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1. 외서 번역 프로젝트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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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1. 외서 번역 프로젝트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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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1. 외서 번역 프로젝트 (1)
2021.02.25.
민우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잘 부탁해요. 아는 게 많이 없어서 민폐가 될지 모르겠습니다.”
“……아녜요. 저도.”
정연주는 얌전히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딱 봐도 내성적인 성격이었다.
“근데 선생님은 몇 학기예요?”
“……3학기요.”
“와 3학기. 석사죠? 이제 곧 논문 쓰시겠네.”
논문 이야기가 나오자 연주의 표정이 불편해졌다.
하긴, 석사 3학기면 한창 예민할 때지. 언젠가 선배한테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미안해요. 제가 괜한 걸 물어봤네요.”
“……괜찮아요.”
말투가 느릿느릿. 말수도 많아 보이지 않았다. 목소리라도 청아하지 않았다면 조금 답답한 느낌이 들었을 것이다.
‘그래도 같이 일하긴 편하겠어. 묵묵히 자기 일을 해낼 사람 같아 보인다.’
민우는 다시 강 교수를 주목했다. 그가 설명을 다시 시작하려 하고 있었다.
“자 우선 1조부터. 민우 군과 연주 양.”
“예, 선생님.”
“두 사람에게 서론과 챕터 1을 맡긴 것은 일반이론에 강하다고 생각됐기 때문이야. 서로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며 잘 진행해 봐. 좋은 공부가 될 거야.”
“열심히 하겠습니다.”
보통 이론서나 대학 교재의 서두 부분에서는 이론의 배경 등 개략적인 설명이 들어가 있다. 그 부분을 맡은 것이다.
“다음으로 2조. 두열 군과 경훈 군.”
영문학 전공자 두 명은 본론 부분을 맡았다. 테크닉적인 면에서 그들보다 나은 번역을 할 사람은 이 자리에 없었다.
물론 민우가 안경을 낀다면 다른 이야기가 되겠지만.
“3조. 예림 양과 유리 양.”
마지막으로 비교문학 협동과정 학생 두 명은 결론 부분을 맡았다. 전공의 특성을 고려한다면 매우 합리적인 배치였다.
“작업 분배는 이것으로 마치고, 질문이 있는 사람은 얼마든지 해보게.”
모두가 머뭇거릴 무렵 김경훈이 손을 번쩍 들었다.
“선생님. 번역 보수는 얼마나 됩니까?”
“보수는 챕터 당 70만 원. 한 조가 두 명이니까 두 챕터를 번역했다고 가정했을 때 개인당 총 70만 원이야.”
분량에 비해 나쁘지 않은 조건이었다.
물론 제대로라면 원고지 한 매당 금액이 책정돼야 하지만 대학원, 그것도 교수 주도 프로젝트에서 그런 것을 바랄 수는 없다.
“아무래도 금액이 좀 적을 거야. 고생하는 거에 비해서 말이네.”
강 교수가 잠시 고민하다가 말을 이었다.
“그래서 가능하다면 자네들을 역자 리스트에 올리는 방향으로 일을 진행해 볼까 해.”
“역자 리스트에요?”
모두가 깜짝 놀랐다. 생각지도 못한 특혜였다.
강 교수가 고개를 묵직하게 끄덕였다.
“출판사와 협의를 해 봐야 하는 부분이네만 자네들의 노고를 어떻게든 보상해주고 싶군.”
다들 들뜬 표정이었다. 이건 말 그대로 파격적인 일이었다.
일반적으로 문학 계통 서적의 역자나 저자로 이름을 올리기 위해서는 학위가 필요하다. 대개가 박사학위 이상이다.
석사학위도 없는 학생들을 역자 리스트에 올린다는 것은 그만큼 큰일이다. 모험이라고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아마 불가능할 거야.’
민우는 그렇게 단정했다. 언젠가 서지훈 교수가 했던 말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석사과정생들이 번역에 참여했다는 걸 밝히면 번역의 전문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있을 수 있어. 출판사에서 난색을 표하겠지. 판매량에 영향을 끼치니까. 강 선생님의 배려는 고맙지만 불가능할 거야.’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니 다른 욕심이 생기지 않았다. 오히려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이번 프로젝트는 온전히 내 실력 향상의 밑거름으로 삼자. 돈이고 뭐고 다 필요 없어. 오로지 실력. 실력이야!’
