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0. 가족이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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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 가족이란 (2)
2021.02.22.
“나와서 저녁들 먹어라.”
“네!”
기다리고 기다리던 저녁 시간이 찾아왔다.
갈비찜과 백숙은 한마디로 환상적이었다. 무엇보다도 오랜만에 집밥을 먹을 수 있어서 행복했다.
저녁을 다 먹고 9시 뉴스가 끝날 무렵, 민우는 누나의 방문을 겁도 없이 벌컥 열었다.
“노크하라고 했잖아 이 시키야!”
베개가 날아왔지만 민우는 간단히 피했다.
“뭘 내외하고 그래? 남매끼리. 술이나 한잔하러 갑시다.”
“술은 웬 술. 잠이나 쳐 자.”
“그러지 말고 좀 나와 봐!”
끈질기게 매달린 민우가 누나를 끌고 밖으로 나가는 데 성공했다.
그들의 목적지는 집 근처의 허름한 호프집이었는데, 가끔 고향에 오면 누나와 술을 마시러 오는 곳이었다.
“귀찮게 왜 사람 나오게 만드는 거야. 배불러 죽겠구만.”
“배부를 때 먹으라고 소주가 있는 겁니다. 누님. 사장님! 여기 이슬이 한 병하고 번데기 주세요.”
술이 먼저 나왔고, 민우는 뚜껑을 열고 공손히 술을 따랐다. 그걸 바라보는 민아의 눈엔 의심과 의혹이 가득하다.
“너 용돈 필요해?”
“아니. 갑자기 왜?”
“내 비위 맞춰주려고 여기까지 끌고 나온 게 너무 뻔히 눈에 보여서 말이야.”
두 남매는 잔을 부딪치고 단숨에 술을 비웠다. 민우는 히죽 웃으며 누나의 상황을 분석했다.
“누나 성격에 엄마한테는 못 말했을 거 같고. 또 타지 생활하느라 친구도 별로 없잖아. 쌓인 게 많아 보여서 이 동생님께서 친히 들어주려고 그랬지.”
“아이고, 눈물 나게 고맙네 그냥.”
비꼬는 어조. 그래도 언제 동생이 이렇게 컸나, 민아는 술을 따르며 그런 생각을 했다.
“회사에 무슨 일 있지? 내 명석한 두뇌에 따르면…… 업무와 관계없는 일에 관심을 둔다는 건 부서 이동이나 이직을 고려한다는 건데. 그 외엔 영문 계약서를 읽을 이유가 없을 테니까.”
“쓸데없이 눈치만 빨라서는. 그래. 맞아. 명석한 두뇌라는 말 빼고. 이직 준비 중이야.”
“승진 안 시켜줘서? 하긴 누나 주임 단 지 7년이 지났던가.”
민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술을 쭉 들이켰다.
“그놈의 대학 졸업장이 뭔지…… 나보다 늦게 들어온 친구 하나가 이번에 대리를 달았어. 걘 4년제 졸업했거든. 그러니까 일할 맘이 안 생기더라고. 나름, 열심히 해왔는데.”
“회사가 잘못했네. 우리 누나의 엄청난 능력을 몰라주고.”
“알면서도 모른 척하는 거겠지?”
어쩌면 그게 정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 사회의 일면을 엿본 것 같아 씁쓸했다.
민우가 누나의 빈 잔을 채워주며 위로했다.
“너무 마음 쓰지 마. 좋은 데로 이직하면 그만이잖아? 든사람은 몰라도 난사람은 안다는 말이 있지. 나중에 누나 나가고 나면 난리 날 거야.”
“내가 나가도 회사는 잘 돌아갈 거다. 나야 어차피 회사라는 기계의 부품일 뿐이니까.”
체념이 섞인 한마디. 민우가 생각하는 것보다 쌓인 게 많았던 모양이다.
“아무튼, 이직이 쉽지가 않아. 같은 분야로 가자니 영업에는 명함도 못 내밀겠고. 영어라도 잘하면 어떻게든 될 거 같기도 한데.”
“그래서 아까 영어 얘기 꺼낸 거였어?”
