면 전 돈 관심 없어요. 그냥 오빠들이랑 해보고 싶어서 하는 거지. 정 안 되면 오빠들이 둘로 나누세요.”

민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돈은 분명 민감한 문제다. 혈육의 정도 간단히 갈라버리는 것이 바로 돈이다.

“30퍼센트씩 먹고 나머지 10퍼센트는 회식 값에 보태자. 공증하면 구차해지니까 생략. 대신 서로 믿고. 오케이?”

“좋아요.”

“찬성.”

고개를 끄덕인 민우가 물었다.

“팀 이름은 뭐로 하지?”

“홍길동 어때? 서자의 인생역전 스토리를 우리가 현대에서 재현하는 거야.”

“뇌는 장식이냐? 수빈이는 서자 아니잖아.”

“아 그렇지 참.”

수빈은 풋 하고 웃었다. 이 두 사람은 보고 있으면 언제나 유쾌하다. 자신을 깎아내리면서 남을 즐겁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이번에는 화살이 수빈에게 돌아갔다.

“웃지만 말고. 넌 뭐 기깔나는 이름 생각 안 나? 좋은 머리 이런 데에다 좀 써 봐.”

“흐음, 해바라기 어때요?”

“청승맞아 보여. 서정시 쓰냐?”

수빈은 볼을 부풀리며 삐친 눈으로 민우를 노려보았다. 그때 턱을 괴고 생각에 잠기던 민우가 손가락을 딱 튕겼다.

“307호.”

“307호요? 무슨 의미예요?”

“그러게. 좀 뜬금없는데?”

307호는 지금 민우와 동기들이 있는 석사 연구실의 호수였다.

“우리가 처음 만난 곳. 그리고 우리가 처음으로 팀을 결성한 곳. 그걸 기념하려는 이름이야. 어때? 좋지?”

뜻을 들으니 그럴싸했다. 뭔가 마음이 뭉클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수빈과 진섭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럼 그걸로 해요.”

“나도 찬성.”

그렇게 팀 307호가 결성되었다.

하지만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많이 남았다. 민우가 그중 하나를 지목했다.

“그래서, 연구방법론은 어떻게 세울 생각들이야? 나 오기 전에 대강 이야기 나눴을 거 아냐.”

“특별한 얘긴 안 했어. 지금부터 시작해야지. 전통적인 연구방법이라면 역시 인문학의 역사부터 논해야 하지 않을까?”

진섭이 그럴듯하게 말했으나 민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인문학의 역사를 논하는데 논문 하나로 될 거 같냐? 이번 연구는 실용적인 차원에서 접근해야 해. 뜬구름 잡는 얘기는 안 된다.”

잠시 뜸을 들인 민우가 핵심을 짚었다.

“논문이 아니라 프로모션이라고 생각해야 해. 광고하듯 써야 한단 얘기야.”

“너무 모험 아녜요?”

“뭐, 그럴 수도 있겠지.”

“그래도 논문 공모인데. 보수적인 교수들이 심사를 하면 좀 곤란해질 가능성이 있잖아요.”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이라는 말 알지? 기왕 할 거면 5백만 원 노리고 하는 게 나아. 어설프게 50만 원 먹을 바에는.”

수빈이 수긍했다. 그때 진섭이 손목시계를 툭툭 두드렸다.

“말씀 중에 죄송합니다만 저녁 시간입니다. 나머지 얘기는 밥 먹으면서 하자고. 어디로 갈까?”

“어딜 가. 서민은 학식이나 가야지 별수 있나.”

“응? 왜 갑자기 서민 타령이냐?”

민우는 쓴웃음을 지으며 먼저 307호를 나섰다. 진섭과 수빈은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할 뿐이었다.

* * *

시간이 흐르고 약속한 금요일 저녁이 찾아왔다. 민우는 인문관 1층에서 연주를 만났다.

“저녁은?”

“아직…….”

“그럼 밥부터 먹자. 뭐 먹을래?”

연주는 쉽게 대답을 하지 못했다. 대개 이런 성격은 선택 장애가 있기 마련이다.

민우는 서로 부담 없는 학식으로 결정을 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민우만 부담이 없었다. 고급스러운 음식에 익숙한 연주는 다른 의미로 부담이 있을 것이다.