민우의 눈이 집념으로 빛났다.
* * *
오리엔테이션이 끝났다.
특별히 오후 스케줄이 없었던 민우는 같은 팀원인 정연주를 불러 세웠다.
“커피 한잔하실래요? 선생님하고 친하게 지내고 싶어서요. 아, 오해는 하지 마세요. 어떻게 해보려는 건 아닙니다.”
민우가 붙임성 있게 제안했고, 연주는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두 사람은 인문관 지하에 있는 카페에 들어갔다. 각자 마실 것을 계산하고 자리를 잡았다.
어색한 기운이 돌기 전에 민우가 질문을 던졌다.
“정 선생님은 학부 때 전공도 프랑스 문학이었어요?”
연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그녀는 뭔가를 고민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실 말씀 있으면 부담 없이 하세요.”
“그게…… 제가 나이가 어려서요. 선생님이라고 하지 않으셔도 돼요.”
보통 석사과정에 들어오면 ‘선생’이라는 호칭이 붙는다. 학교와 계열에 따라 다르지만 명인대에는 그런 전통이 있다.
특히 인문대에 그런 경향이 강했다.
타 학과 대학원생을 지목할 때도 선생이라는 호칭을 붙인다. 상호존중의 원칙 때문이다.
“몇 살이신데요?”
“……스물셋이요.”
“예?”
민우는 깜짝 놀랐다. 스물셋에 석사 3학기라니. 쉽게 계산이 되지 않았다.
“조기 졸업하셨어요?”
연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학석사 연계과정 중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어리시구나. 그래도 선생님은 선생님이죠. 나이가 어리다고 막 대하는 건 저 스스로가 용납을 못 해서.”
“…….”
연주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진심이 느껴졌기에 민우는 한 발자국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알았어요. 그럼 어떻게 부르면 될까요?”
“그냥 편하게 이름으로 불러주세요. 저…… 그…… 박 선생님은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스물여덟입니다.”
“그럼 말씀도 편하게…….”
“그건 불공평하니까 서로 말 편하게 하죠. 제가 나이는 많아도 대학원 학번으로 따지면 후배잖아요. 전 이제 1학기라서.”
민우는 사람 좋게 웃었다. 연주는 얼굴을 살짝 붉히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말을 편하게 하는 건 좀…… 그냥 오빠라고 부를게요.”
“그래.”
민우는 내심 한숨을 돌렸다. 이제야 고비 하나를 넘어선 느낌이었다.
“그런데 왜 번역 프로젝트에 참여했어요? 아, 이건 오빠를 무시하는 게 아니고…… 국문학 전공하시는 분이 팀에 들어온 건 정말…… 오랜만이라서요.”
연주는 자신이 학부 때부터 강철훈 교수 밑에서 번역 프로젝트를 진행해왔다고 덧붙였다.
‘역시 연주도 자대 출신이구나.’
민우는 그럴싸한 대답을 준비해야 했다. 신비한 능력을 얻게 됐다고는 할 수 없으니.
“어학 공부를 하던 도중에 기회가 생겨서 지원하게 됐어. 강 선생님이 좋게 봐 주셔서 프로젝트에 참가할 수 있었고.”
“그러셨구나. 영어 잘하시나 봐요. 강 선생님 되게 깐깐하셔서…….”
“잘은 아니고 그냥 어느 정도 하는 수준이야. 그래서 네 도움이 많이 필요해. 많이 가르쳐줬으면 한다.”
“저도 부족한걸요.”
이제야 연주의 말문이 조금 트였다. 이후로 민우는 작업 방식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용어 정의 문제가 있으니, 1차 작업물을 가지고 이번 주 금요일에 만나자. 서로 바꿔서 읽어보는 게 좋겠어. 여기에서 만나는 게 편하지?”
연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 사이에 어느 정도 유대감이 형성되었다. 민우는 만족했다. 이 정도면 충분히 대화했다는 느낌이다.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할까. 시간 뺏어서 미안해.”
“아녜요. 저도…….”
“다음엔 밥이나 한 끼 먹자.”
밥을 먹자는 제안에 연주는 머뭇거렸다.
대답을 쉽게 듣긴 어려울 것 같았다.
의례적으로 한 말이라 민우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렇게 두 사람은 카페에서 나와 인문관 1층으로 올라왔다.
“집으로 바로 가?”