민아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곰곰이 생각에 잠기던 민우가 한 가지 제안했다.
“그럼 내가 주말에 영어 좀 가르쳐줄까?”
“네가?”
“회화는 어렵지만 독해 정도는 해 줄 수 있는…… 아 놔. 그런 눈으로 보지 마. 이래 봬도 명인대 강철훈 선생님 번역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된 귀하신 몸이라고.”
“그게 얼마나 대단한 건지는 잘 모르겠는데.”
“대단한 거야. 언빌리버블! 명인대 학부 출신 동기들도 날 질투하기 시작했다고. 나의 이 위대한 영어 실력에 감탄한 거지.”
“쯧. 중증이다 너도.”
민아는 동생의 허세를 구별해내지 못할 정도로 어리석은 사람은 아니었다.
그래도 외국 이론서를 사전 하나 끼지 않고 읽을 정도면 동생이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한 거라는 생각이 들긴 했다.
잠시 진지하게 생각하던 민아.
그러나 결국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마음만 받을게. 너 공부할 시간도 부족하다며. 주말에도 도서관 가는 거 같더만.”
“사람이 받고만은 못 살지. 때론 베풀 줄도 알아야지. 괜찮으니까 토요일에 명인대 도서관으로 와. 단기 속성 코스로 모실게.”
“일주일에 한 번으로 어느 세월에 되겠어?”
“커리큘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걱정 마. 누나가 좋은 데로 이직해야 내 용돈이 오르지. 안 그래? 일종의 스톡옵션이라고 생각하면 되겠네.”
“역시 그런 속셈이었냐?”
민아는 인상을 찌푸렸지만, 속으로는 동생이 고마웠다. 처음으로 민우가 어른스러워 보이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두 남매는 새벽까지 술잔을 기울였다.
* * *
“오빠. 본가엔 잘 다녀왔어요?”
“어.”
이수빈이 석사 연구실로 들어왔는데도 민우는 컴퓨터 모니터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뭔가를 열심히 찾고 있었다.
“너무하네. 사람이 왔으면 눈 좀 마주쳐 달라고.”
“바빠 지금.”
“칫. 뭐 하는데요?”
“입시 자료 좀 찾고 있어.”
수빈은 고개를 갸웃했다. 입시 자료라니. 과외라도 시작한 걸까?
“고3 과외해요?”
“아니. 집에 누구 좀 대학에 보내야 할 거 같아서. 야간 과정 개설되어 있는 대학 찾고 있었어.”
사실 누나에게 필요한 것은 영어만이 아니었다. 4년제 학위가 필요했다.
민우는 누나에게 학점은행제에 대해 설명을 했고, 학점 취득 후 4년제 대학으로 편입을 고려해 보라는 제안을 했다.
민아는 그것을 받아들였다. 그 누구보다도 대학 졸업장이 간절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집에 누구라면…… 오빠네 누나요?”
예의 그 좋은 향기가 났다. 어느새 수빈이 옆자리에 앉았던 것.
“나 누나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
“아, 그게.”
수빈은 순간 흠칫했지만, 손으로 입을 가리며 아무렇지도 않게 둘러댔다.
“전에 술자리에서 얘기했잖아요. 기억 안 나요? 오빠 뒷바라지하느라 대학 못 가셨다는 얘기 들은 거 같은데.”
“헐. 내가 그런 얘기까지 했다고?”
민우는 왠지 치부를 보인 것 같이 부끄러워졌다.
실제로 그런 이야기를 술김에 하긴 했다. 민우와 관련된 것이라면 하나도 빠짐없이 기억하고 있는 수빈이었다.
“그런데 언니는 무슨 과 가려고 하시는데요?”
“무역 관련 학과.”
“수도권? 아니면 지방대?”
“수도권이면 좋지. 누나가 일산 쪽에서 일을 하거든.”
수빈이 손가락을 딱 튕겼다.
“가람대에 무역 관련 학과 있어요. 야간. 아버지가 거기 교수로 계시거든요. 국제통상학과요.”
“거기 교수셨어?”
수빈이의 부모님이 모두 교수라는 건 알았지만 아버지가 국제통상학과 교수인 건 몰랐다. 민우는 마침 잘됐다 싶었다.