“많이 먹어.”

“예. 오빠도요.”

연주를 만나기 전에 민우는 생각을 많이 했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이랬다.

평소처럼 대해주는 것. 대한그룹 손녀딸이 아닌 명인대 학생으로 대해주는 것. 그것이 연주라는 ‘인간’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숨기는 건 더 없지?”

“죄송해요…….”

수저를 내려놓는 모습을 보며 민우는 아차 싶었다. 그런 의미로 한 말은 아니었는데.

“아니, 뭔가 너에 대해서 아는 게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한 말이야. 오해하진 마라.”

“궁금한 거…… 있으세요?”

“많지.”

연주는 민우를 바라보며 눈을 두어 번 깜빡였다. 질문해도 좋다는 의미였다.

“학창시절은 어땠어? 대한그룹 손녀딸이라는 걸 알면 친구들이 쉽게 접근하지 못했을 것 같은데.”

“다들 공부만 하는 분위기라서…… 별로 저한테 신경을 쓰진 않았어요.”

“어디 나왔는데?”

“명인과학고요.”

“아, 과고 출신이었구나.”

민우는 숟가락질을 뚝 멈췄다. 연주의 말에서 뭔가 위화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잠깐, 과학고 출신이라고?”

연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민우는 조용히 수저를 내려놓았다.

“근데 왜 불문과로 진학한 거야? 과학고면 이공계로 가야 하는 거잖아.”

“숫자보다는 글이 좋아서요.”

“집안 반대가 만만찮았을 거 같은데.”

“아무래도…….”

그때가 생각났는지 연주는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녀는 소위 말하는 천재였다.

이미 열일곱 살에 칼텍(Caltech), 엠아이티(MIT), 하버드에 입학 허가를 받았다는 사실을 굳이 밝히진 않았다.

더는 위화감이 드는 걸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학부 때는 물리학을 복수전공 했어요. 그게 한국에서 학교를 다닐 수 있는 조건이었고요.”

“프랑스어와 물리학. 뭔가 기묘한 조합이네. 너도 고생 많았겠다.”

그것으로 잠시 대화가 끊기고 두 사람은 식사에 집중했다.

연주는 무척이나 천천히 먹었기 때문에 속도를 맞춰주는 게 꽤 힘들었다. 그래도 민우는 끝까지 연주를 배려했다.

“참, 번역은 어땠어?”

“그게…… 역시 몇몇 용어들에서 문제가 좀 있었어요. 어렵진 않은데…… 까다로운 것들이 많다고 할까요. 아무래도 번역은 정확성도 중요하지만 보편적인 전달력도 중요하거든요.”

“보편적인 전달력이라.”

별생각 없이 내뱉은 말에 민우가 고민하자 연주는 깜짝 놀랐다. 손으로 입을 막았다. 주제넘은 말을 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죄송해요.”

“아니, 뭐 그런 거 가지고 죄송하다고 해. 대학원생이면 자기 생각을 소신껏 이야기할 줄도 알아야지. 다 먹었으면 일어날까?”

끄덕.

연주가 동의했다.

두 사람은 인문관 지하에 있는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마실 것을 주문하고 돌아서려는데 이수빈과 한진섭이 앞길을 막았다.

“잘생긴 오빠. 난 따뜻한 아메리카노.”

“난 아이스.”

“야. 너희들 진짜 양심도 없냐?”

한숨이 나왔지만 어쩔 수 없었다.

민우는 추가 주문을 하고 카드를 점원에게 건넸다. 피 같은 5000원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커피는 금방 준비되었다. 민우는 추가로 시킨 커피 두 잔을 수빈과 진섭에게 건넸다.

수빈이 고개를 갸웃했다.

“근데 오빠. 왜 네 잔이에요? 심부름?”

“강 선생님 프로젝트 같이하는 동생하고 같이 왔어. 걔 거야.”

“그래요? 누구예요?”

민우는 연주가 앉아있는 쪽을 가리켰다. 수빈의 시선이 닿자 연주가 일어서서 꾸벅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언니. 오랜만이에요.”

“어, 연주구나?”

“아는 사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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