“아뇨. 도서관에 가려고요. 빌려야 할 책이 있어서…….”
“나도 도서관에 갈까 하는데. 같이 가자.”
두 사람이 인문관 앞 계단을 내려올 때였다.
끼익―
검은색 고급 세단이 계단 앞에 멈춰 앞길을 막았다. 곧 조수석이 열리더니 근사한 감색 양복을 입은 남자가 내렸다.
포마드 스타일의 머리가 돋보이는 남자였다.
30대 후반 정도 되었을까. 안경을 낀 모습이 지적이면서도 냉철해 보였다.
“아가씨.”
그 한마디에 연주의 표정이 심상치 않게 변했다. 예쁜 미간이 찡그려졌다.
“……학교에는 오지 말라고 했잖아.”
“죄송합니다. 연락이 되지 않아서 이렇게 모시러 왔습니다. 용서하십시오.”
포마드 사내가 허리를 90도로 숙였다. 그 모습을 보며 민우는 뒤통수를 얻어맞은 사람처럼 멍해졌다.
마치 드라마에서나 보던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왜?”
“지금 급히 회장님이 찾으십니다.”
“할아버지가……?”
연주가 입술을 깨물었다. 조금 불안해 보였는데, 뭔가 복잡한 사정이 있는 듯했다.
‘귀한 집 따님이었구나. 어쩐지. 옷차림이 예사롭지 않다고 했어. 가방도 비싸 보이고.’
민우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상황 파악은 끝났다.
이곳은 한국 최고의 대학이다. 재벌가 자녀들이 다닌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다. 경영대 쪽에는 셋 중 하나가 재벌 3세라는 얘기도 있다.
‘그래도 불문학을 전공한다니 좀 의외네. 재벌 3세들은 대개 경영 쪽을 전공하지 않나?’
민우가 그런 생각을 할 무렵 포마드 사내가 민우를 노려보았다.
“그런데 이분은 누구십니까?”
날카로운 눈으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살폈다. 마치 취조당하는 듯한 느낌에 민우는 기분이 불쾌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것 봐라?’
서민의 치기라는 표현이 어울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런 게 샘솟았다. 여기서 물러나면 호구가 되는 것이다.
“국문과 박민우입니다. 연주와 같이 일하는 사인데요. 초면에 위아래로 훑어보는 건 좀 실례가 아닐까요?”
“그런 게 아니라…….”
“당하는 입장에서는 굉장히 기분 나쁩니다. 지금 사람 무시하는 겁니까?”
“실례 많았습니다.”
포마드 사내는 허리를 숙였다. 그는 안주머니에서 명함 하나를 꺼내 민우에게 건넸다.
“저는 대한그룹 비서실장 유진태입니다. 불쾌하셨다면 사과드립니다. 앞으로 종종 뵙겠습니다.”
“뭘 종종 봅니까. 연주가 학교에 오지 말라고 했다면서요. 그럼 볼 일이 없어야죠.”
맞는 말이었다. 논리적으로는 전혀 흠결이 없었다.
굳어 있던 연주의 표정이 풀어졌다. 보일 듯 말 듯한 미소가 입가에 걸렸다. 곧 그녀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민우가 이긴 것이다.
보기 좋게 한 방 먹은 유진태는 허리를 꼿꼿이 폈다. 그는 불쾌하다기보다 민우라는 존재에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박민우 선생님. 오늘 많이 배웠습니다. 다음에도 가르침 기대하지요. 자, 아가씨. 차에 오르십시오. 시간이 촉박합니다.”
유진태가 뒷좌석 문을 열었다. 연주는 선뜻 타지 않고 민우의 앞에 섰다.
“미안해요. 오빠…… 놀랬죠? 일부러 숨길 생각은 없었어요.”
“조금 놀라긴 했지만, 아무튼. 뭐 괜찮아. 걱정 말고 들어가라. 가면서 유 실장님 너무 혼내지 말고.”
민우의 마지막 당부에 연주는 또다시 미소를 지었다.
곧 검은색 세단이 유유히 찻길로 빠져나갔다. 그 뒷모습을 보니 왠지 민우는 인생이 공허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나 공부 왜 하니.’
대한그룹이라면 세계적으로도 이름 있는 초일류 기업이다. 그것에 비하니 왠지 자신의 존재가 보잘것없어 보였다.
민우가 허공에 대고 이렇게 중얼거렸다.
“부럽다. 금수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