‘가람대라면 인서울 대학이고 평판이 나쁘지 않지. 야간 과정도 개설되어 있다면 누나가 다니기 편할 거야. 딱 좋은데?’
민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쪽 입시 자료 좀 구해다 줄 수 있을까?”
“그거야 뭐 일도 아니죠. 이따 집에 가서 아버지한테 말씀드려볼게요.”
“고맙다 야. 이거 너한테 밥 살 일이 하나둘 늘고 있네.”
“평소에 잘하면 되죠.”
“이 이상 더 잘할 수 있어?”
민우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제 좀 있으면 강철훈 교수와 약속한 시간이 다가온다. 어떤 약속이든 미리 가서 손해 보는 일은 없다.
그래서 그는 약간 아쉬운 표정을 짓는 수빈의 얼굴을 놓치고야 말았다.
“나 강 선생님 연구실 다녀올게. 이따 보자.”
“잘 다녀와요. 오빠.”
고개를 끄덕인 민우는 바로 인문관 4층으로 올라갔다. 강철훈 교수 연구실에는, 이미 학생들이 한가득 차 있었다.
민우는 긴장하며 주변 분위기를 살폈다.
“소개하지. 이쪽은 이번에 새로 우리 팀에 참여하게 된 박민우 군일세.”
다들 먼저 통성명을 한 모양이다. 민우는 꾸벅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박민우입니다. 국문과 석사 1학기이고 현대문학 전공하고 있습니다. 많이 부족합니다만 잘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반가워요.”
꽤 호의적인 분위기에 민우는 기분이 좋았다. 물론 한편으로 씁쓸한 면도 없잖아 있었다.
‘세상에…… 어떻게 내 본진인 국문과보다 여기가 더 호의적이냐! 전과해야 하나?’
그런 생각을 할 만큼 분위기가 좋았다. 계급장 떼고 서로 어울리는 분위기다.
살펴보니 딱 남자 반 여자 반, 황금비율.
팀원의 수는 총 여섯 명. 영어영문학 전공자가 둘이었고, 비교문학 협동과정 학생이 두 명, 나머지 하나는 프랑스 문학 전공이었다.
민우는 이들이 자대생인지는 궁금하지도 않았다. 과도 다르고 각자의 전문분야도 다르니까. 애초에 다른 세계의 사람들인 것이다.
그것은 다른 팀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어쨌든 민우가 들어감으로써 부족했던 퍼즐이 완성되었다. 라인업이 나쁘지 않았다.
강 교수가 헛기침을 하며 말을 시작했다.
“먼저 프로젝트 개요를 간단히 설명하지. 두 명이 한 조가 되어서 한 챕터씩 맡아 번역을 한다. 그리고 나머지 두 조가 교차검증을 한다. 교차검증 중에 개선사항이 있으면 조끼리 협의를 해서 결정하고 최종 사항을 나에게 전달한다.”
흥미로운 방식이었다. 강 교수는 비즈니스적인 프로젝트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수업을 하듯이 업무를 분배하고 있었다.
일종의 조별과제인 셈.
‘번역 부분을 나눈다고 해도 교차검증을 하려면 끝까지 읽긴 해야 하는 거구나.’
민우는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만큼 학생들의 역량을 믿으시는 거겠지. 실망을 드리지 않도록 열심히 해야겠다.’
민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마음을 굳혔다.
“자, 한 장씩들 갖지. 이 종이가 우리의 여정에 길잡이가 될 걸세.”
강철훈 교수가 종이를 학생들에게 나눠주었다. 거기엔 조별 라인업과 담당 챕터, 그리고 비상 연락망이 적혀 있었다.
민우는 우선 누구와 한 조가 됐는지부터 확인했다.
“정연주 선생님?”
“예.”
민우와 같은 조를 이룬 학생은 정연주. 프랑스 문학 전공자였고, 마침 민우의 옆자리에 앉아 있었다.
꽤 어려 보였다. 많이 잡아도 20대 초반 정도 되어 보였다. 단발머리에 흰색 머리핀을 하고 있었다.
귀엽다.